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의 앞날…신동빈·수뇌부 고심 깊어져
그룹 먹여살린 '유통·화학군' 반등 필요
재무상황 악화, 과도한 이자는 부담으로
재계 관계자 "체질개선은 과감함이 관건"
[뉴스포스트=김주경 기자] 롯데그룹이 절체절명의 위기다. 롯데케미칼이 쏘아올린 재무 건전성 악화에 이어 그동안 그룹을 영위해왔던 또 다른 핵심 축인 유통군마저 실적이 휘청이면서 좀처럼 맥을 못 추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8월 비상경영을 선포한 바 있다. 롯데는 사업의 본원적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차원에서 비핵심사업은 접고 자산 매각 등을 통해 재무 건전성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것. 전통적 사업 모델의 한계를 벗어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않고 있어 상황은 여전히 불안하다. 실질적인 정상화를 이뤄내기까진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재계 안팎의 관측이다.
롯데, 보수적 경영기조 뚜렷…시대흐름 뒤처진 '결정타'
롯데그룹은 우리나라 재벌가 중에서도 보수적인 경영 기조가 상대적으로 강하다. 약 3년 전인 2022년 사장단 인사를 기점으로 외부 인재 수혈 및 기존과 다른 사장단 인사 방침을 내세워 대대적인 경영체질 변화를 모색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실제론 변화의 폭이 매우 더디다는 것이 롯데 사정에 밝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에 재계 일각에서는 롯데가 경영 정상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신동빈 회장과 수뇌부 경영진들의 과감한 결단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렇지 않고선 격변하는 대내외 리스크에 대응하긴 어려워 보인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위기' 타개
롯데그룹은 올해 경영방침으로 '선택과 집중'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 역량에 집중하고 비핵심 자산 정리에 방점을 두겠다고 발표한 것도 지난해 인수합병에서 비핵심 자산 매각으로 성장전략의 대전환을 선언한 것의 연장이다.
롯데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롯데가 지난해부터 비상경영 체제를 선언했지만 전사적으로 속도감 있는 쇄신이 단행되지 못했단 평가가 나오는 건 부인할 수 없다"면서 "수뇌부 입장에선 전사적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재무 위기에 휩싸인 만큼 기존 핵심 사업군 반등을 통한 실적 회복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신동빈 회장은 올해 초 2025 상반기 VCM(사장단 회의)에서 그룹의 핵심사업에 대한 경쟁력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신 회장은 "2024년은 그룹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한 해였음에도 그룹 핵심사업의 경쟁력이 저하됐다. 본원적 경쟁력을 강화해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라고 질타했다. 신 회장의 메시지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다. 더 나아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원인을 찾는다는 점도 눈에 띈다.
"위기가 일상이 된 지금,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의 근본 원인은 외부환경이 아닌 우리 핵심사업의 경쟁력 저하"라며 "지금 쇄신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 강조했다.올해는 그룹이 쏟아부어야 할 역량을 내부로 향해야 한다며, 핵심사업의 본원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고강도 쇄신을 주문한 것.
롯데는 현재 사업군 별로 각자 대표 체제로 운영된다. 실무는 이들 각자 대표가 운영하고 신 회장은 상위에서 그룹 전략과 투자 방향을 조율하는 역할을 이어가는 구조다. 이 체제에 따라 롯데그룹 내부 사업군별 대표와 계열사 최고경영자(CEO)까지 포함하면 80여 명에 이른다.
지난해 사장단 정기 인사…'역대급' 물갈이
이런 상황에서 롯데를 이끄는 신 회장 일가와 수뇌부들의 어깨는 무겁다. 지난해 11월 말에 진행했던 '2025년도 정기 인사'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당시 인사는 위기의식을 보여준 결과물이었다. 롯데그룹은 이날 인사에서 전체 임원 규모를 2023년 말보다 13% 더 축소했다. 코로나19 시절 줄였던 임원 규모보다 변화가 더 커진 것이다.
최고경영자(CEO)도 전체의 36%인 21명을 대거 교체했다. 이 역시 롯데그룹이 여태껏 실시한 대표이사급 교체 인사 가운데 최대 규모다. 화학 계열사 13곳 가운데 10곳의 대표이사를 교체한 것. 이는 신동빈 회장의 의중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발표한 롯데 인사는 롯데그룹이 오너 일가의 경영권 다툼과 신동빈 회장을 곤혹스럽게 했던 사법 리스크 시절에 이뤄졌던 인사 교체 폭보다도 수위가 더 높다. 롯데그룹이 창사 이후 직면한 최대의 위기가 인사에 반영된 것이다. 롯데케미칼의 실적 부진에 따른 재무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적 쇄신 외엔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다.
