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해야 살고(生) 변해야 산다(買)’ 구제시장 생존기
- ‘중장년의 홍대’에서 청춘 사로잡는 ‘힙’한 공간으로

[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예전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구제 옷 가져다 놓고 1~2천 원에 팔았는데 이태 전부터 동묘 구제시장에 청년들이 많이 온다. 젊은 친구들은 시장에 점포도 많이 얻고 있는데 지금 자리가 없어 못 들어가는 청년들이 많다”(동묘앞역 9번 출구 앞 공인중개사 사무소 운영하는 김영준 씨)

12일 찾은 동묘 구제시장. 다양한 세대들이 구제시장을 찾았다(사진=이상진 기자)
12일 찾은 동묘 구제시장. 다양한 세대들이 구제시장을 찾았다(사진=김혜선 기자)

김영준 씨는 지난 12일 동묘 구제시장을 찾은 취재진에게 동묘 구제시장이 겪고 있는 최근의 변화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김 씨는 지천명의 세월을 온전히 옛 황학동 시장 터에서 보냈다. 그에 따르면 본인이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사무소에도 동묘 구제시장에 점포를 얻기 위해 대기하는 청년들만 4명 이상이다.

해방 이후 격동의 70년 서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묘 구제시장이 또 한 번의 탈피를 겪고 있다. 이번에는 외부로부터 찾아온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단행한 앞선 세 번의 변화와는 다른 네 번째 환골탈태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뉴스포스트>는 세대의 멜팅팟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동묘 구제시장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해봤다.  
 

▲ 서울 70년 史 고스란히 간직한 동묘 구제시장

동묘 구제시장의 기원은 황학동 시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과 6·25전쟁 이후 발생한 피란민들과 경제적 안정을 찾아 상경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노점을 펼치면서 황학동 시장을 형성했다.

황학동 시장은 그 존립에 수차례 위기를 맞는다. 첫 번째 시련은 60년대에 찾아왔다. 노점이 펼쳐진 청계천 판자촌 일대에 큰불이 나면서 노점이 피해를 입었고 69년 황학동 앞 청계천 복개 공사로 노점상들이 거주하던 판자촌이 자취를 감추며 노점상의 뿌리가 흔들렸다. 이 시기 황학동 시장은 생존을 위해 최초의 환골탈태를 도모한다.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은 골동품 시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마침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며 전국적으로 옛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고 황학동 시장 점포 상인들과 중간 상인들은 서울에서 영서로 영서에서 영동으로 영동에서 영남으로 영남에서 호남으로 호남에서 호서로 호서에서 다시 서울로 전국을 돌며 골동품을 수집해 황학동 시장에 납품하거나 판매했다.

두 번째 위기는 우리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에 찾아왔다.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맞아 정부가 도시 정비를 위해 황학동 시장 점포 정리에 눈을 돌린 것. 이를 계기로 황학동 시장에 위치했던 200여 개 골동품 점포 가운데 9할이 ‘장안평 고미술상가(現 답십리 고미술상가)’로 이전했다.

동묘 구제시장의 모태인 황학동 시장은 중고 전자제품 등 없는 게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사진=김혜선 기자)
동묘 구제시장의 모태인 황학동 시장은 중고 전자제품 등 없는 게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사진=김혜선 기자)

골동품이란 황금알을 낳는 오리를 내어준 황학동 시장은 생존을 위해 다시 한 번 옷을 갈아입었다. 골동품 점포가 빠져나간 자리를 중고 전자제품과 기계류를 파는 노점과 점포로 채운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중고제품을 취급하는 노점상은 더 늘어났고 이 새로운 시장은 2000년대 초까지 ‘황학동 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는 위상을 유지했다.

황학동 시장이 겪은 마지막 위기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단행된 청계천 복원 공사다. 이 시기를 거치며 황학동 시장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 한 줄기가 현재의 동묘 구제시장이다.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 공사를 진행하면서 황학동 시장 점포 상인들은 현재의 문정동 가든파이브 부지로, 노점상들은 처음엔 동대문운동장에 터를 내줬다가 지금의 신설동 서울풍물시장으로 이주시켰다.

가든파이브와 서울풍물시장 어디에도 속하지 않거나 또는 속하지 못한 노점상들은 동묘앞역 인근에서 벼룩시장을 형성했다. 이 시장이 동묘 구제시장의 시초다. 동묘 구제시장이 커지면서 서울풍물시장에서 나와 동묘 구제시장에서 노점을 하는 상인들이 생겨났고 지금은 주말이면 동묘앞역 3번 출구부터 서울풍물시장이 위치한 청계 8가까지 노점이 늘어서게 됐다.
 

▲ 중장년층 놀이터 동묘 구제시장이 ‘힙’ 해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70년 史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동묘 구제시장은 그 역사의 무게와 질감 때문에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청년층은 찾지 않는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홍대라 불렸다. 청춘들이 홍대 인근에서 젊음을 즐기듯 중년 이상 세대는 음식 빼곤 새것이 없다는 동묘 구제시장에서 그들만의 노숙한 문화를 누렸다.

청년들이 '옷 무덤'이라 불리는 구제 옷 더미를 뒤져 옷을 고르고 있다(사진=김혜선 기자)
청년들이 '옷 무덤'이라 불리는 구제 옷 더미를 뒤져 옷을 고르고 있다(사진=김혜선 기자)

동묘 구제시장이 우리 사회 20·30세대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13년을 기점으로 방송인들이 저렴한 가격에 쓸 만한 본새의 옷을 구입할 수 있는 곳으로 동묘 구제시장을 소개하면서다. 이즈음부터 동묘 구제시장에서 싼 가격에 질 좋은 구제 옷을 구하는 횡재를 뜻하는 이른바 ‘겟(get)’이란 단어가 20·30세대에게 익숙해졌다.  

10대들은 주로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이 아닌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를 통해 동묘 구제시장을 알고 찾아온다. 이처럼 청춘들 사이에서도 동묘 구제시장 정보를 얻는 데 세대 차가 나지만, 이들 모두에게 동묘 구제시장은 1~2천 원의 비용으로 구제 옷 찾는 재미가 쏠쏠한 ‘힙(hip)’한 장소다.

쏟아지는 '옷 무덤' 속을 파헤쳐 보물을 찾는 재미에는 세대 차가 없다(사진=이상진 기자)
쏟아지는 '옷 무덤' 속을 파헤쳐 보물을 찾는 재미에는 세대 차가 없다(사진=이상진 기자)

이처럼 70년 역사를 짊어진 동묘 구제시장은 중장년과 청춘들에게 낯익은 풍경과 낯선 재미를 번갈아 선사하며 세대가 함께 녹아드는 멜팅팟의 장소로 다시 한 번 탈바꿈하고 있다.

동묘 구제시장에서 구제 옷을 파는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31세 이승영 매니저는 “동묘 구제시장에 본격적으로 옷을 파는 청년들이 유입된 것은 2년 전쯤부터 광장시장에서 유입된 이후부터이고 나도 광장시장에서 왔다”며 “동묘 구제시장이 방송에 주기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청년들이 많이 유입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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