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차례와 제사의 역사 300년도 안 돼...민족문화란 건 허구 - 임진왜란·병자호란 거친 조선왕조...제사 교조화로 위기 모면 시도 - 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왕조 관혼상제, 유교에 완전히 포맷당해 - 국가 엘리트집단 ‘남성’...위기 상황이면 제사로 ‘생활권력’·‘지식권력’ 강화 - 홍동백서·조율이시 등 대한민국 차례상 규칙은 일제강점기 총독부 유래

[기획특집-명절 차례]② 계승범 교수 “여성 희생 필요한 제사는 폭력”

2021. 01. 19 by 이상진 기자

설과 추석에 지내는 차례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차례는 조상을 기리고 조상의 음덕에 감사하는 전통이라는 통념에 맞서, 차례상을 차리는 게 경제적·시간적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는 모양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친족이 모이기 어렵게 되면서, 차례를 간소화하거나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뉴스포스트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국내 유수 빅데이터 연구소인 <글로벌빅데이터연구소>와 함께 신년특집을 통해 차례를 둘러싼 논란을 짚어봤다. - 편집자주

계승범 교수는 현재의 가부장적 차례 규칙이 남성의 '생활권력' 행사의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계승범 교수는 현재의 가부장적 차례 규칙이 남성의 '생활권력' 행사의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자기는 평소에 한복 안 입고 양복 입고, 사서삼경 줄줄 외지도 못하면서, 명절만 되면 무슨 전 부쳐라, 전을 시장에서 사 와서 정성이 없네, 이런 소릴 왜 하냐는 거죠. 음식은 여자들이 다 하는데, 왜 여성을 제사에 못 들어오게 해요? 이건 남자들이 차례나 제사로 ‘생활권력’을 행사하는 거예요.”

계승범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뉴스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명절 차례와 제사가 여성을 사회 주류에서 배제하는 남성들의 ‘생활권력’ 행사의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사회 주류층에서 밀려난 남성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차례와 제사를 교조화했다는 설명이다.

이어 계승범 교수는 “남성이 제사의 깨알 같은 매뉴얼을 만들어내는 게 곧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면서 “지금의 차례와 제사는 그걸 지키면 전통 양반이고 안 지키면 상놈이라는 ‘생활권력’ 문제이고, 실제 돌아가신 조상이 제사상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날 본지는 서울 마포구 신수동 소재 서강대학교 정하상관에서 계승범 교수를 만나 우리나라 명절 차례와 제사의 역사와 의미, 문제점을 짚어봤다.

- 한국사, 특히 조선시대 전문가로서 명절 차례와 제사를 어떻게 보는지?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전공하고 있지만, 차례와 제사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차례와 제사를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가족 구성원이 많아서다. 특히 우리나라 차례 부담 대부분이 며느리 등 여성에게 집중돼 있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건 폭력이지 미풍양속이 아니다.”

- 명절 차례와 제사가 반만년 한민족의 역사이고 민족문화인 까닭에 지켜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거는 심한 뻥튀기다. (웃음) 반만년 역사라고? 지금의 차례와 제사 형태는 불과 300년 됐다. 고려시대에도 이런 문화가 없었고, 조선시대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이렇게까지 교조화된 제사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민족문화라....... 민족(民族)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으로 유럽에서 태동한 ‘Nation’의 번역어다. ‘Nation State’를 어떻게 번역할까 하다가 ‘민족 국가’라고 번역했다. 이처럼 본래 민족이란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다. 19세기 말 민족주의,국가주의, 국수주의 등 제국주의 일본의 번역을 통해 동아시아에 융단폭격처럼 쏟아진 개념에 불과하다. 민족이란 단어 자체가 근대의 산물인데, 더욱이 민족문화란 건 허구다.”