경영개선실 출신 임원이 롯데그룹 주요 요직을 휩쓸었다는 점도 전례 없는 행보다. 경영개선실 수장이던 고수찬 부사장이 지난 2025년도 정기 인사에서 사장 승진했고 부사장으로 승진한 차우철 롯데GRS 대표도 경영개선실 출신이다.
올해 롯데그룹의 핵심 과제는 바로 재무구조 개선이다. 중장기 전략에 부합하지 않는 사업은 과감히 접고, 유휴 자산을 정리해 현금을 확보하는 게 주요 골자다.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 향후 안정적으로 성장하려면 곳간에 확보해야 하는 현금성 자산이 꼭 있어야 한다. 주요 계열사 수장들이 저마다 재무 유동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지주사 입장에선 올해가 체질 개선을 통해 전환점을 이뤄낼 절호의 기회다.
다만 계획대로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그동안 롯데가 수년간 공격적 M&A 탓에 빚이 더 늘어난 것이 재무건전성이 악화된 결정적 요인이 된 것.
롯데케미칼 부진이 가장 뼈아프다. 한때 롯데케미칼은 연간 1조 원 넘게 영업이익을 내던 주력 계열사였다. 2020년 이후 상황은 180도 변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중국에서 석유화학 공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세워지면서 시장은 공급 과잉 상태에 직면한 데 이어 중국은 이제 저가 경쟁을 벌이면서 국내 기업들이 밀려나는 형국이다.
롯데 먹여살린 '롯데케미칼'…이젠 '아픈 손가락' 됐다
주요 석유화학 제품 가격이 급락한 것도 일부 작용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중동 전쟁까지 터지면서 덮쳐 원유값마저 치솟으며 수요마저 위축됐다. 석유화학업계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 가격도 손익분기점인 톤 300달러까지 급감하며, 수익성이 악화되는 상태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롯데케미칼의 실적 부진은 시장 흐름을 발 빠르게 읽지 못한 패착이 가장 컸다.
롯데케미칼은 기초석유화학 비중이 높아 전체 매출(연결 기준) 대비 60%다. 이미 수년 전부터 고부가 제품 생산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롯데케미칼은 그결과 3년 연속 적자행진을 기록했다. 2022년 7626억원 영업 손실을 시작으로 적자로 전환됐으며, 2023년 3477억원에 이어 2024년엔 영업손실만 8940억원에 달했다. 적자만 1조라는 얘기다. 올해도 실적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비어가는 '곳간' 채우기에 집중…지분 매각도 불사
곳간도 점점 비어가고 있다. 올해 롯데가 가지고 있는 현금성 자산은 7865억원에 그친다. 작년 1조1501억원에 비하면 31.6% 급감한 것이다. 반면 이자 부담은 커지고 있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옛 일진머티리얼) 인수, 롯데건설 자금 지원으로 차입금이 급속도로 늘었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말 롯데케미칼 순차입금은 6조원 수준까지 급증했다. 부채 증가는 이자 부담으로 돌아온다. 롯데케미칼은 연간 이자로 낸 비용만 2023년 3788억원, 지난해에는 4489억원에 달한다.
롯데케미칼은 수익성이 갈수록 악화되자 지난해 하반기 특단의 결단을 내렸다. 2조원대 회사채의 재무 약정 위반을 발생하게 한 특약을 조정해 유동성 위기를 잠재운 것. 이를 위해 그룹의 핵심 자산이자 랜드마크인 롯데월드타워를 은행권 담보로 제공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그 결과, 롯데케미칼은 10월 기준 보유예금 2조원을 포함해 가용 유동성 자금 총 4조원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과감한 몸집 줄이기에도 나선다. 올해 롯데케미칼은 해외 자회사 미국 법인(롯데케미칼USA) 산하 롯데케미칼루이지애나(이하 LCLA)와 인도네시아 법인 롯데케미칼인도네시아(LCI) 지분을 매각해 마련한 총 1조4000억원 규모의 자금으로 차입금을 갚아 재무건전성 개선에 나선다. 하반기에 여력이 되면 추가 지분을 매각해 최대 총 2조원까지 자금을 마련할 방침이다.
