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도 역사"...젊은 역사가의 시선
"신진 연구자, 어려움 많아"...만인만색 네트워크 조직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거나 금기(禁忌)에 도전하는 등 기존 한국 역사학계와는 색다른 시선으로 한국사를 그려낸 젊은 역사학자들이 있다.

왼쪽부터 이성호 동국대 역사교과서연구소 연구원, 김재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 김동주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공동대표 (사진=이별님 기자)
순서대로 이성호 동국대 역사교과서연구소 연구원, 김재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 김동주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공동대표 (사진=이별님 기자)

전국 어느 서점에 가도 역사책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정치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저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거나 까마득한 고대부터 현대까지 시대순으로 친절하게 나열한 책들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다룬 내용의 확장·심화 버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난 9월 출판된 '한뼘 한국사'는 기존의 역사책들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한국사 밖의 한국사'를 모토로 나온 이 책은 역사를 시대순이 아닌 '낮은 곳', '금기', '국가 경계 밖'이란 테마로 묶어 서술했다. 책이 다루는 대상 역시 독특하다. 중산층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서민, 왕권 강화를 위해 근친혼을 했던 고대 왕실 등 교과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주제다.

기존의 역사책에 도전장을 내민 '한뼘 한국사'는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소속 역사 연구자들이 저술했다.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는 2030세대 젊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다. 이 책의 필진 13명은 모두 80년대생으로 한국사를 전공한 박사과정 수료생이다.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는 2015년 하반기 한국 사회를 뒤흔든 '국정교과서 논란'을 계기로 조직됐다. 당시 이들은 SNS 활동이나 집회 시위 참여 등을 통해 국정교과서 반대에 목소리를 냈다. 정권이 바뀌고 국정교과서가 폐기된 이후에는 신진 연구자들이 설 자리가 없는 한국 역사학계의 생태계를 비판하면서 조직적인 활동에 나섰다.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의 조직 체계는 기존 학계와는 다르다. 수직적인 조직이 아닌 수평적인 팀 형태로 구성돼 있다. 역사 관련 저서의 기획과 출판을 담당하는 '콘텐츠출판기획팀', 역사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사共작단'을 진행하는 '팟캐스트팀',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연에 나서는 '시민강좌팀' 등을 운영 중이다.

본지는 지난 7일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공동대표 김동주 연구자와 '한뼘 한국사' 저자 13인 중 2인인 김재원, 이성호 연구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콘텐츠기획출판팀 팀장을 겸하는 김동주 공동대표는 책의 기획과 출판을 총괄했다. 김재원 연구자는 '한뼘한국사'에서 '육남매 아빠 월남민 김씨의 중산층 도전기'를, 이성호 연구자 신라 왕실의 근친혼 문제를 저술했다.

지난 2016년 1월 한국 역사학계의 문제점과 국정교과서 사태를 비판하면서 신진 역사 연구자들이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를 창립했다. (사진=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제공)
지난 2016년 1월 한국 역사학계의 문제점과 국정교과서 사태를 비판하면서 신진 역사 연구자들이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를 창립했다. (사진=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제공)

 

-출판 계기와 과정은 무엇인가.

김동주 공동대표(이하 '김동주') "2016년 초부터 학술지가 아닌 '역사 대중서'를 출판하려는 움직임이 단체 내부에서 있었다. 기존 역사 교과서나 주류 역사연구가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 같은 해 7월 DAUM 스토리펀딩을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3개월 동안 DAUM 스토리펀딩에 각자가 다룬 역사적 주제를 연재했다. 당시 많은 분이 호응해 주셨는데, 이때 받은 후원으로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댓글들을 보면서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고, 스토리펀딩 연재 글을 책에 맞는 형식으로 고치는 과정도 겪었다"

-이 책이 기존 역사책과 어떤 점이 다른가.

김동주 "흔히 서점에서 나오는 역사 관련 저서에는 역사 대중서와 학술서가 있다. 대중서의 경우 유시민 작가 등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자들이 쓴 책도 많다. 이 같은 책들은 현재 학계에서 고민하는 주제들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1980·90년대까지 정리된 내용을 가지고 전달력 있게 정리한 글이다. 반면 학술서적은 전달력보다는 학술적으로 고민하는 부분들을 글로 풀어내는 데 집중했다"

"우리는 학술적이면서도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역사책이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고 판단했다. 이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한뼘 한국사'를 출판한 것이다. 생각보다 대중은 역사 전공자들이 말하는 역사를 알고 싶어한다. 전문 학술서보다는 친근하면서도 학술적인 책이다 보니 호응을 얻은 게 아닌가 싶다"

이성호 연구자(이하 '이성호') "이 책의 경우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고, 주제별로 서술했다. 주제별 서술이기 때문에 구성면에서 기존 책과 차별화된 게 있다. 대주제를 '낮은 곳에 있는 존재', '금기시 된 존재'라고 적혀 있다. 이 부분이 눈길이 가는 게 아닌 가 싶다"

-책에는 '육남매 아빠 월남민 김씨'의 중산층 도전기가 담겨있다. 김씨는 연구자의 친할아버님이다. 특별히 할아버님의 이야기를 저술한 이유는 무엇인가.