- 왜란과 호란 등 국가 위기 상황을 전후로, 조선왕조 엘리트집단의 열등감이 문제였단 말인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오랑캐들이 한족 중심 명나라도 망하게 하고 조선도 위협했다. 그때 명나라를 우주의 중심으로 봤던 조선 엘리트집단인 왕족과 사대부들은 오랑캐가 득세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선 엘리트집단은 성리학, 그러니까 주희가 만든 주자학에서 답을 찾았다. 주희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완성한 유학자로, 남송 3년에 태어났다. 문제는 당시 남송이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강남으로 쫓겨온 상태였다는 거다. 주희는 한족 중심의 세계관이 흔들리자, 이기이원론을 통해 언젠가는 한족 중심의 세상이 회복될 것이라 믿었는데, 이걸 500년 뒤 조선 사대부들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를 ‘소중화’라고 칭하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중심으로 관혼상제 규칙을 교조화한 거다.”

- 왜란은 16세기 후반, 호란은 17세기 초반에 일어났는데 그 이전 본래 한반도의 관혼상제는 어떤 모습이었나.
“동아시아역사를 보면 몽골문명과 황허문명 이쪽은 굉장한 가부장제 사회였다. 반면에 시베리아와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는 유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가부장적 사회가 아니었고. 물론 정치나 주요 사회활동은 남성들이 했지만, 집안에서는 여자와 남자, 아들과 딸의 구별이 없었다. 상속도 차별이 없었고. 제사를 윤번제로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지냈다. 그래서 부모 3년 상도 없었다. 이혼한 여성들도 재혼이 자유로웠고. 이때는 여자가 ‘시집을 간다’라는 말 대신 남자가 ‘장가를 간다’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통용됐다.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통해서 거주공간이 바뀌는 건 여자가 아닌 남자였던 거다. 남자는 처갓집에 장가가서 살다가, 벼슬이나 해서 출세하지 않으면 처가에 평생 눌러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난 2018년 서울 종로구 종묘에서 종묘대제봉행위원회가 종묘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대제는 조선왕조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사진=뉴시스)
지난 2018년 서울 종로구 종묘에서 종묘대제봉행위원회가 종묘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대제는 조선왕조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사진=뉴시스)

-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들여왔는데, 왜 건국 초기부터 생활문화 전반이 바뀌지 않았나?
“인류학에서 보면 외래 사조가 들어올 때 가장 끝까지 버티는 전통은 장례풍습과 결혼풍습이다. 이 두 가지가 외래 사조식로 바뀌었다고 하면, ‘전통문화가 포맷당했다’라고 보면 된다. 현재 대한민국은 유교로 전통문화가 포맷당했지만, 조선이 들어서고도, 완전히 유교화 되기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대표적으로 남자가 결혼할 여자 집에 가서 여자를 직접 데리고 오는 친영(親迎)이란 제도가 있다. 가부장제 사회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제도인데, 이 첫 사례가 16세기 초 중종 때 처음 나온다. 그만큼 유교식으로 사회문화 전반이 포맷당하는 게 오래 걸렸단 얘기다.”

- 유교식 장례와 결혼 문화가 익숙한데,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유교 이전 관혼상제 흔적이 있을까.
“남자가 ‘장가를 간다’라는 풍습은 1,000년 이상 한반도에 있었다. 조선 후기 때도 신랑이 처갓집에 가서 결혼을 했고.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에도 결혼은 처갓집이 위치한 지역에서 하고는 하는데, 이런 전통적 배경이 있다. 지금도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처갓집에서 하룻밤 자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도 처가살이 풍습의 잔재다.”

-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기준도 유교 때문에 생겼나?
“흥미로운 건 유교의 어느 경전에도 그런 규칙은 없다. 주희가 관혼상제 예법을 논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규칙은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생겼다. 17세기 이전에는 제사상도 단출하고 지역마다 달랐다. 고려시대에도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지금처럼 규격화되지 않았다. 홍동백서니 하는 우리나라 차례 규칙은 1934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의례준칙’을 세워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도록 규정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총독부의 ‘의례준칙’을 보강한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했는데, 60년대부터 홍동백서 같은 기준이 나왔다.”

