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집이라도 노인들 놀 곳 없어 “나누는 삶, 쓸쓸할 틈 없이 항상 즐거워” 

[선한영향력]⑥ 폐지 주으며 정(情) 나누는 대학동 할머니

2021. 07. 28 by 이해리 기자

폭행, 방화, 극단적 선택 등 잔혹한 사회 이슈가 온갖 자극적인 수사를 붙여 보도되는 요즘. 맘씨 좋은 이웃의 따뜻한 일화들은 흔히 “미담은 뉴스 가치가 떨어진다”라는 핑계로 뉴스 순서를 뒤로 밀거나 아예 보도하지 않곤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뉴스포스트가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의 고운 향기를 퍼뜨리는 인물을 만나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 편집자주

[뉴스포스트=이해리 기자] 멀리 폐지를 가득 실은 고철 손수레가 보인다. 최춘자(80) 할머니는 마른 몸으로 길가에 폐지를 주워 담았다. 이날 종일 폐지를 주워 손에 쥔 돈은 2,500원 남짓. 무거운 수레를 끌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마의 땀이 흘러내렸다.  

22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최춘자 씨가 폐지를 수거하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해리 기자)
22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최춘자 씨가 폐지를 수거하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해리 기자)

22일 서울 관악구에서 만난 최 씨에게 폐지를 줍는 이유를 묻자 “천 원이라도 벌어서 이웃과 나누며 산다. 나누는 재미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최 씨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미룰 정도로 쇠약해져 있지만, 새벽부터 일어나 거리를 청소하고 폐지를 수거하며 분주히 하루를 보낸다. 이날 취재진은 최 씨의 하루를 동행했다. 

새벽 5시 눈을 뜬 최 씨는 분주히 집 앞의 쓰레기를 치우고 거리를 쓸었다. 최 씨는 “미화원분들보다 먼저 거리를 치운다. 그분들이 오면 쓰레기 없다고 놀라워한다. 처음에는 불편해했었는데, 이제는 감사하다고 얘기한다”라고 말했다. 

밤사이 최 씨의 집 앞에는 재활용품들이 쌓여있었다. 주변 이웃들이 가져다 놓은 것이다. 최 씨는 “제가 폐지를 줍는걸 아니까 주변 고시원 학생들도 우리 집 앞에 책이나 택배 상자, 병, 깡통 등을 가져다 놔준다. 참 고맙다”라고 전했다. 

서울 관악구 대학동 소재 최 씨의 집은 노인정이라고도 불린다. 길가에 나온 노인들을 그냥 보내지 못하는 탓이다.

최 씨는 “산책하는 노인들이 많은데 주변에 화장실도 마땅치 않아서, 편하게 들렀다 가셔라 하면서 차도 한 잔 내주니 노인정이 됐다”라며 “노인들은 시간은 많은데 놀 곳은 없다. 서울에 한 집이라도 놀 곳이 어디 있나. 집에 놀러 오시면 음식도 나눠 먹고 이런 게 사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자원센터에 폐지를 수거해온 노인을 도우러 뛰어가는 최 씨. (사진=뉴스포스트 이해리 기자) 
자원센터에 폐지를 수거해온 노인을 도우러 뛰어가는 최 씨. (사진=뉴스포스트 이해리 기자) 

최 씨는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동네의 폐지를 수거했다. 지난해 허리를 다쳐 수술한 이후 장시간 보행이 불편해 보호대를 착용하고 집을 나섰다. 무리하는 것이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놀던 사람이나 놀지, 일하던 사람은 놀면 못 견딘다”라며 “허리가 아파서 몇 시간 못 돈다”라고 답했다. 

아들 셋, 딸 하나 4남매를 키워내면서 열심히 일하던 것이 습관이 됐다고 했다. 자식들은 부족하지 않게 용돈을 보내주지만, 소일거리라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 자식들은 최 씨가 폐지를 수거한다는 사실을 몰라, 자식들이 방문하는 날이면 이웃에게 부탁해 손수레를 숨긴다. 

이날 3시간가량 수거한 폐지를 자원센터에 넘기고 받은 돈은 2,600원이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폐업한 가게도 늘었고, 늦게까지 운영을 하지 않아 나오는 재활용 쓰레기 자체가 줄어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최 씨는 돈보다도 거리가 깨끗해지는 게 보기 좋다고 말했다. 

최 씨는 “많은 액수는 아니어도 돈을 벌 수 있고, 이 돈을 모아 콩 한 쪽이라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 수 있다”라며 “또 내가 폐지를 수거함으로써 거리도 깨끗해지면 내 기분도 좋아진다”라고 전했다. 

취재진에게 내준 과일과 차. (사진=뉴스포스트 이해리 기자)

코로나19로 폐지 수거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사람들과의 교류가 줄어든 것이 가장 아쉽다고 토로했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다 30년 전 서울로 올라온 최 씨는 이웃과 어울리고 나누는 풍경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일주일에 2번 방문하던 요양보호사도 안부 전화만 대신하고 있고, 특히 8명의 손주를 보지 못해 속상하다고 말했다. 

최 씨는 “명절에는 손주들에게 많은 돈이 아니라도 1~2만 원씩 용돈을 주면 ‘할머니 고맙습니다’ 얘기를 듣는 기쁨이 있는데, 작년부터는 코로나 때문에 통 만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했다. 

폐지 수거 후 집으로 돌아온 최 씨는 기자에게도 차와 과일을 내주며 이웃에게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살아가라 당부했다.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이웃과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고, 층간소음 갈등으로 얼굴을 붉히는 지금 세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최 씨는 “내가 힘들고 고생해도 남에게 잘해주면 마음이 전달된다”라며 “이웃 간의 정을 나누면 보람 있고 재미도 있어 쓸쓸할 틈이 없다. 항상 즐겁게 살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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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선 2021-07-28 14:05:56
할머니 건강하셔요!
따뜻한마음 2021-07-28 11:49:12
정말 좋은 기사네요. . 이런 따뜻한 기사 많이 보고싶어요.^^ 어르신 날이 많이 더운데 더위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