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배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인터뷰
盧 이혼 소송서 '노태우 비자금' 불거져
역사 문제 청산?...시험대 오른 새 정부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거나, 계기가 마련되면 어김없이 공론의 장으로 나온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았음에도 책임자들이 처벌받지 않은 역사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수면 위로 떠 오른다. 5월의 비극을 상징하는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그렇다.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많은 혐의와 의혹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의외의 사건에서 실체가 일부 드러났다. 재벌가와 전직 대통령 일가의 혼맥 관계가 균열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신군부 비자금'의 증거가 나온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 폭력 진압의 책임자 중 하나인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의혹이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5월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에서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 분할로 1조 3808억 1700만 원과 위자료로 2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에서는 노 관장 측이 제출한 노 전 대통령 배우자 김옥숙 여사의 메모가 증거로 인용됐다. 메모에는 '선경 300억'을 비롯해 총 900억원 대 비자금 관련 내용이 담겼다. 소문만 무성했던 '노태우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노태우 비자금'의 실체가 공개되면서 시민사회계를 비롯한 국민 여론은 비자금 환수를 촉구했다. 빗발치는 여론에 정치권도 화답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과 임광현 국세청장은 지난달 국회 인사 청문회에서 '노태우 비자금'의 환수를 약속했다. 5·18 기념재단은 정 장관과 임 청장의 발언을 환영하면서 철저한 조사와 환수를 촉구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국회에서는 '신군부 비자금' 환수를 위한 간담회도 열렸다. 이달 11일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가폭력범죄를 통한 범죄수익 비자금 환수를 위한 간담회'를 열고 '독립몰수제' 도입을 논의했다. 유죄 판결이 없더라도 범죄 수익임이 확인되면 별도 절차를 통해 몰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신군부 비자금'과 관련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가운데, <뉴스포스트>는 박강배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를 통해 지난달 31일 자세한 내용을 알아봤다. '노태우 비자금', '전두환 비자금', '신군부 비자금' 등 비자금을 지칭한 용어가 여러 가지 혼재한 상황에서 5·18 기념재단은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비자금'으로 명칭을 통일했다.
"신군부 전체 부정축재재산 환수해야"
5·18 기념재단에 따르면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비자금'이란 5·18 민주화운동을 폭력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고(故) 전두환 씨와 노 전 대통령 및 신군부 세력이 부정 축재한 재산이다. 박 상임이사는 "헌정질서 파괴범죄자들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폭력 진압으로 정권을 찬탈해 재산을 축적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씨에게 2205억원, 노 전 대통령에게 2628억원의 추징금 납부를 선고했다. 하지만 전씨는 자신의 재산이 29만원이라면서 납부를 거부해 왔다. 이에 정부는 2023년 전씨가 사망한 후 소송 등을 통해 추징금 일부를 환수했지만, 867억원이 미납된 상태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2013년 추징금을 완납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남은 비자금 의혹이 추가로 드러났다.
박 상임이사는 "1980년 5·18 이후 정권을 찬탈한 전·노 씨와 이들을 추종한 신군부 세력이 조성한 비자금과 부정 축재한 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면서 "하지만 1997년 대법원 형확정 판결 이후 추징금만 간헐적으로 집행됐을 뿐 부정 축재 재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자녀 이혼 소송 중 노태우 부인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904억원의 비자금 조성 메모가 법원에 증거로 제출됐다"며 "불법으로 축재한 비자금이 후손을 비롯한 그들의 가족에게 증여된 것이다. 이에 신군부 비자금과 부정축재 재산을 완전히 환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박 상임이사는 "단순히 개인의 비자금에 그치지 않는다. 헌정질서 파괴범들은 지위를 이용해 거액의 부정축재 재산을 형성했다. 이들 재산은 국민의 고통과 희생 위에 쌓인 불의의 산물이며, 은닉 및 세대 승계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문제는 반드시 신군부 전체의 부정 축재 재산 환수로 확대돼야 한다. 정의와 법치 실현, 그리고 역사적 책임을 위해 국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재명 정부, 비자금 환수 가능할까
5·18 기념재단은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비자금' 환수와 관련해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 박 상임이사는 "비자금과 부정 축재 재산 환수는 단순한 과거 청산이 아니라, 법치주의 수호와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한 국민적 명령이자 국가의 책무"라며 "인사청문회에서 확인된 후보자들의 의지가 구호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질적 조치로 이어지기를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임 법무부 장관과 국세청장뿐만 아니라 과거 이재명 대통령 역시 비자금 환수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그는 지난 5월 18일 후보자 시절 참석했던 5·18 민주화운동 제45주년 기념식에서 "국가폭력 또는 군사쿠데타는 철저히 처벌해야 하며, 소멸시효를 배제해 상속재산 범위 내에서 상속자들에게도 민사상 배상책임을 끝까지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적 과제를 청산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현행법상 공소시효가 완료되거나 당사자가 사망한 경우 부정 축재 재산이더라도 몰수·추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박 상임이사는 "공소시효 완료나 당사자 사망에도 몰수·추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고, 재산 분할이나 혹은 상속·증여의 경우에도 끝까지 추적하고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9월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촉구했다. 법안은 헌정질서 파괴범죄자가 사망하거나 공소시효가 만료되더라고 범죄수익을 몰수·추징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전씨의 남아있는 추징금과 노 전 대통령의 불법 비자금까지 환수가 가능해진다. 현재는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천문학적 비자금, 환수 후에는?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비자금'을 환수하더라도 해결 과제는 남아 있다. 국고에 귀속된 비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가 남은 과제다. 박 상임이사는 "부당한 권력을 이용해 불법 행위로 취득한 재산은 부정 축재 은닉 재산이므로 재수사를 통해 철저히 환수해 5·18의 미해결 과제와 희생자·피해자 및 유가족의 피해보상에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해 6월 종료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종합보고서를 통해 '국가에 대한 권고' 11개 항목을 제시한 바 있다. 박 상임이사는 권고 사항 중 5항과 7항, 11항을 이행하는 데에 환수된 비자금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고 5항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소재와 신원 확인 및 암매장 의혹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해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7항은 5·18 관련 피해자 실태조사를 정례화 해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과 요구사항을 적시에 파악하고, 의료 및 생계 지원 등 효과적인 시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11항은 진상규명 조사 결과 및 수집 자료를 관리·분석하고, 5·18정신 계승을 위한 연구 및 교육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5·18연구재단(가칭)'을 설립해 지원하는 내용이다.
박 상임이사는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비자금 환수를 위해서는 각계각층의 노력이 중요하다. 특히 국회에서 관련 법을 조속히 통과시키고, 법무부 및 국세청 등 관계 부처의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면서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 국세청장의 의지가 말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질적 조치로 이어지기를 강력히 요구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5·18 기념재단은 법률가 등 전문가들을 포함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비자금과 부정축재재산 환수위원회'를 구성했다. 비자금 등을 환수하기 위한 관련법 제·개정 촉구와 부정 축재 재산 추적 및 환수 등의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지난해 10월에는 대검찰청에 노 전 대통령 일가를 '조세범 처벌법 및 특정범죄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과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