김재원 연구자(이하 '김재원') "현대사를 전공했는데, 그중에서도 중산층 연구가 저의 주 연구주제라 저술했다.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계층 상승에 대한 욕망은 핵심적인 사회적 문제라 생각한다. 거기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이 바로 저희 할아버지와 아버지다. 이런 문제의식에 저의 가족들의 사례를 입힌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가면서 중산층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분들은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에서도 중산층을 하나의 담론으로 끌어갔고, 여기에 포섭된 존재들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연구가 끝난 이후 아버지와 장모님의 이야기를 구술 작업을 통해 연구하고 있다"

-연구에 어려움은 없었나.

김재원 "많이 어려웠다. 할아버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자녀인 6남매(김재원 연구자의 고모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구술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일단 가족들이 멀리 떨어져서 살아 어려웠다. 또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육 남매의 기억이 각각 달랐다. 이를 정리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가장 어려운 건 '역사적 객관화'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해야 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가족을 연구하다 보니 어디까지를 서술해야 할지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가족사를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것도 어려웠다. 할아버지 개인의 서사와 국가 중심의 거대 서사가 어디서 만나고 헤어지는지 의미부여를 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찾기 힘들었다"

-신라 왕실 근친혼 문제도 흥미롭다. 이 문제를 저술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성호 "신라 정치사를 연구하고 있는 저는 교과서에서 신라 역사에 대해 골품제만 가르치고, 상세한 얘기는 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신라 왕실의 가장 핵심은 '근친혼'인데 이 문제가 교과서에 빠져있다. 대학에서는 선생님들이 근친혼에 대해서도 편하게 얘기해주신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에는 아예 듣지도 못하다. 근친혼이 현재 도덕적 관점에서 매우 나쁜 것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교과서란 국가에서 원하는 역사가 담긴 것이다. 국가가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역사는 교과서에 빼버린다. 하지만 근친혼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신라 왕실의 성립과정을 배우게 되면, 신라사를 단순 암기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주제임에도 교과서에 빠져있으니 이 책에서 언급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출판 과정이나 저술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이성호 "이 책이 대중서로써의 가치가 있으려면 중학생들에게도 쉽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린 사촌 동생들에게 원고를 보여줬다. 동생들은 원고를 읽고 어렵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글을 여서일곱 번이나 수정했다. 사촌 동생들에게 글을 수정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괴롭혔던 기억이 난다(웃음)"

김재원 "우리 할아버지 사진을 많이 봐서 좋았다. (웃음) 다른 저자들은 인용 사진에 대한 저작권 문제로 고생했는데, 저는 가족사진이라 저작권 문제가 전혀 없어 편했던 기억이 난다. 또 가족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가족분들끼리 서로 기억이 달라 다투시기도 했다"

-차기작 계획이 있는가.

김동주 "책이 출판된 후 차기작 계획을 시작했다. 팟캐스트팀과 시민강좌팀 등이 쌓아온 콘텐츠를 활용하려는 계획이 있다. 김재원 선생님을 필두로 '근현대 소비사'를 주제로 하는 저서를 집필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한뼘 한국사'가 시리즈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는데, 다음 권에는 어떤 내용으로 채울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책 이야기를 끝내도 될 거 같다.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김재원 "사실 저희는 정말 어렵다. 저희가 갈 수 있는 곳은 국가기관이나 대학이다. 통계적으로 국가기관이 책임질 수 있는 건 10%도 안 됐지만, 그래도 90%는 대학에서 책임져줬다. 하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대학이 시장화·기업화되면서 일차적으로 줄이고 있는 게 순수학문이다. 그중에서도 인문학이다. 대학에서 아웃풋이 100이라면 현재 대학이 책임지는 건 1, 2밖에 없을 거다."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되길 바란다. 순수학문을 전공하는 신진 연구자들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인만색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김동주 "만인만색 네트워크가 신진 역사 연구자들이 다 같이 모여 학술활동을 하고, 기존 학계 밖의 연구 주제나 방식들을 고민하는 장이 되길 바란다. 다른 대학원 연구자들과 같이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책을 출판하거나 팟캐스트 방송·시민강좌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성호 "사실 연구자중에 연구를 주업으로 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하루에 일하는 시간이 14시간이라 치면 연구에 쓰는 시간은 4시간도 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연구자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연구 성과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이게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성호 "팟캐스트에서 신진 연구자들이 처한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댓글에 '너희가 선택한 길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우리가 굶는 걸 선택한 게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인식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시간 강사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사회가 조금씩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것처럼 신진 연구자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김재원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가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단 현재 학회들처럼 고인 물이 지속되거나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신진 연구자들이 순환·유입돼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2018년 현재처럼 70년대 학번들이 학회장을 하는 조직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김동주 "미래의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에 바라는 점이 있다. 2·30년 후에는 만인만색에 저희가 아니라 후배 역사 연구자들이 우리의 자리를 대신해 신선한 연구를 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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