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건축물의 정취는 물론 골목길의 정서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수원화성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水原華城)은 그 자체로 도시였다. 도시 외곽을 둘러싼 성곽과 곳곳의 군사시설은 기존 산성과 읍성의 단점을 보완해 방어 기능을 강화했다. 또한 수원유수부 관아와 행궁이 있어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고 유사시에는 임시수도를 꾸릴 수 있는 역량까지 갖췄다. 수원화성 안 곳곳에는 마을이 들어서서 번창한 고을이기도 했다.

수원화성은 철저한 계획에 따라 건설됐다. 당시 선진 축성 기술을 도입했으며 새로운 장비를 고안해 사용하기도 했다. 성곽을 이루는 모든 건축물과 기자재의 설계도가 남아 있고, 축성의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문자는 물론 그림으로도 남겼다. 

(2022. 11. 24) 수원화성의 화홍문. 수원천이 흐르는 북쪽 수문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11. 24) 수원화성의 화홍문. 수원천이 흐르는 북쪽 수문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계획을 세워 세운 도시

수원화성은 수원 시내에 자리한 성곽과 부속 건물들을 지칭하지만, 수원과 화성이라는 행정구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는 과거 수원유수부에 속한 같은 지역이었다. 

유수부는 조선시대에 한양 방어의 중요한 요충지에 설치한 특별행정구역으로 개성, 강화, 광주(경기도), 그리고 수원에 설치했다. 정조 시절에 유수부로 승격한 광주와 수원에는 종2품이 아닌 정2품 유수(留守)가 부임했다. 품계가 한 단계 높은 것에서 보듯 수원의 중요한 입지를 알 수 있다.

수원화성 창룡문. 동문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창룡문. 동문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성곽길.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성곽길.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많이 알려진 대로 수원화성은 정조의 의지가 만든 성곽 도시다.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고 화산에 있던 읍치(邑治), 즉 수원부 관아를 지금 수원화성이 자리한 위치로 옮기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성하기 전에는 수원의 중심지가 지금의 화성시 화산동 일대였다. 

수원화성은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을 지침서로 하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했다. 축성 시에 거중기, 녹로 등 새로운 중장비를 만들어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 데 이용했다.

정조는 과거 축성의 단점을 보완하며 수원화성을 건설했고,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따라서 책임자와 실무자들은 설계도는 물론 건축 기자재 입출고와 인력 동원 현황 등 모든 공사 과정을 문서로 남겼다. 이 기록들은 축성 완료 후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로 종합되었다. 오늘날의 백서(白書)와도 같다. 

수원화성의 동장대.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의 동장대.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은 둘레 5,744m에 면적은 130ha에 달한다.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평산성은 산에 쌓은 산성과 평지에 쌓은 평지성의 이점을 담아 쌓은 성을 일컫는다. 

또한 수원화성은 바깥 부문만 성벽을 쌓아 올리고 안쪽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 방식으로 쌓았다. 기존 성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들을 보완해 방어에 특화된 옹성(甕城)과 치성(雉城)을 적재적소에 두었다. 성벽 중간중간 돌출시킨 치성에는 대포를 장치하는 포루(砲樓)나 군사를 보호하는 포루(鋪樓)를 설치하기도 했다.

수원화성 부속 건축물 중 화홍문(華虹門)과 그 일대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수원천이 지나는 북수문(北水門)인 화홍문은 일곱 칸 홍예문(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문) 위로 돌다리를 놓아 누각을 세운 모습이다. 수문을 빠져나온 물이 떨어지며 흐르는 모습은 수원화성에서 반드시 봐야 할 광경으로 꼽힌다.

수원화성 안에 자리한 행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안에 자리한 행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화성성역의궤, 문자는 물론 그림으로도 남은 기록

지금의 수원화성과 행궁은 복원된 것이다. 특히 1796년에 600여 칸으로 완공된 행궁은 일제강점기에 병원과 경찰서 건물로 쓰였다. 그래서 부속 건축물들이 대거 헐리고 낙남헌과 노래당만 원형을 유지했다. 지난 2002년에 중심 권역 복원 공사를 마친 행궁은 현재도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화성의 부속 시설로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건축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 등으로 훼손됐다. 성곽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1975부터 1979년에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하거나 복원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모든 건축 내용이 문자는 물론 그림과 함께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의 '창룡문' 도면. 외부를 옹성으로 보호했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화성성역의궤'의 '창룡문' 도면. 외부를 옹성으로 보호했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화성성역의궤'의 '거중기'. 수원화성 축성 시 쓰인 중장비.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화성성역의궤'의 '거중기'. 수원화성 축성 시 쓰인 중장비.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 책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 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성곽 연구자들은 「화성성역의궤」가 성곽 축성 등 건축사는 물론 역사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의궤를 통해 동원 인력에 대한 기록까지 확인할 수 있어 큰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에 축성 등 국가시설 건축에는 대부분 역(役)의 의무가 있는 양민을 동원했는데 대체로 무임금 노동이었다. 그리고 석공 등 전문 인력에 대한 처우도 열악했다. 그런데 의궤를 보면 전문 인력과 동원된 일꾼들 노임 산정 방법은 물론 여름에 보양식을 제공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

수원화성 안내 자료에 따르면 축성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지급된 품삯 총액이 30만4천817냥8전 4푼에 달하고, 목재와 석재 등의 구매 총액은 39만201냥1전1푼에 달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수원화성 건설 시 일꾼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자세했던 기록은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화성성역의궤」에 설계 도면과 건축 방법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수원화성이 훼손되었음에도 과거 건축 방법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던 점이 크게 작용한 것. 이 기록의 가치 덕분에 「화성성역의궤」 또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수원화성 팔달문. 남문이다. 성문 외부를 옹성으로 보호하는 구조다. 성벽 잘린 자리는 로터리 도로가 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팔달문. 남문이다. 성문 외부를 옹성으로 보호하는 구조다. 성벽 잘린 자리는 로터리 도로가 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장안문. 북문이다.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이 둘러싼 구조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장안문. 북문이다.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이 둘러싼 구조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성곽 한 바퀴 혹은 골목길 한 바퀴

수원화성을 직접 가보면 왜 성곽 도시인지 실감할 수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 즉 북문과 남문을 연결하는 도로에 노선버스 등이 다니고, 성곽 안에는 마을과 상업 시설은 물론 각급 학교와 관공서도 자리하기 때문이다.

안내 자료에 따르면 성안 마을의 역사는 꽤 오랜 듯한데 지금은 시절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이다.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된 행궁동에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 배경으로 나온 곳이라고 홍보하는 가게가 여럿 있다. 각종 맛집 탐방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통닭 거리도 수원화성 안에 있다.

수원화성 안쪽에 자리한 수원 시가지. 마을과 상업시설, 각급 학교와 관공서가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 안쪽에 자리한 수원 시가지. 마을과 상업시설, 각급 학교와 관공서가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을 순회하는 화성어차.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을 순회하는 화성어차.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수원화성을 즐기는 제일 좋은 방법은 찬찬히 걸으며 살펴보는 것이다. 성곽 위를 걸을 수도 있고 그 주변으로 난 산책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사방의 문들은 물론 곳곳의 암문으로도 성 안팎을 드나들 수 있다. 

특별한 차량을 이용할 수도 있다. 수원화성 곳곳을 탐방하는 ‘화성어차’ 탑승은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체험 코스이다.

그런데, 수원화성에는 성곽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 마을이 있고 그곳들을 이어주는 골목길이 있다. 옛 건축물이 주는 정취 못지않은 골목길만의 정취를 한번 느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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