[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8월 29일이 무슨 날인지 물어보면 머뭇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1910년 8월 29일로 연도를 붙여보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114년 전 이날은 '한일병합조약'이 발효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날이다. 물론 '한일병합'이라는 용어 대신 '한일합방'이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된 날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국권이 피탈된 치욕의 날이다. 즉, 국치일이다.
통감부와 총독부 등 식민 통치기구 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조선에서 입지가 커졌다. 그 영향이 남산 일대에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시대에 소시민 계층이 살던 남촌, 즉 남산 자락에 일본인 거주지가 생기고 일제 식민 통치기구가 들어섰다. 게다가 일본의 종교 시설인 신사(神社)까지 세워졌다.
이러한 남산에 가면 '국치길'이 있다.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남산 자락 약 1.7km 구간에 조성된 길이다. 이 길 곳곳에 자음 '기역'을 모티브로 '국치길'이라 쓴 보도블록이나 표지판으로 안내되어 있다. 남산의 풍광과 서울 도심을 함께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국치길'을 걸으려면 명동 근처 '남산예장공원'에서 시작하면 좋다. 이 공원에는 총독부 관사 터가 있다. 이곳에 조선총독부 관사가 있었던 이유는 남산 자락에 조선총독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원에는 또한 '이회영 기념관'이 있는데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삶을 기리는 공간이다.
공원 앞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맞은편의 작은 길을 잠시 오르면 '기억의 터'라고 쓰인 표석이 나온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공간인 '기억의 터'는 옛 통감관저 자리에 들어섰다.
통감부는 을사늑약 후 일제가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통감부는 1906년 2월 설치되어 1910년 8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구다.
통감관저 표석에는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라고 쓰여 있다. 이날 조인한 강제병합' 조약을 공포해 효력이 발휘된 날이 8월 29일, 즉 국치일이다.
소방재난본부 옆 소파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총독부 청사 터가 나온다. 원래는 통감부 청사였는데 1910년 8월 총독부 체제가 되자 총독부 청사로 쓰였다. 이곳의 총독부 청사는 1926년 경복궁 경내에 들어선 청사, 즉 옛 중앙청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쓰였다.
해방 후 통감부 터 혹은 총독부 청사 터에는 여러 용도의 건물이 들어섰었는데 1980년대와 90년대에 '국가안전기획부' 부속 건물로 쓰이기도 했다. 그 후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쓰이다가 지금은 '서울 창조산업허브' 조성 공사 현장이다.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과 신사의 흔적
조선총독부 청사 터 바로 앞에는 리라초등학교와 숭의여자대학교가 있다. 이들 학교에서도 일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리라초등학교 외벽을 따라 돌아가면 '남산원'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이 나오는데 러일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일본군 장성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는 '노기 신사'가 있던 곳이다. 당시에 쓰인 석물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숭의여자대학교 교정에는 '경성신사 터'가 있다. 1887년 한양에 살던 일본인들이 '남산대신궁'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고 1916년에 '경성 신사'로 개칭했다. 1925년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 조선에 있는 일본 신사를 대표했었다.
숭의여대에는 '갑오역기념비'도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들을 추모하는 이 기념비는 교정의 언덕길 즈음에 있었다던 기록과 흐릿한 사진만 지금 남아 있다.
그러니까 남산 자락에 들어선 학교들의 터가 원래는 일본의 종교 시설인 신사와 일본군 전사자들을 기리는 탑을 조성한 자리였다. 그 일대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인 '왜성대공원'도 있었다.
왜성대공원은 1897년 일본인 거류민단이 남산 북쪽 자락 1만 ㎡를 조선 정부로부터 조차해 일본인을 위한 위락 시설로 조성한 공원이다. '왜성대'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당시 남산 일대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을 기리는 의미였다.
일본인 거류민단은 1910년에 남산 서북쪽 산비탈의 부지 30만 평을 한성부로부터 무상으로 대여받아 또 다른 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고종은 이 공원에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직접 쓴 글씨까지 내렸다고 한다.
관련 자료를 참조하면, 왜성대공원은 지금의 숭의여자대학교와 리라초등학교 일대에, 한양공원은 지금의 한양도성박물관 일대와 숭례문 일대에 들어선 걸로 보인다.
숭의여대에서 소파로를 따라 돈가스 식당들과 남산 케이블카 탑승장을 지나면 '한양공원 비석이 나온다. '국치길'이라 쓰인 표지판도 함께 있다. 고종이 썼다는 '한양공원' 글자가 뚜렷한 전면과 달리 후면은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다.
한양공원 비석을 지나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덕분에 유명해진 계단이 나온다. 원래는 조선신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던 곳이었다. 조선신궁을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길게 이어지는 계단이 보이는데 모두 384개의 돌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일명 '삼순이 계단'을 오르면 네 여성을 형상화한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마중 나온다. 조형물의 네 여성 중 세 명은 한국, 중국, 필리핀 소녀를 상징하고 다른 한 명은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를 상징한다.
이 기림비가 자리한 곳 일대에 '조선신궁'이 있었다. 조선신궁은 1925년 남산 구간의 한양도성을 허물고 들어섰다. 그 옆의 한양도성박물관에서 관련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조선 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에 세웠다. 게다가 신궁(神宮)이라는 가장 높은 사격(社格)을 가진 신사(神社)였다. 모두 15개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흔적은 일반인들이 참배하던 배전(拜展) 터가 유일하다.
안중근 의사와 백범 김구
조선신궁 터와 가까운 곳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동상이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옆 계단으로 내려가면 백범광장이 나오는데 김구 선생의 동상도 서 있다.
그런데 숭의여대 교정에도 안중근 의사 동상이 있다. 숭의 교정의 동상은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 있던 두 번째 동상이라고 한다. 즉 현재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 있는 동상은 세 번째 동상이다.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최초의 안중근 의사 동상은 1959년 5월 숭의여대 교정에 세웠고 이 동상을 1967년 4월 남산 공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973년 두 번째 동상이 건립되자 첫 번째 동상은 전남 장성 상무대로 옮겼고. 2010년에 세 번째 동상이 건립되면서 두 번째 동상을 숭의여대 교정으로 옮긴 것이라고.
남산에 가면 이렇듯 식민지 시절의 흔적은 물론 독립운동을 기리는 공간이 함께 있다. 물론 이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은 다양하니까. 다만 역사를 왜곡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역사의 진실까지 바뀌진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