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최종원 기자]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 해소와 기업 경기 활로 모색을 위해 배임죄 폐지 등 경제형벌들을 다수 개선하기로 한 가운데, 배임죄 폐지는 시기상조이며 대체입법이 필수적이라는 학계와 시민단체의 지적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기업활동 옥죄는 배임죄, 형법 아닌 민사적 접근 필요"
배임죄는 형법에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를 통해 재산상 이익을 얻거나 제3자가 이익을 얻도록 해 사무 처리 위탁자나 이해관계인의 재산상 이익을 침해하는 범죄다. 한국은 특히 형법상 일반·업무상 배임죄 외에 회사법상 특별배임 규정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 규정까지 처벌 범위가 넓은 국가로 꼽힌다.
상법 개정 과정에서 배임죄는 더욱 이슈로 떠올랐는데, 이사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로 확대되면서 배임죄 처벌 가능성이 커진 데다 외국 기업들의 한국 투자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인 민주당은 이같은 목소리를 반영해 배임죄를 민사화하는 완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핵심은 경영상 판단이 여러 정보에 근거해 성실하게 이뤄진 것이라면, 결과에 무관하게 해당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다.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민사적 절차를 중심으로 해결하고, 고의성과 중대성이 명확한 경우에만 형사 책임의 제한적 부과 방향이 필요하다"며 "경영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이해관계자의 권익을 균형 있게 보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민사적 책임으로 배임죄 대체 불가…사기 범죄 처벌 위해 존치해야"
하지만 일각에선 배임죄를 폐지하고 별도의 대체입법을 추진하는 데 대해 실익이 없고, 되려 재벌체제 고착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비치고 있다. 배임죄 폐지 논의가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과 경제 정의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관측이다.
앞서 경제개혁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이로움재단, 참여연대는 14일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이재명 정부·민주당의 형법상 배임죄 폐지 추진, 무엇이 문제인가' 좌담회를 개최해 형법상 배임죄 폐지 방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체입법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 발제를 맡은 장진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박사는 "배임죄가 단순한 재산권 보호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신뢰의 기능적 안정성을 보호하는 공익적 의미를 가지며, 바로 이 점 때문에 민사책임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형사적 특징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배임죄와 관련된 해외의 입법 모델을 ▲게르만형 배임모델 ▲프랑스·로마형 배임모델 ▲영미형 해결모델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독일을 포함한 85개국이 배임죄를 채택하고 있거나 배임죄 유형을 부분적으로 처벌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장 박사는 "배임죄의 대체입법을 하더라도 규범적 판단 문제를 피할 수는 없으며, 입법론적 구체화와 별개로 배임의 행위 유형별로 분석하여 예측 기준으로 참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노종화 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은 배임죄 폐지 논의에 대해 "기업활동 위축 우려는 과장된 주장"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노 위원은 이미 경영판단원칙이 법리적으로 확립돼 있어 이를 기소 여부 판단에도 적용하고 있고, 오히려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경영판단원칙을 일관성 없이 해석하거나 지나치게 넓게 인정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노 위원은 또 "미국 역시 사기 등으로 유사 행위를 처벌하고 있으며, 대규모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처벌 수준도 한국보다 높다"고 언급했다. 노 위원은 배임죄가 횡령이나 사기 등으로 규율되지 않는 경제범죄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해왔으며, 주주충실의무 도입만으로는 배임죄의 역할을 대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후적인 피해 회복을 위해서는 민사상 적극적인 책임 추궁도 필요하지만, 그와 별개로 경제정의를 위해 형사규율이 필요하며, 그러한 긍정적 효과가 배임죄 일부 남용으로 인한 부정적 효과보다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 저하 우려…재벌 사익편취 심화될 것"
조연성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위원회 위원장은 배임죄 폐지 논의가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과 경제 정의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디스카운트는 재벌 집중적 불투명한 소유구조와 총수 일가의 사익 추구 및 부의 세습이 핵심 원인이라며, 배임죄는 재벌의 권한 남용을 억제하는 형사적 통제 장치로 기능해왔다는 것이다.
조 위원장은 "OECD 평균 기업지배구조 제도 수준과 비교해 한국은 실질적 거버넌스 개선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배임죄를 폐지하면 ▲형사적 통제 장치의 약화 ▲정보 비대칭의 심화 ▲경영자 책임과 권한의 불균형 ▲내부통제 제도의 미비 등의 문제가 심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배임죄를 폐지하기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민사적 구제 수단도 강화해 기업의 투명성과 책임경영을 제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김남주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위원장은 배임죄가 기업 사유화와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를 억제하는 핵심 형사제도라고 높이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배임죄는 횡령죄를 보완하며, 경제적 신뢰를 지키고 기업의 사유화를 막는 핵심 장치이기에 처벌이 남용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배임죄가 마치 선의의 기업인을 처벌하는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민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당정이 충분한 보완 입법 없이 배임죄부터 폐지하면 혼란과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라며 "그 필요성을 납득할 수 없는 배임죄 폐지 방침은 즉각 철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자본시장법 개정 등 대체입법제도 마련해야"
마지막 발제를 맡은 한경수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도 배임죄 폐지는 섣부르며, 신중한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위원은 "배임죄가 재벌총수의 사익편취를 억제하는 최소한의 방파제 역할을 해왔다"며 "현행 제도의 불명확성과 자의적 집행 우려, 사법기관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판단 우려 때문에 개선의 필요성은 인정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 위원장은 동시에 ▲주주대표소송제도 실질화 ▲자료제출의무 확대 ▲집단소송법 및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공정거래법 및 자본시장법 개정을 포함한 대체입법 마련 등 최소한의 제도 개선 방안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배임죄 폐지를 추진할 것이라면, 대안 입법을 패키지로 제안해 일괄 추진해야 기득권에 대한 특혜가 아닌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제언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배임죄는 분명히 재벌총수의 사익편취를 막는 형사제도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며 "배임 행위를 방지할 민사적 수단을 마련하지 않은 채 배임죄를 폐지하면 경제질서가 훼손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TF 당정협의에서 "과도한 경제형벌은 기업뿐 아니라 자영업자 소상공인까지 옥죄면서 경제활력을 꺾어왔다"며 "대표적인 사례가 배임죄"라고 지적한 바 있다.
김 원내대표는 "배임죄는 기업인의 정상적인 경영 판단까지 범죄로 몰아 기업 운영과 투자에 부담을 줘왔다"며 "민주당과 정부는 배임죄 폐지를 기본 방향으로 정했다. 주요 범죄에 대한 처벌 공백이 없도록 대체 입법 등 실질적 개선 방향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