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거스른 박정희표 통치…반복된 억압·부패

1977년 8월 31일 서예 학습 중인 박정희 대통령 영애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박정희 시대 작별 화두

신화로 탄생 朴 정권, 박정희 패러다임 재현

되풀이 된 권위적·제왕적 시대권력 비판 확산

김기춘·문화탄압·정경유착 닮은꼴 통치와 폐해 

[뉴스포스트=최병춘 기자] 박근혜 정권의 시작과 끝에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상당수는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박정희 시대의 종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이라는 파국을 향해가는 박근혜 정권의 비극은 박정희 신화를 자산으로 탄생하고 그 유물을 그대로 답습해온 결과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곪아온 상처가 터졌다는 것이다. 이에 정치권, 특히 진보진영의 야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에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민심이 곧 ‘박정희 신화’의 청산에 대한 시대적 요구로 해석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기점으로 드러난 민주주의 후퇴와 최고 권력의 소통하지 않는 억압적 정치행태의 시작을 과거 박정희 정권에서 찾는 것이다.

 

박정희 신화와 제왕적 리더쉽

 

박정희 신화는 여전히 산업화로 대표되는 경제적 성장과 독재로 인한 민주주의 퇴보라는 공과의 양면성을 지닌 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특히 박정희를 상징하는 ‘제왕적 리더십’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킨 토대가 됐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1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 탄생을 ‘박정희 패러다임’의 결과로,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라고 평가했다.

최 교수는 “경제적 모델로서의 박정희 패러다임뿐만 아니라 유신체제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체제를 신봉하는 그룹들이 있다.(중략) 박근혜 정부는 앞선 정부들에 대한 실망 내지 실패에 근거하여 이명박 정부의 바통을 이어 받았고, 여기에 더해 이른바 ‘박정희신화’를 큰 자원으로 삼았다”고 평가했다.

이어 “대통령은 그 아버지의 신화를 현재 민주화된 조건에서 재현하려고 하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정치를 했다. 이것이 가져온 파탄이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표출 됐다”고 덧붙였다.

보통 ‘박정희 신화’ 또는 박정희 시대의 실체는 제왕적 리더십에 의한 국가와 기업의 성장모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개인이 시스템을 동원하고 지배한다. 뛰어난 개인과 소규모 권력집단을 중심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구조다. 문제는 개인의 의존성이 높기 때문에 능력과 도덕성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엄청난 부작용으로 돌아올 수 있는 시스템이다. 현 정권의 무능과 도덕성 부재가 불러온 재앙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라는 일면으로 드러난 셈이다.

 

사진=뉴시스 제공

김기춘과 블랙리스트, 신화의 연결고리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잇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김똘똘’이란 별칭을 붙일 정도로 신임을 보였다. 이후 김 전 실장은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90년 검찰총장을 거쳐 1991년 법무부 장관까지 올랐고 이후 한나라당 시절 국회의원을 3선이나 지내며 성공가도를 달려왔다. 그리고 2006년부터 박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 2012년 대선에서 김 전 비서실장은 박근혜 후보의 자문그룹 ‘7인회’ 멤버로 활동했고, 2013년 8월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에 오른다.

아버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의 김 전 실장은 신뢰는 상당했다. 2014년 말 정윤회 문건사건 등에 대한 김 전 실장 책임론이 비등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이듬해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 실장은 보기 드물게 사심이 없는 분”이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를 이은 충성도만큼이나 김 전 실장의 어두운 면도 이어져 왔다. 김 전 실장은 박정해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재임당시 고문을 통한 허위 자백을 받은 조작사건으로 판명된 ‘학원 침투 북괴 간첩만’ 사건 등 수많은 간첩사건을 진두지휘하며 ‘공작’이라는 오명을 이어왔다.

그 어떤 불리한 상황도 해박한 법 지식과 갖은 술수로 모면해오며 ‘법꾸라지’라는 별명도 얻게 됐다. 1992년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때 김 전 실장은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해 큰 사회적 물의를 빚고 사법처리까지 될 처지로 몰렸다. 그러나 결국 발언 내용이 아니라 불법 도청을 문제 삼는 ‘묘수’를 발휘해 위기를 넘겼다. 이 사건은 결국 문제를 제기한 측 인사들만 구속되고 김 전 실장은 무사한 채로 마무리됐다.

박정희 시대 데뷔한 김 전 실장은 박근혜 정권들어서도 ‘기춘대원군’ ‘왕실장’ 등으로 불리며 공식 실세로 군림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재임 내내 정치, 사회 등 각 분야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으면서 김 전 실장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여전히 과거 박정희 시대의 공작정치가 지속되고 있다는 인식을 벗지 못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61)씨의 국정농단 의혹 중심에 있는 인물로까지 꼽히며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결국 구속됐다.

