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 전문가 칼럼=이대성] 조선 중종 때 문신이자 어부가(漁父歌)를 지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1467~1555)과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1501~1570)의 이야기다. 농암 선생이 84세 퇴계(退溪) 선생이 50세 되던 해에 퇴계의 거처인 계상서당(溪上書堂)을 농암이 찾아간다. 퇴계는 이를 기념하여 "가장 빛이 나는 늙은 신선께서 해마다 온갖 꽃 핀 두메로 이르시는 것이라네"라고 읊자, 농암이 이를 받아 "오로지 꽃 같은 곳 따라 여러 번 집 지어 옮겼네. 지금은 돌아가는 길, 물이 필요 없네. 골짜기 건너 바위 뚫고 지나면 냇물 가에 있으니."라고 화답한다.
농암(聾巖) 선생이 74세 되던 해인 1540년 한 편의 시를 쓴다. 이시는 당해 40세가 된 퇴계 선생에게 전해진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곧 물이 마르게 되는 물동이 안에서 안심하고 있는 물고기를 놀리는 인간에게 물동이 속 물고기가 화답하는 내용이다. 물고기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는 세상 사람 모습 한번 들어보소. 벼슬길에 나서서 명예나 이익에 빠지면 남의 꽁무니 쫓기도 하고 떼를 지어 다니기도 하며 임금님 은혜 입기를 구걸하듯 하지 않소. 청운의 뜻을 품고 조정에서 벼슬할 때는 바야흐로 뜻을 얻어 의기가 양양하다가 어느 날 저녁 갑자기 풍파가 일어나면 장차 자기 한 몸 용납할 곳도 없지 않소. 잠깐 목숨 붙이고 살다 가는 것이야 사람이나 물고기나 다를 것이 무엇이오?"
퇴계 선생은 농암의 이 시를 보고는 "깊은 훈계가 이 시에 있으니 지극한 가르침 새겨서 기억하리. 벼슬의 풍랑 속에서 몸 거두어 자연의 한가한 흐름 속에서 성명을 지키리라."고 화답한다. 그리고 퇴계 선생은 농암이 은퇴한 다음 해에 관직을 놓고 환향(還鄕)한다.
탐욕이 인본을 앞서면 사고가 난다.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던 대한민국의 진로가 흐리다. 인본보다 탐욕이 앞선 결과다. 권력의 자리에 있든 없든 간에 우리 사회 지도층은 인본은 물론 국가와 국민을 감당할 만큼의 철학과 이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장기간 그리고 온전히 유지되지 못하면 그 피해는 오로지 국민 몫이 된다.
상경한 이후로 매년 연말에는 고향을 찾는다. 새해 우리 모두의 안녕과 희망을 소원하며 도산(陶山)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예를 드리고 계상서당을 지나 고향으로 가는 길. 새해 모든 도리(道理)가 제 자리로 돌아가길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