롯데쇼핑 살리려 신동빈 회장까지 나섰다
롯데쇼핑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가파른 실적 하락을 겪었다. 지난해 매출은 13조9866억원, 영업이익은 4731억원이다. 각각 전년 대비 3.9%, 6.9% 감소한 수치다. 롯데쇼핑의 매출은 2021년 15조5811억원, 2022년 15조4760억원, 2023년 14조5559억원으로 3년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신동빈 회장의 경영 위기가 가중되자 유통군의 핵심축인 롯데쇼핑의 사내이사로 복귀했다. 신 회장의 복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투자와 사업 추진 등을 직접 진두지휘하겠다는 의미다. 이에 롯데쇼핑은 빠르고 책임감 있는 의사결정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롯데쇼핑은 2030년까지 국내 쇼핑몰을 키우고자 7조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6조6000억원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포부다. 이를 위해 쇼핑몰 브랜드 '타임빌라스'를 13개까지 늘릴 계획이다.
중장기 밸류업 계획도 공개했다. 2030년 매출 20조3000억원, 영업이익 1조3000억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올해는 매출 14조원, 영업이익 6000억원을 거두고 2026년 매출 15조2000억원, 영업이익 8000억원을 올린다는 구상이다.
롯데 4대 신사업 …바이오앤웰니스·모빌리티·지속가능성·뉴라이프 플랫폼
올해는 대내외적 경영불확실성이 더 커진 상태다. 핵심사업에 대한 본원적 경쟁력이 더 하락한 데다가 내수 침체와 고환율에 이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쏘아올린 관세 전쟁까지 터지면서 내우외환의 위기에 휩싸인 것이다.
이에 롯데그룹은 지난 2023년 미래를 이끌 4대 성장동력으로 바이오앤웰니스·모빌리티·지속가능성·뉴라이프 플랫폼 등을 낙점하고, 신사업을 추진 중이다. 지난 70여 년간 주력 사업으로 손꼽혔던 호텔·유통·식품·화학군 중심에서 규모를 넓힌 것이다. 2030년까지 40조원을 투입해 뉴 롯데'를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바이오앤웰니스'는 롯데가 가장 공들이고 있는 사업이다. 이 분야의 중심인 롯데바이오로직스는 현재 인천 송도에 총 36만 리터 규모의 시설을 세우는 3개의 메가 플랜트를 조성 중이다. 오는 2030년 완공되면 글로벌 톱10 바이오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으로 도약하게 된다.
'모빌리티' 분야는 롯데이노베이트(전 롯데정보통신) 담당이다. 롯데이노베이트의 주력 사업인 전기차 충전기 이브이시스(EVSIS)는 올해도 CES2025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엔 전기차 충전기 생산을 위해 미국에 '이브이시스 아메리카'를 설립하고 북미 전기차 충전 시장에 진출했다. 롯데이노베이트는 국책사업인 '한국형 차량간통신(V2V) 자율주행차' 사업에도 참여, 운전자가 필요 없는 레벨 4 자율주행을 구현했다.
4대 신성장사업인 뉴라이프 플랫폼에도 관심이 쏠린다. 해당 사업은 롯데이노베이트가 총괄한다. 지난해 8월에는 초실감형 메타버스 '칼리버스'가 베일을 벗었다. 해당 플랫폼이 공개되면서 신동빈 회장과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 올해 미국에서 열린 CES에 참석해 롯데이노베이트의 메타버스 플랫폼 칼리버스 등을 직접 시현할 정도로 등 관심도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번 CES2025에서는 VR기기가 없어도 3D필름을 통해 메타버스의 3D환경을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또 엔비디아, 메타, 아비트럼, 화이트스톤 등과 손잡고 생태계 확장을 위한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룹 체질 개선…지금이 '마지막 기회'
재계 내부에서는 저수익·저성장 산업인 식품·유통 의존도를 낮추고 고수익·고성장 3차 산업으로 중심을 전환하는 롯데의 행보에 주목한다. 그동안 1, 2차 산업에 무게중심을 뒀던 롯데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그룹의 명운이 바뀔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여서다.
재계 한 관계자는 "수십년간 기업을 먹여살린 주력 사업 대신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는 건 상당한 험로가 예상돼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통해 속도감 있는 사업 구조 재편이 이뤄져야만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롯데가 올해 이뤄내야 할 최대 과제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잃어버린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롯데케미칼에서는 기초화학 비중을 지속적으로 줄여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사업 전환이 필수적이며, 롯데쇼핑의 경우 유통군 조직문화를 전면 쇄신해 롯데만의 유통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컨텐츠를 확보해 시장 흐름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