 

김 전 실장을 재판대 문턱까지 오게 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또한 박정희 시대와 맥을 같이하는 유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청와대의 지시로 ‘반정부 성향’으로 분류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할 의도로 작성된 명단이다. 그 숫자만 1만여 명에 달하는 이 명단은 문화계를 억압하고 탄압한 중요한 헌법 위반사항으로 김 전 실장 뿐 아니라 박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사건이다.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가 드러낸 문화예술계에 대한 억압의 모습은 40년 전 대중가요에서부터 순수예술, 문학의 출판금지 등 무차별 검열로 표현의 자유를 탄압했던 박정희 시대와 괴를 같이한다.

당시에는 검열과 금지라는 방법에서 현재는 예산 지원, 이른바 돈줄을 막는 것으로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 반공이라는 말이 불순세력으로 바뀌었을 뿐 권력을 비판하거나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인사들을 나누고 배격하고자하는 인식과 태도는 다르지 않다.

박정희 정권 이후에도 존재했던 블랙리스트는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대중문화가 급속히 성장하고 표현의 자유도 자유로워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 다시 위축되기 시작한 문화의 자유도는 박근혜 정권 들어서면서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탄압의 역사 또한 다시 부활했다.

모순적이게도 박근혜 정권은 핵심 정책으로 ‘문화융성’을 내세웠고 다양한 방식의 정부 사업이 진행됐다. 민중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인 문화가 아닌 그의 측근인 CF 감독 차은택의 경우 ‘문화계 황태자’로 군림하는 등 비선실세 최순실의 이권과 관련된 ‘문화융성’이었다.

 

‘역사교육의 국정화’ 43년만의 재현

 

박정희 시대와 박근혜 정권의 공통점은 교육, 특히 교과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문제는 그 방식이 주로 통제였고 교육을 통해 ‘대통합’을 이루자고 하면서도 무리한 획일화에 따른 갈등을 낳았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2015년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이후 31일 최종본이 세상에 공개된다.

정부에서 ‘올바른 교과서’라고 일컫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시도 또한 그 시작은 박정희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43년 전 박정희 대통령도 유신을 선포한 이듬해인 1973년 역사교과서의 전환을 추진했다.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사교육 강화를 추진, 그 핵심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였다.

사진=뉴시스 제공

다양성보다는 객관화를 중요시한 점과 역사관의 청산과 재정립을 목적으로 내세운 것도 몹시 닮아있다.

박근혜 정권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를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특정 이념으로 호도될 우려가 있다”는 국정교과서 추진 이유는 박정희 정부 시절 “의타성에 의해 다분히 왜곡되고 타율적인 역사관은 시급히 청산돼야 한다”는 당시 청와대 보고서 문구와도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학계의 반발도 반복되고 있다. 1978년 전남대 교수 11명이 박 전 대통령의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에 반발해 ‘국민교육헌장과 유신헌법의 철폐’ 등을 요구한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은 요즘 교과서 국정화를 비판하고 집필을 거부하는 학계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위한 것이라면 지금의 국정화 역사교과서는 과거 ‘박정희’미화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이 아버지 박정희 재평가를 실현이라는 통치 신념을 이루기 위한 핵심 정책이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아니냐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다만 과거와 달리 지금의 국정화는 빛을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며 가장 먼저 함께 탄핵되어야 할 정책 1호로 국정교과서가 꼽힌다. 내년 3월 현장 배포를 막아야 한다는 학교현장과 시민의 요구가 거센 상황이다.

 

되풀이되는 정경유착

 

박근혜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들과 독대해 미르·K스포츠 재단의 모금을 독려하고 반대급부로 기업의 지원 정책을 약속했다는 의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세상에 드러난 시작이자 핵심이다. 절대 권력과 재벌 자본의 정경유착의 비극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특히 삼성家와 박정희 대통령 부녀의 악연도 되풀이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할아버지이자 삼성그룹 창업자인 故이병철 회장은 정경유착의 원흉으로 전락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이 회장과 삼성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사건은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사카린 사건은 지난 1966년 5월 2일 삼성이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포대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적발된 사건이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인 1993년 사카린 밀수를 현장 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씨의 폭로로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 개입한 조직적인 밀수인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한국비료 건설에 예상을 넘어선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면서 어려움에 처했지만 마침 차관을 제공한 일본 미쓰이물산이 삼성 쪽에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이를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청와대와 나누기로 하고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계획과 달리 밀수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회장은 구속될 위기에 처했지만 경영에서 손을 떼고 소유 지분을 판다고 약속하면서 처벌을 피했다. 이 과정에서 대구대, 지금의 영남대학교가 박정희 대통령 측에 넘어가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회장의 손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금 430억원대 뇌물공여 등 혐의를 받고 있다. 수수대상은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다.

이 부회장은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서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찬성표를 받는 대가로 최씨와 그의 딸 정유라(21)씨에게 430억원대 특혜 지원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검팀은 삼성그룹이 코레스포츠와 체결한 마케팅 계약금 213억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 원, 최씨의 조카 장시호(38·구속기소)씨가 운영하는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금 16억원을 뇌물공여액에 포함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대가성을 부인하며 대통령의 강요에 의해 자금이 지원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특검팀이 신청한 구속영장이 재판부의 기각 결정으로 삼성家 첫 구속은 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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