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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지 연재소설] 그 겨울의 초상 ⑦그날처럼 폭설이 내렸다

눈이 내리는 신작로 위에서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도로를 내려서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코트 깃을 여미던 연이 그 모습에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연의 표정, 연의 멈춰버린 숨, 다음은 반사적인 몸짓이었다. 연이 문을 박차고 3층의 비상계단 위에 서는 것과 동시에 계단 아래로 승용차가 멈춰 섰다.

“저,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사람을 좀 찾을까 해서요?”

창이 열리고 차 안의 남자 목소리였다.

“……?”

“예전에 이 마을 운암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집이 한 채가 있었는데요. 약 25년 전 쯤요. 혹 그곳에 살던 분을 찾아볼 수 있을까 해서요?

“……?”

“황연 씨라고요?”

“……!”

분명 꿈은 아니었다. 방금까지도 연을 창가에 잡아 묶어 둔 남자. 아무리 긴 세월이 흘렀어도. 연이 그의 목소릴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혹시, 운암사가 이 동네가 말고 어디 또 있는 건가요?”

남자는 창밖으로 얼굴을 길게 빼고는 재차 물었다. 아찔한 현기증에 연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래서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연의 묵묵부답에 남자는 성큼 차에서 내려섰다. 남자의 얼굴선과 콧날이 그리고 그 부드럽게 흐르는 그 뭔가가 연 앞으로 성큼 거리를 좁혔다. 아, 서진! 분명 서진이었다. 세월이 흘러 조금은 풍성해진 몸체에 턱선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연의 기억에 남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연은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즉시 그에게 몸을 날렸다. 아니,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연은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제 기억엔 분명 이 동네가 맞는데, 이 동네 분들은 다들 잘 모른다고 하시고, 마침 면사무소에 불이 켜져 있기에……, 담당이 아니시더라도 좀 찾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서진은 연의 세차게 떨리는 숨을 알아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연의 모습에 남자는 금방이라도 계단을 오를 자세로 물었다. 그것에 연은 자신도 모르게 코트 깃에 얼굴을 묻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 서진이 계단에서 발을 떼고는 난감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마도 연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것에 연은 재빨리 서진을 향해 움직였다. ‘오 서진, 당신이 맞는군요. 왜 이제야……그래요 제가 연이에요.……’ 그러나 몸이 사정없이 후들거릴 뿐 한발도 뗄 수가 없었다. 소리를 잃은 말들이 연의 안에서만 아우성 쳤다. 안타깝게도 서진은 연을 잠시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한줄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돌아서는 서진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이어 장난이라도 치듯 그의 목에 두른 머플러 자락을 뒤로 잡아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지 못한 서진은 그대로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건물 맞은편 신작로 위에서 누군가 면사무소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연의 아들 무영이었다. 녀석이 조금 전 서진의 승용차가 내려선 신작로에서 연을 향해 팔을 한번 번쩍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뒤를 바짝 따른 남편이 무영이와 마찬가지로 손을 휘둘러댔다. 연의 퇴근이 평소보다 늦는 것에 그들이 평소 하지 않던 마중이었다. 그 순간, 왜 그랬을까. 젠장, 왜 그랬을까. 남편이 서진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닐 텐데, 왜, 왜.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분들 오래전에 이사하셨는데요.”

연이 서진에게 속사포처럼 쏘아댄 말이었다.

“네?

차 문을 열려던 서진이 깜짝 몸을 돌려 물었다.

“이사했다고요. 아주 오래전에.”

연은 다시 말했다.

“이사요? 그럼, 이 동네가 맞긴 맞는군요. 이름은 연이고요 황연……”

“그건 잘 몰라요. 어쨌거나 이제 이 동네 황 씨 성을 가진 분은 없어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서진이었다.

“그 사람 이름은 연이었어요. 이렇게 내리는 눈처럼 차갑고 순정한 아가씨였어요.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여기에 없다고요? 하긴, 그래요. 세월이 얼만데요. 그 세월이……그렇죠. 그 세월이 얼마라고요. 흐 허허허.”

그 허탈한 웃음에 연이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서진이 고개를 떨어뜨려 느린 걸음으로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 사이 남편과 무영은 신작로를 내려서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진이도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서진은 연의 남편과 무영이 걸어오는 주차장을 마주해 신작로로 올라섰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연이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 서진을 뒤쫓았다.

“잠깐만요! 잠깐만, 내가 연이에요! 나라고요! 내가 황연이라고요!”

