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한길, 책만을 사랑하다 사라져간 출판인

[뉴스포스트 =신현지 기자] 출판사 민음사 그룹의 박맹호 회장이 향년 84세로 22일 오전 0시4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충북 보은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한 박맹호 회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출판계를 이끈 대표적인 거목이었다. 그가 출판사로 첫 출발은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 한 칸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 작가 오카 마사히로가 일본어로 번역한 인도 작품을 다시 신동문이 한글로 옮겨 '요가'를 펴낸 것이 출판의 첫 시작이었다. 이후 5000종이 넘는 책을 내놓으며 한국 출판계의 산증인으로 남았다.

1970년대 비인기 장르인 시집류 출판에 시인 고은, 문학평론가 김현 등과 의기투합해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를 내놓아 시집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시작으로 김춘수의 '처용', 천상병의 '주막에서', 고은의 '부활', 박재삼의 '천년의 바람',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 등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오늘의 시인 총서'를 통해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시집을 발행하면서는 가로쓰기를 시도했고, 새로운 판형인 '국판 30절'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후 문학과지성사 등이 이 판형을 사용하면서 국내 시집의 표준형이 됐다.

한수산, 박영한, 이문열, 최승호, 조성기, 강석경, 이혜경, 이만교, 정미경 등 대형 신인을 발굴해 낸 '오늘의 작가상'과 신진 작가의 작품들을 과감하게 단행본으로 펴낸 '오늘의 작가 총서'를 통해 박 회장은 본격적인 단행본 출판 시대를 열기도 했다.

또 '이데아 총서' '대우 학술 총서' '일본의 현대 지성' '현대 사상의 모험' 등을 통해서는 교재 출판 수준에 대부분 머물렀던 인문학, 자연 과학 등 기초 학문 출판을 다양한 형태로 장려했다.

아울러 북 디자이너 정병규와 힘을 합쳐 책 장정과 광고의 역사를 개척해 나가기도 했다. 1990년대 초에는 대중 출판의 시대를 맞아 편집부 직원이었던 이영준을 주간으로 발탁, 문인 또는 교수가 아니라 편집자가 출판을 주도해 가도록 함으로써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여는 길잡이 역할도 했다.

지난해 6월에는 고향 충북 보은군에 보은읍 장신리의 임야 2만2409㎡를 기증했는데 이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으로 실거래가가 4억∼5억 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박 회장이 소설가가 될 뻔했던 일화 역시 유명하다. 대학교 2학년 때 시사지 '현대공론'에 소설 당선으로 힘을 얻어 단편 '자유풍속'이 1955년 제1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제외됐다.

그가 소설을 그만두고 출판으로 들어선 계기는 많은 소설을 읽으면서였다. 그는 2012년 자서전 '박맹호 자서전, 책' 발간 기념 간담회에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여러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이라는 것이 천재가 쓰는 거라는 절망을 느꼈다"며 "그래서 소설에 대한 꿈을 접고, 차라리 다른 천재를 발굴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출판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그는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한국단행본출판협의회 대표를 지냈고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화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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