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국문학관 전국대회', "인문학적 브랜드 높이는 계기기대"

(사)한국문학관협회 전보삼 회장 (사진=신현지 기자)

[뉴스포스트= 신현지 기자] 2017년 강진군 방문의 해를 맞아 강진군에서 한국문학관 전국대회가 오는 4월 28일과 29일 양일에 걸쳐 개최된다. 그동안 광역 시도단위의 중심에서만 열렸던 방문의 해 행사가 기초단체에서 이루어지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국의 문학관장들은 강진군의 시문학파문학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올 행사에 깊은 관심을 표하며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특히 한국문학관협회장이며 경기도박물관의 전보삼 관장은 주최 측과 함께 이날 행사의 진행을 맡게 되어 뉴스포스트는 그와 만남을 청했다. 2017년 한국문학관 전국대회가 갖는 의미와 또 (사)한국문학관협회의 회장으로서 특별한 마인드를 가진 전보삼 회장을 전격 조명하기로 한 것이다.

전보삼 회장과의 만남을 약속한 곳은 경기도박물관이었다. 서울을 1시간쯤 벗어나 찾은 경기도박물관은 때맞춰 나무마다 수줍게 움트는 목련이 한창이었다. 봄의 전령사인 개나리 역시도 봄볕에 샛노란 빛을 더해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로채고 있었다.

전보삼 회장의 방은 본관 건물의 2층이었다. 한눈에도 그는 내재한 수장의 면모로 강직한 이미지였다. 작은 체구에서 발산되는 에너지 역시 그를 빈틈없이 보이게 했고.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얼핏얼핏 내비치는 소년의 기상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신구대학에서 41년간의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는 그와의 대화에 은근히 부담스러워 하는 내게 형이상학적인 말로 사람을 기죽이는 철학가 기질을 그는 내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2017년 한국문학관 전국대회는 지역 활성화와 전국의 문학관에 매우 고무적인 일

자리에 앉자 한국문학관협회의 전보삼 회장은 먼저 2017년 강진군 방문의 해를 맞아 최초로 열리는 한국문학관 전국대회는 지역 활성화는 물론 전국의 문학관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될 거라며 이 행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올해 방문의 해가 기초단체로서는 첫 방문지로 강진군이 채택되었어요. 문화관광 차원에서의 사업인데 강진군은 시문학파문학관을 중심으로 행사를 개최하면서 전국의 문학관인 150여 명을 초청했어요. 이렇게 전국의 문학관장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매우 뜻 깊은 행사라 기대가 커요. 더구나 강진군은 김영랑의 모란꽃으로도 유명한 고장이잖아요.또 잘 정립되어있는 시문학파문학관이 있는 고장이고요. 그러니 강진군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잘 관리된 문학관 하나가 지역의 효자 노릇을 하니 문학관을 하는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매우 기분 좋은 일이고요.

2017년 한국문학관 전국대회를 시작으로 전국의 문학관들에 많은 발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이번 행사로 인문학적 브랜드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고요. 솔직히 그동안 지역마다 문학콘텐츠가 있어도 그것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것에 큰 힘을 쏟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지역에서 좀 더 문학관 발전에 관심을 기울일 거라 생각해요.

문학관의 역할은 많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불러일으켜 재창조하게 하는 것이잖아요. 문학관 활성은 지역발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이번 행사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문학관의 계기는 만해의 ‘님의 침묵’ 때문이었다.

전 회장이 2017년 한국문학관 전국대회를 주체 측과 함께 진행을 맡게 된 소감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이나 그의 사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서. 그러니까 그는 한국의 문학관과 박물관을 두루 섭렵하며 수장으로서 그 입지를 다져온 것은 물론 신구대학에서 41년간의 철학교수로 재직한 인물이었다.

교직 생활 중에 만해문학관을 설립했을 만큼 그는 만해에 남다른 사랑의 소유자였고. 또 그것을 시발점으로 (사)한국사립박물관협회장과 (사)한국박물관협회장 역임을 거쳐 오늘의 (사)한국문학관협회장과 경기도박물관의 수장이 된 것이니. 따라서 철학 교수였던 그가 문학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더 궁금한 것이었다. 이 같은 나의 궁금증에 그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

“님의 침묵 때문이지요.”

“한용운 선생의 시집 ‘님의 침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 질문에 이번엔 그도 짧게 요약하진 못했다.

“시인들이 님의 침묵을 시집이라고 하면 그럴 수 있겠다 동의하지요 그러나 날더러 말하라고 하면 시집이라기보다는 철학서라고 말 하지요. 깨달음의 노래 사랑의 증도가(證道歌)라고 하여야 해요 그러므로 만해의 사상 철학이 담긴 철학서 예요.

신 작가는 님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님은 침묵의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온 절대적인 존재가치지, 결코 장광설 속에 있는 님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침묵을 모르고는 님을 찾아낼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니 그것은 철학서지 결코 시집은 아닌 거라고요. 난 중학교 때부터 만해 선생을 좋아했어요.그래서 그때부터 만해 선생의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고요. 그러다보니 1981년 10월에 만해가 말년을 보냈던 북향집 성북동 심우장에 세를 들어 간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때는 문학관이 뭔지 그런 건 전혀 몰랐어요. 난 그냥 만해가 좋아서 자료를 모았고 그것을 만인과 함께 공유하자는 생각에 심우장을 빌린 것이니까요.그런데 심우장은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사람이 많이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1990년 5월 사재를 털어 남한산성 수어장대 아래 부지를 구입하고 기념관을 지어 그리로 장소를 옮겼지요.그리고 그때는 문학관의 설립조건을 제대로 갖추어서 하게 되었지요."