그러나 서진은 가로등이 줄을 이은 동네 앞을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렸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 그를 보게 된 시간이. 서진이 사라진 모퉁이의 어둠이 싸한 아픔으로 밀려왔다. 그 먹먹함에 연은 애써 뜨거움을 삼키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굵어진 눈은 저만치의 서진이 떨구고 간 핏빛의 머플러를 덮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연은 머플러를 주워들다가 풀썩 허리를 접었다. 놀랍게도 25년 전, 서진의 목에 감아 준 자신의 붉은 머플러였던 것이다. ‘아, 지금껏 이것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바보, 나라고요, 나! 지금 당신이 찾고 있는 연이라고요. 아무리 어둡기로, 아니, 이깟 코트 깃에 얼굴을 가렸다고, 난 달려오는 차만 보고도 당신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는데…… 흑.’ 언제 도착했는지 아들 무영이 머플러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는 연의 모습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엄마, 넘어진 거예요?”

무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의 목소리였다.

“왜, 무슨 일 있어요?”

그래도 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아픈 신음을 참아냈다. 그리고 한참 후 허리를 접은 그대로 깊은 숨으로 말했다.

“배가 아파서, 갑자기 배가 좀 아파서, 그러니 잠깐만 이대로요. 흑,”

정말 배에 싸한 통증이 밀려왔다. 생리가 시작될 그것처럼 골반과 허리를 지그시 옥죄는 통증이 연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어둠 속에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의 그때처럼 폭설이 내릴지도 몰랐다. 서진이 왔던 1980년 그해 겨울처럼. (終)

신현지  shj63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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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지 | shj6369@hanmail.net
담당업무 : 편집부장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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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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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여우 2016-12-22 10:19:10

    종편이라서 아쉽네요.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삭제

    • 겨울의 낭만 2016-12-21 08:55:04

      하얀 설원과 눈송이가 생각나던 소설이었어요.

      잘읽었네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삭제

      • 지나친 순수함 2016-12-21 07:57:51

        짧은 좋은 추억과 기억이
        세월이 지나면 아름다움으로 승화 될만도 한되
        속세의 눈 으로 보자니
        지나치게 억지스럽게 집요하네요~   삭제

        • sjum 2016-12-20 15:15:02

          애잔히 마음속에 잔잔히 남는 글 - 3

          닥터지바고
          세계대전중 러시아와 독일의 전쟁중 부인을 두고 군으로 입대한 지바고 군의관과
          남편을 따라 간호원으로 입대를한 라라는....불륜적사랑을 하다 헤어져 8년만에 기차칸에서
          길가에 걸어가는 라라를 발견하고는 내려서 이름을 부르던 순간 천식으로 불러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라라는 인식하지 못하고 길가에서 죽어가는 애닯은 모습의
          마지막 영상과 교차되어져서... 신작가님의 이 글과 지바고의 영상이 대비
          더욱 더 마음 시리게 느껴집니다.

          12월 년말....좋은 글로 마음정화합니다
          감사합니다.   삭제

          • 독자 2016-12-20 15:10:39

            서진가 연이를 알아보고 못하고 헤어지길 잘 한것같네요..감동적이네요..   삭제

            • sjum 2016-12-20 15:05:15

              애잔한 마음속에 잔잔히 남는 글 - 2

              보는 이 글은 하루하루중 즐거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마치 4교시가 끝나야 점심시간인데...3교시끝나고 중간쉬는시간에 까먹는
              도시락 같은 맛 일거 같습니다.

              이 글에서 시간이 흐른뒤...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은 주인공들 모두 부인과
              남편을 둔 상태에서 과거의 추억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로 살아가는 모습이
              서정적인 감상에 젖게합니다.

              마지막 서진의 이름을 입 밖으로 불러서였는지? 마음속에서 불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떠나가는 아쉬운 영상이 과거의 우리 아름다운 영상들로 기억됩니다.   삭제

              • sjum 2016-12-20 14:43:17

                애잔한 마음속에 잔잔히 남는 글 -1

                예전 KBS에서 하던 단편영화제란 단막극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세상을 살면서..이 보다 더한 순간도 많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단지, 인지하지 못해서이지..
                길거리에서 상대편은 알아보지만, 제가 다른 신경을 써서 ..그냥 지나가야 했던
                인연들이 수없이 쌓여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연중에서 이런 애잔한 사실과 현실은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하고
                인생의 추억의 한장으로 넘기게 되는군요.

                오늘 종결편이기에..
                이 감정이 또 얼마동안 살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에서 잠시들어와서..   삭제

                • 푸른바다 2016-12-20 13:16:42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드네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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