- 일제강점기 등 국가 위기 상황에서 남성들이 차례와 제사를 한층 교조화했다고 봐도 될까.
“그렇다. 나라가 망하니까, 남자들, 특히 양반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체면을 유지할 기준이 집안과 문중뿐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출판물을 종류별로 줄 세우면 족보가 1등이고 베스트셀러다. 한심한 작태다. 하지만 이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 그렇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조선 엘리트집단이었던 사대부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기댈 게 없어진 거다. 내가 양반이라는 걸 증명해줄 나라도 망하고 공식적으로 신분제도 철폐됐다. 출세길도 영원히 막혔다. 그러니 족보 만들고 제사 지내면서 ‘내가 양반이야!’ 이랬던 거다. (웃음) 또 나라가 망한 뒤로 중인이나 천민 출신들도 제사를 지내면서 양반 집안이었던 것처럼 행세를 했다. 사서삼경 외우기는 어렵지만, 제사 지내기는 쉬우니까.”

- 문제는 지금도 차례와 제사가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 특히 여성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거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나?
“차례와 제사를 준비한다는 의미가 뭐냐면, 음식을 준비한다는 말이다. 음식은 유교 사상으로 한반도가 포맷당한 조선 후기 이후 여성들의 전담이었다. 그러니 여성들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막상 제사상 차린 여성들은 제사 지낼 때 부엌에만 있고 제사에 참여하지는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도 연출된다. 조선시대 후기 이후로 흔한 풍경이다. 남성 중심으로 제사의 깨알 같은 매뉴얼을 만들어내는 게 곧 권력이다. 그걸 지키면 전통 양반, 안 지키면 상놈이 된다는 식. ‘내가 제사에 대해선 전문가지’, 이런 ‘지식권력’과 ‘생활권력’이 문제다. 조상이 정말 와서 제사상 먹느냐는 관심이 없다. 이건 현재 권력의 문제다.”

계 교수는 차례와 제사가 특정 가족 구성원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미풍양속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계 교수는 차례와 제사가 특정 가족 구성원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미풍양속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 차례와 제사를 둘러싼 일부 가족 구성원이 짊어지는 지나친 부담을 해결할 방법을 제언한다면.
“차례를 상다리가 휘어지게 하려면 해라. 대신 남성 중심 가부장제에 따라서 아내가, 며느리가, 또는 가족 구성원의 그 누구라도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면 안 된다는 거다. 정 제사상에 뭐가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본인이 준비하면 된다. 며느리나 아내에게 시키지 말고. 만약에 차례나 제사에 대해 아내와 뜻이 맞지 않으면 이혼하면 된다. 이혼하고 새 여자랑 결혼해서 재밌게 차례랑 제사 지내면 된다. 다만 새 여자는 차례나 제사 지내는 걸 좋아하는 여자여야 하겠지만. (웃음)”


※계승범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약력
1984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업(문학사)
1992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업(문학석사)
1998 University of Washington 국제학(한국학) 졸업 (문학석사)
2006 University of Washington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2002~2006 University of Washington, Dept of History, Lecturer
2005 Seattle University, Dept of History, Lecturer
2006~2007 UCLA, Dept of Asian Languages & Cultures, Visiting Lecturer
2008~2010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2005~조선시대사학회 회원 (2014~ 국제이사)
2007~역사학회 회원
2008~한국사학사학회 종신회원 (2013~2014 총무이사)
2010~한국역사연구회 회원 (2015~ 편집위원)
2011~명청사학회 회원(2012~ 종신회원)
2011~한국사연구회 회원
2012~한국사상사학회 회원
※저서
『중종의 시대: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역사비평사, 2014.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1.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역사의 아침, 2011.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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