 굳이 남한산성에 만해 문학관을 세울 생각을 했었냐는 질문에 그는 배부른 사람을 찾다 보니 남한산성이었다고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문화는 2차 욕구예요, 사람은 1차 욕구가 해소되면 2차 욕구가 발동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곳을 찾다 보니 남한산성이었어요. 그곳에서 28년이 되었어요.”

전 회장의 경영마인드로 1985년 개관한 독립기념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렇게 만해를 사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관을 하게 되었다고. 문학관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만해가 좋아서 시작된 것이라 말하지만 1985년 개관한 독립기념관을 절대적인 위기에서 구했으니 그의 문학관의 깊은 조예와 예리한 통찰은 이미 입증이 된 것이었다.

“1985년에 독립기념관이 개관 했지요. 첫 해에 관람객들이 물밀듯 몰려왔어요. 그런데 이듬해부터는 한번 다녀간 시민들이 다시 찾아오지를 않아요. 한번 보면 됐지 뭐 볼 게 있느냐 이런 거지요. 그러니 독립기념관은 어려움이 처하게 된 것이지요. 그 위기에서 전문가를 찾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이렇게 방대한 건물에 콘텐츠가 고정 되어서야 되겠는가? 변화를 주어야 하는데 방 하나를 비워라 그리고 돌아가면서 역사 인물에 대한 특별전시를 해라. 그랬더니 50평을 채울 역사 인물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던 만해 한용운 자료를 주겠다고 했지요. 그 결과 아주 대박이 났어요. 한 달 특별전을 하려 했는데 석 달을 했어요.

특별전이 끝나고도 사람들은 만해를 찾았어요. 더 보고 싶다는 거지요. 그곳에서 제가 있는 곳을 가리켜 주었더라고요. 그래서 심우장에 세를 들어갔는데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남한산성으로 옮긴 거지요.”

한번 찾아온 관람객을 다시 찾게 하는 문학콘텐츠가 중요하다

이렇게 문학관을 하게 된 전 회장은 (사)한국사립박물관협회장과 (사)한국박물관협회장을 그리고 대학교수로서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2015년 8월 10일 경기도박물관관장에 선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한국문학관협회장에는 2016년 4월 1일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의 경영마인드의 탁월성을 모두가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나 역시 그의 경영철학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문학관의 경영 철학요? 글쎄요. 문학관 설립은 누구나 해요. 경상운영비를 조달할 능력이 되느냐가 관건이 되는 거지요. 따로 후원해주는 데가 없으면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한번 온 관람객을 다시 불러 모으는 문학적 콘텐츠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스토리텔링으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문학관이든 박물관이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늘 그것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고요. 나는 그것을 자신해요. 이곳에 와서도 난 그것을 고민했어요. 그래서 수집, 보존, 연구가 목적인 박물관 시스템에 교육 프로그램을 하나 더 집어넣어 체험 영역을 넓혔어요.

2016년에는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어린왕자 특별전을 가졌어요. 아주 반응이 좋았어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교육적 효과로도 그만이었어요. 그런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경영마인드라고 생각해요.”

문학관은 과거가 아닌 현재적 활용가치의 보고(寶庫)

문학관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활용가치를 지닌 보고라고 했다. “흔히 사람들은 문학관을 과거의 유물이란 단어로 고정화하는데 그것은 올드한 사고에서나 나오는 것이지요. 문학관은 활용가치를 따져야 해요.

그래서 콘텐츠박물관, 문학관이 생겨난 것이지요. 노을 박물관이 왜 생겨난 것이겠어요. 영감을 일으키게 하고 영감을 통해 새로운 것의 탄생이니 무형의 문학관이 생겨난 것이지요. 문학관이든 박물관이든 유 무형이 따로 없어요. 활용가치가 있으면 그것의 역할을 다하는 거지요. 그리고 관람객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되지요.나는 이곳에 와서 관람객을 찾아가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요. 우리가 전시물들을 싣고 산골 마을이나 오지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지요.”

경기도박물관의 초상화와 무덤에서 출토된 사대부 복식의 보고

경기도박물관을 방문한 만큼 경기도박물관에서 특별히 볼 수 있는 전시물들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그는 아주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인 것으로 초상화와 사대부 무덤에서 나온 복식이 볼거리라고 했다.

“수도권은 사대부들이 많은 고장이었어요. 그래서 옛 선비들의 초상화가 많아요. 또 무덤에서 출토된 의복들도 많고요. 옛날에는 그것들을 다 불 태웠어요. 지금은 보존 과학 팀에서 보존처리하여 깨끗하게 복원해서 전시하고 있어요.”

건강의 비결은 평생 술 담배 않고 열심히 일 하는 것

대학에서 41년간의 후학들을 배출해 내고도 여전히 청년 같은 기상을 보이는 그에게 건강의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건강을 위해서 따로 하는 건 없다고 대답했다. 아니,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러면서도 자신은 평생 담배 한 대 피워보지 않았고 담배 살 돈으로 전국을 돌며 자료를 구입했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얼마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한지 그리고 얼마만큼 문학관에 빠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인터뷰가 마무리 되어가자 그는 2017년 한국문학관 전국대회에 다시 한 번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울러 행사가 이루어지는 28일 즈음이면 모란꽃이 절정일거라며 내게 한국문학관 전국대회 동행을 청했다.

“그때쯤이면 문학관 가득 모란꽃이 절정일거요. 어때요 그날 시간이 괜찮으면 신 작가도 우리랑 강진에 동행 하는 것이?”

그러니 전 회장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하고 박물관을 나서는 길에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 한 구절이 읊어지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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