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 30주년을 맞은 강남과 제일 가까운 신도시 분당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외국 생활을 오래 하다 얼마 전 분당에 정착한 지인이 있다. 그는 분당이 처음 개발된 즈음에도 몇 년간 분당에서 살았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분당은 강남과 가장 가까운 신도시라는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재건축을 요구하거나 엘리베이터 등 시설 공사 안내 플래카드가 붙은 아파트 단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건물이 낡은 것보다 아파트 단지와 길가의 나무들이 높이 자란 걸 보니 그 세월을 느끼게 됩니다.”
오랜만에 분당으로 온 지인은 세월의 흐름을 훌쩍 자란 나무의 키에서 느꼈다. 분당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들은 미처 느끼지 못한 변화다. 나무가 조금씩 자라고 나이테가 하나씩 늘어간 만큼 1기 신도시 분당은 30년 세월을 겪었다.
남단녹지에서 신도시로
분당은 서울시청으로부터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있다.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 분당은 ‘남단녹지’로 불리던 개발제한구역이었다. 성남시 남쪽에 위치하며 분당구가 되기 전에는 성남시 중원구에 속했다.
성남시가 아직 광주군이었던 시절에는 분당 대부분이 광주군 돌마면에 속했고, 금곡동과 구미동 그리고 판교 일대는 광주군 낙생면에 속했다. 돌마와 낙생이라는 지명이 지금은 학교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분당을 경부고속도로에서 바라보면 비닐하우스가 넓게 펼쳐졌었다. 산과 구릉지 그리고 하천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개발제한구역이었던 남단녹지는 강남과 무척 가까워 부동산 관계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지역이었다. 수도권 인구 증가와 주택 부족 때문에 서울 인근에 신도시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89년 4월 신도시 개발 정책을 발표한다. 당시 신문 기사들은 ‘서울의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고 ‘주택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성남시 분당동 일대에 540만평’, ‘고양군 일산읍 일대에 460만평’ 규모의 주택도시 두 곳을 건설한다고 정부의 계획을 설명한다.
그런데 신도시 개발 주체가 되기 위한 한국토지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 사이의 알력이 심했다. 정부 입장은 두 기관이 분당과 일산을 각각 나눠 개발하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두 도시 모두 한국토지개발공사가 하게 되었다. 부동산 개발 붐을 타고 경쟁을 벌이던 두 기관은 2009년 한국토지주택공사로 한 기관이 된다.
아파트 단지에 붙은 마을 이름의 시초
지금은 신도시에서 택시를 잡으면 특정 마을 이름으로 행선지를 대곤 한다. 이러한 마을 이름도 1기 신도시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렇게 마을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건설회사 이름이 곧 아파트 이름이었다. 대치동 우성아파트나 방배동 삼호아파트처럼. 예전에는 아파트 측면 벽에 건설회사 이름과 동 숫자를 함께 크게 쓰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분당 시가지 개발 단계에서 아파트 측면 벽에 건설회사 로고 대신 마을 이름을 붙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당시에는 분당 전체가 분당동이어서 동명만으로 아파트 단지를 구분하기에 무리도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작은 단위인 3~4개의 단지를 묶어 하나의 마을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마을 이름을 공모했다. 그때 뽑힌 마을 이름이 지금도 쓰인다. 효자촌, 파크타운, 상록마을 등 야탑역 인근부터 오리역 인근까지 늘어선 아파트 단지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현대적이지만 폐쇄적인 집단 주거 공간인 아파트에 마을 개념을 도입해 같은 곳에 산다는 공동체 의식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평형대의 아파트로 이뤄진 마을이 있고, 상대적으로 작은 평형대의 아파트로 이뤄진 마을도 있어 아파트 크기로 주민을 카테고리 짓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지하철역은 어디로?
신도시라는 의미는 모도시(母都市)가 있다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는 모도시에서 경제 활동을, 신도시에서 주거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교통망 부설, 특히 전철이나 지하철 부설이 신도시 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분당은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을 모도시로 한다.
신도시로 개발될 당시 분당에서 제일 가까운 전철역은 지하철 3호선 수서역이었다. 자연스럽게 지하철 3호선과 연결되고, 성남시 외곽을 지나며, 분당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지하철 분당선 부설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역사(驛舍)의 위치였다. 특히 분당 구간의 지하철역을 주거지역과 가깝게 배치할 것인가 아니면 상업지역과 업무지역에 배치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주민 편의냐 비즈니스 편의냐로 의견이 나뉜 것이다.
새로 부설된 지하철은 결국 상업지역과 업무지역을 지나는 것으로 결정됐다. 서현역과 수내역이 백화점 지하에 있는 이유다. 대신 지하철역을 계획보다 더 많이 만들었다. 원래는 3개 역을 설치하는 것이었으나 모두 7개 역을 만들었다. 그래서 분당을 지나는 지하철역에는 주변 아파트 단지로 연결되는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노선들이 발달했다.
부설 초기 3호선 종착역까지만 연결되었던 분당선은 지금은 수인분당선으로 서울 청량리에서 수원, 그리고 인천까지 연결되는 매우 긴 노선이 되었다. 그리고 민자 지하철인 신분당선도 부설되어 강남까지 연결 시간이 빨라졌다.
옛 흔적이 남은 중앙공원
분당은 북서쪽으로 청계산이, 동쪽으로는 불곡산과 영장산이 있다. 그 사이로는 탄천이 한강으로 흐른다.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에는 전형적인 도시 외곽 농촌이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사람들이 살아온 고장이었다.
신도시 개발 예정지 한가운데에 야트막한 산이 있다. 그곳은 터가 좋아 그 지역에서 뿌리내린 한산 이씨 종중 묘가 흩어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불곡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분당천이 탄천으로 향하고 큰 연못도 있었다.
그 야산을 허물고, 하천을 막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뻔하기도 했지만 일부 보전되었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꽃무릇이 만발한 분당 중앙공원이다.
한산 이씨 종중은 정부와 협의 끝에 그 땅을 기부하는 대신 묘역을 그대로 보전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래서 분당 중앙공원은 분당 주민이 즐겨 찾는 녹지로 살아남았다. 야트막한 산에 펼쳐진 등산로와 탄천과 연결되는 분당천 산책로는 분당 중앙공원을 상징하는 운동코스가 되었다.
분당 중앙공원에는 옛 흔적도 남아 있다. 공원 내 야산에는 한산 이씨 문중 묘들이 여러 곳 있고, 이들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들과 사당도 있다. 그리고 옛 가옥을 재현한 '수내동 가옥'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분당 개발 당시 분당동, 야탑동, 도촌동 등에서 발견한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 10기도 이곳으로 이전해 보존하고 있다.
분당은 1991년 9월 30일부터 입주를 시작했다. 얼마 후면 입주 30주년이 된다. 세월이 흐른 만큼 낡은 시설을 교체하자거나 아예 새로 짓자는 의견도 솔솔 올라온다. 하지만 강남과 가깝다는 이점이 부동산 가격에 반영되어 떨어지질 않는다.
서울의 연장으로 개발된 분당은 한때 서울의 남쪽 끝에 붙은 변방 도시였다. 하지만 서울을 바라보며 들어서는 변방 도시는 이제 고속도로를 따라 충청도와 경계한 경기도의 끝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경부고속도로 서울요금소 옆 분당을 지나치며 어쩌면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까.
※ 참고 자료
안건혁, 《분당에서 세종까지》, 한울 아카데미
김시덕, 《서울선언》《 갈등도시》 《대서울의 길》, 열린책들
이창무 외, 〈분당신도시의 성장과 상권의 변화 과정〉, 국토계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