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경남'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기부의 삶으로 존경받는 진주 ‘남성당한약방’의 김장하 한약사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어른’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많다. 넓게는 성인을 의미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어른’을 쓸 때가 있다. 이럴 때 ‘어른’에는 존경의 의미가 담긴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어른’이라는 경칭을 붙이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 사회의 많은 이가 ‘어른’으로 인정하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가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과 올 1월 1일 ‘MBC경남’에서는 다큐멘터리 2부작 <어른 김장하>를 방영했다. ‘김장하’는 경남 진주에서 수십 년간 한약방을 운영하며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희사하고 지역 사회를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한 인물이다. 기부하는 부자는 세상에 많을지도 모른다. 다만 수혜자는 물론 지역 사회까지 존경하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김장하가 그런 어른이었다.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다큐멘터리로 담은 한약사 김장하의 삶

다큐멘터리는 한약사인 김장하 선생의 삶을 소개한다. 선생은 19세였던 1962년에 한약업사 자격을 얻었다. 1963년 고향인 경남 사천에서 한약방을 개업한 선생은 10년 뒤 진주로 이전해 50년간 운영했다. ‘남성당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거기서 번 돈으로 김장하 선생은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교육의 꿈이 있었던 김장하 선생은 1984년 고등학교를 설립한다. 학교의 이사장이 된 선생에게는 교사와 직원 채용의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친인척이나 지인을 쓰지 않고, 돈을 받고 채용하지 않고,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한 어느 정치인이 잘 봐달라고 한 신입 교사의 채용을 취소한 일화가 그의 신조를 잘 보여준다.

김장하 선생은 진주 지역 사회 다양한 단체와 활동에 기부했다. 선생은 특히 지역 언론에 관심이 많아 옛 진주신문의 주주로 참여했다. 선생은 지역 문인을 위한 ‘진주가을문예’ 시상식도 1995년부터 27년간 지원했고, 2000년부터는 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이외에도 김장하 선생은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영남대표 등을 지내며 여러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지원도 지속해 왔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경남도민일보에서 퇴직한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 선생의 지원이나 기부를 통해 인연을 맺은 이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한다. 그 현장을 MBC경남의 김현지 PD가 함께 다니며 영상으로 담았다. 

김주완 기자는 오랜 기자 생활을 했지만, 김장하 선생 주변인을 취재하는 것은 여느 취재와 다른 점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보통의 취재는 경계하거나 부정적 반응이 많은데 “취재원들이 거의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모든 인터뷰이가 김장하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고, 세상 사람들에게 선생의 삶을 알려야 한다며 반겼다고 했다.

사실 진주나 경남 지역을 벗어나면 김장하 선생을 아는 이가 드물다. 선생은 본인이 돋보이는 걸 싫어해 언론에 인터뷰한 적 없기 때문이다. 과거 행사 사진들만 봐도 맨 구석에 있고, 누가 본인의 칭찬이 될 질문을 하면 입을 꾹 다물어 버리기 일쑤다. 진료를 핑계로 대통령의 초대를 거절했던 일화가 선생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는 이런 김장하 선생의 삶을 많은 이와 공유하고 싶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꺼리는 선생 때문에 주변 인물 인터뷰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어른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선생의 다양한 기부 활동을 소개하지만, 장학생들과의 일화가 특히 인상적이다. 김장하 선생의 평소 소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지역의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했고 그들 중에는 교수나 법조인 등 세상의 잣대로 보면 성공한 이가 많다. 하지만 사회 현실에 눈을 돌리며 신념에 따른 삶을 개척한 이도 있었다.

그 중 조해정씨는 1970년대에 김장하 선생의 집에 기거하며 상업고등학교에 다닌 학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취업이 아닌 학업의 뜻을 품자 선생은 학원비 등을 지원하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80년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조해정씨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제적당하고 복역까지 했다. 

수배 중에는 경찰이 남성당한약방까지 찾아간 일도 있었지만, 선생은 조해정씨에게 그 일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위해 인터뷰할 즈음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김장하 선생은 민주화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다른 장학생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길은 (공부와 학생운동) 둘 다 똑같다”고 덕담하며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는”이라고 표현할 만큼 장학생들을 자랑스러워했다.

평범한 삶을 사는 장학생도 있었다. 장학금을 받았지만 특별한 인물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어느 장학생에게 선생은 그런 것을 바란 게 아니었고,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다고 격려해줬다고 한다. 

장학생들의 인터뷰를 종합하면 선생은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요구 사항이 없었고 부담도 주지 않았다. 장학생들이 기억하는 김장하 선생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참 어른의 모습이었다. 작은 일에도 크게 생색내는 이들과 비교되는 모습이 아닐까.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어른의 품격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으로 번 돈을 사회로 돌려보냈다. 대표적으로 자신이 설립한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무상 헌납했는데 땅과 건물 가치만 1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2021년 12월에는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며 남은 기금 약 34억 원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증했다. 학교나 재단을 재산 증식이나 보호의 수단으로 여기는 이들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게다가 재단을 통하지 않고 김장하 선생 개인적으로 수여한 장학금과 지역 사회 기부금도 있어 그 총액은 산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그 외에도 여성, 환경, 역사, 문화 등의 활동에도 아끼지 않고 후원했다.

김장하 선생은 세상을 위해 돈을 쓰는 이유로 “아픈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호의호식할 수 없었고 함부로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자가용이 없었고 양복도 안감이 해진 그대로 입고 다녔다. 

그런 선생은 돈은 똥과 같다고 말한다. 그냥 쌓아두면 악취가 진동하지만, 밭에 골고루 뿌려 놓으면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김장하 선생은 2022년 5월 31일 진주 ‘남성당한약방’의 문을 닫았다. 선생이 그 마지막 날에 셔터를 내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인자하고 온화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서 ‘어른’의 품격이 풍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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