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찾아 모란장에 가다

남편의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엉망이다. 하긴 있는 대로 옷을 다 꺼내놓고 입으니 방안이 엉망일 수밖에 없다. 정리를 할까 하다 아차, 관둔다. 남편은 저렇게 옷을 늘어놓고 입는 걸 자기 나름의 정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난 다시 남편의 방문을 닫고 내 방으로 들어온다.

'아줌씨! 아닌 척 하지만 나는 얼굴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당게로.'

갑자기 오이도남자의 실루엣이 내 머릿속을 파고든다. 아니, 갑자기가 아니다. 그를 본 이후로 내내 난 그 남자만을 생각하고 있다.

'아직도 오이도엔 그가 있을까? 오이도남자라고 했으니'

젠장, 병이 또 도지는 것인가. 그놈의 사람의 냄새가 그리워지는 병. 속이 헛헛할 때마다 집 밖을 배회해도 채워지지 않는 병. 나가고 싶어진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온몸의 뼈가 얼어붙는 이놈의 방을 나가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니, 오늘은 오이도에 가고 싶다. 간만에 갈 곳이 정해진 외출, 그러니 망설일 것도 없다. 벌써 난 옷장 문을 열고 있다. 헌데, 옷장을 열자마자 거울 안으로 웬 여자가 성큼 들어선다. 조금은 조심스럽고 불안해하는 눈빛의 여자.

‘걱정 마, 네가 오이도에 가려는 이유를 대라면 열 가지도 넘게 댈 수 있으니까’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시내와는 달리 외곽도로는 곳곳이 빙판이다. 그런데도 난 조심성 없이 자꾸만 페달에 힘이 가해진다. 속도가 느는 만큼 조건반응처럼 내 심장박동수도 빨라진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심장의 움직임.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내 심장 안에 가두었을 때도 이런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도착한 오이도 주차장은 전과는 달리 휑하게 비어 있다.

"아하! 저번 정월대보름 놀이마당을 위해 불러들였던 각설이들을 말하는 모양이고 만요. 가만있자, 그렁 게 오늘이 모란장이니께, 그럼 그 각설이패들이 모란시장에 있을 거인디!"

주차관리인은 웬 각설이는 찾느냐는 듯 야릇한 눈빛으로 내 위아래를 훑으며 그가 모란장에 있을 거라 말한다.

"원래 이곳에 살지 않나요? 오이도남자라고 하던데."

"아, 그날 오이도에 왔응께 오이도남자라고 혔겄지, 그 각설이들이 여기서만 놀가니요. 사방팔방 안돌아 댕기는데 없는 장돌뱅이들인디, 모란장으로나 가보쇼."

무슨 용기일까. 내친김에 기어이 그를 보고 말겠다는 배짱이 생긴다. 성남으로 가는 외곽도로에 올라탄다.

출판사에서 받아온 원고는 아직도 그대로 가방 안에 있다. 이번 주까지 원고를 수정해 넘겨달라는 편집장의 재촉이지만 아직도 난 꺼내보지도 않고 있다.

원고는 초등학생들의 교과와 연계된 기획물로 올해 OO출판사의 주력상품이다. 여름방학에 맞춰 도서시장에 내 놓아야 하는. 아니 그보다도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출판물은 생각보다 어렵다.

스펀지처럼 여과 없이 빨아들이는 그들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일하는 내내 사전을 찾아가면서 나름대로 신중을 기울였다. 그런데 내 원고는 요즘어린이들이 읽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지적이다. 즉 대화체에서 아이들이 요즘에 주로 쓰는 언어를 간간히 섞어 사용해야만 아이들이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얼마나 신선하고 톡톡 튀는 글을 쓰는데, 선생님은 이게 뭡니까. 어린이들이 지루해서 어디 읽기나 하겠어요. 선생님은 솔직히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쉬신 것 같아요. 아유, 나일 먹으면 어쩔 수 없다니까.’

그래, 그녀 말대로 내가 그동안 오래 쉬긴 쉬었다. 결혼하자마자 일을 관두었으니, 뭘 믿고 내가 일을 그만 두었는지..., 그렇지만 그녀가 그런 식으로 날 깔아댈 만큼 형편없진 않다.

어쨌든 난 그날 노골적으로 비위를 건드리는 편집장의 말에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을 삼키며 표정을 감췄다. 대신 인터넷상에서나 쓰는 용어를 굳이 어린이들 책에까지 적용시켜서야 되겠느냐고 내 글에 대한 타당성을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일을 할 거면 자신의 뜻대로 고쳐야 된다는 것이었다.

제기랄, 그럼 그녀 말대로라면 "담탱이, 안뇽! 오늘도 졸라 방가방가" 등. 어법에도 맞지 않는 단어로 아이들에게 맞장구를 쳐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호기롭게 포기할 수도 없다. 지금껏 한 남자만을 의지하며 살았던 내 삶이 얼마나 우매한 삶이었는지 절실히 후회하고 있는 판이니. 그런데도 그 편집장의 태도가 썩 내키지 않아 망설이는 것이다. .

성남인터체인지를 막 돌자 왼쪽코너에 모란시장의 푯말이 보인다. 5일마다 장이 열린다는 모란장은 가끔씩 TV에도 나오는 재래시장이다.

하지만 난 이곳이 오늘 처음이다. 그렇다고 생소하다는 건 아니다. 시장은 어릴 적 봤던 시골장과 너무도 닮아있다. 좌회전신호가 들어오자 난 재빨리 앞차를 따라 혼잡한 장터입구에 잠시 차를 세운다.

순간 창밖의 한 여인이 뜨악하게 날 쳐다본다. 네댓 마리가 든 강아지박스가 그녀 앞에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자신의 앞을 가리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 물론 그녀의 그런 눈빛이 없어도 내가 이곳에 차를 세울 만큼 무모하진 않다.

다만 이곳에서 차를 멈춘 건 그를 찾기 위해서다. 다행히 각설이들의 행방은 눈을 굴려 찾아볼 것도 없이 금방 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맞은편 공터에 각설이패들의 천막이 보인다.

천막 안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몰려 서있다. 그런데 사물이 흐려지고 숨이 막히게 가슴이 뛴다. 젠장,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는지, 즉시 몸을 돌려 이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런데도 난 몸을 돌리지 못한다.

여전히 인파속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를 찾아 헤맨다. 맞은편 길 건너 2층 커피숍이면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 위치면 각설이마당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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