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다움 실종, 사즉생 각오로 위기 대처해달라"
삼성, HBM4·2나노 등 장기적 경쟁력 강화 방안 도출
책임묻기 급급한 사후확증편향…미래지향적 시각 필요
[뉴스포스트=최종원 기자] "우리 정부가 가장 뼈아프게 느껴야 할 것은 지난 10년간 새 산업이 도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고, 누군가는 고통받아야 하는데, 사회적 갈등을 감내하기 어려워 다 피하다 보니 새 산업이 하나도 도입되지 않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2월 25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다목적컨퍼런스홀에서 금융통화위원회를 개최한 뒤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재는 당시 기준금리를 연 3%에서 2.75%로 0.25%p 인하하고, 올해 성장률 전망을 기존 1.9%에서 1.5%로 낮추면서 "이것이 우리 (경제의) 실력"이라고 덧붙였다.
'실력'은 저성장 국면에도 신산업을 키우려 하지 않은 정부의 안일한 노력을 비판하기 위한 단어였지만, 산업계에도 해당할 수 있는 말이다. '인공지능(AI) 3강 도약'이라는 정치권과 정부의 공허한 비전 속에 산업계도 근원적인 AI 경쟁력을 키우기보다 스타트업 인수합병(M&A)이나 외국 기업과 기술협력 등 따라가기 급급한 모습을 비췄기 때문이다.
우리 산업계를 대표하는 삼성전자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GPU(그래픽처리장치)에 더해 FPGA, NPU 등 AI 칩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거듭하고, 데이터센터에 탑재되는 AI 가속기가 대세로 떠올랐지만 삼성이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파운드리·HBM·TV·스마트폰·가전 등 위기론 팽배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AI 가속기 투자를 확대함에 따라 경쟁 기업인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브로드컴 등의 HBM(고대역폭메모리) 수요에 대응하며 독주에 가까운 점유율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초기 투자 지연으로 HBM3E 등 최선단 공정에서 고객사에 적기 공급을 할 만한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도 재고 조정 등 업황 악화 우려가 크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의 가동률은 하락하는 데다 차후 2나노 공정에서도 고객사 확보가 어려울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도 팽배하다. DX 부문(TV·스마트폰·가전 등)은 경쟁사 대비 품질이 걸맞지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달 임원들에게 "사즉생(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달라"고 주문한 것도 일맥상통한다. 이 회장은 "삼성이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며 "중요한 것은 위기라는 상황이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라고 강도 높게 지적했다. 또 "당장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설파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주들도 삼성이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주들은 지난달 주주총회에서 엔비디아에 HBM3E 공급을 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해 수율을 못 맞춘 것이 아니냐는 질문과 엑시노스 설계 역량에 대한 의문을 드러냈다. 이외에도 중국의 레거시(구형) 반도체 공습, 경기침체와 애플의 저가폰 출시, TV 점유율 하락, 기술·연구인력의 해외유출 등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이어갔다.
삼성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회사는 일단 당장의 성과를 좇지 않고 장기적으로 변화하겠다는 관점을 공유했다. 파운드리는 추후 2나노 공정, HBM은 6세대(HBM4)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HBM4·2나노·AI 기술력 등 미래 전략 공유
한지만 파운드리 사업부장은 "고객사 확보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없지만 GAA(게이트올어라운드) 3나노와 2나노 선단 노드에서 성과를 내겠다"며 "3나노는 시장에서 의미있는 플레이어로서 값진 위치에 있고, 다음 고객을 확보를 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메모리사업부와 파운드리사업부는 본격 협력한다"고 말했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은 "HBM4을 예정대로 올 하반기 양산하겠다"며 "작년 HBM3와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파운드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고객사 확보다. 하이닉스가 올해도 실적 대박을 자신하는 데에는 이미 올해 고객사에 공급할 물량을 확정한 배경이 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내년 물량도 고객사와 긴밀한 대화 통해 상반기 중 확정할 것"이라 밝혔다. 삼성전자는 그나마 물량이 확정되지 않은 HBM4에서 고객사와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수주를 늘려야 한다. 특히 HBM은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메모리인 만큼 1c D램 등 선단 공정 설계 능력도 매우 중요하다.
TV와 스마트폰, 가전은 AI 기술력을 강화한다. TV는 마이크로소프트와 AI 협력을 강화해 관련 기술을 탑재하고, 연간 TV 판매량 목표 약 4000만대 중 절반 이상을 AI TV로 판매할 계획이다. 스마트폰은 완성된 AI 아키텍처(구조)를 갖춘 갤럭시 S25로 시장을 공략하고, 가전에선 AI가 번거로운 일을 대신 하고 냉장고 화면으로 영상통화를 하는 등 스마트싱스를 통한 연결성을 강화한다.
삼성전자의 계열사인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등에서 배당수익도 상당한 만큼, 계열사들의 실적도 중요하다. 이중 삼성SDI는 전기차 캐즘(수요 정체)으로 인한 적자와 유동성 악화로 최근 유상증자를 결의하면서 삼성전자의 주주가치도 다소 희석됐다.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삼성SDI의 신주 흥행과 스텔란티스와 합작한 북미 지역 배터리 공장 성과가 중요해졌다.
사즉생이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되려면
이 회장은 과거 계열사에 지원사격 행보를 이어갔다. 이 회장은 존 엘칸 스텔란티스회장과 친분을 맺으며 스텔란티스의 최대주주인 엑소르 사외이사를 지낸 인연이 있다. 이 회장은 2022년 12월 올리버 칩세 BMW그룹 회장을 만나 양사의 전기차 배터리 협력을 공고히 하기로 매듭을 지었다. 삼성디스플레이 공장도 방문하며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에 13조1000억원을 투자하는 전략을 발표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부당합병' 의혹으로 기소된 이 회장은 지난 2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법 리스크가 상당 부분 해소된 이 회장은 지난달 중국 출장길에 올라 샤오미·BYD를 방문하며 배터리 협력을 타진했고, 이달 초에는 일본에서 협력회사 모임 'LJF'에 속한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소재·부품 협력사 등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혹자는 추상적인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근본적인 문제 개선보다 책임 묻기에 급급한 사후확증편향의 시대라고 한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사후확증편향은 사태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 어떤 문제든 가볍지 않다. 삼성의 위기론 타파를 위해서도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한 급급한 비판보다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더 고려하는 미래지향적인 시각이 더 필요하다.
이건희 선대회장의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1993년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아직도 회자된다. 이 회장의 '사즉생'이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되려면, 근본적인 변화가 동반돼야 한다. 비판에 휩쓸린 단기 처방보다 근본적인 기술 경쟁력을 갖춰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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