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궁의 흔적, 연희동과 연세대학교 사이를 운행하는 서대문04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연희동 주택가에 들어서면 차분한 느낌이 든다. 산자락이 주택가를 감싸고 있어서인지 푸근한 느낌마저 든다. 주택가 이면도로는 그리 좁지 않지만, 인도와 차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대로변에서 멀어지며 산에 가까워질수록 도로의 경사도 급해진다. 보행자에게 불친절한 연희동 주택가에서 마을버스 서대문04는 친절한 발이 되어준다.

마을버스 서대문04가 연희동 궁동산의 종점을 향해 오르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서대문04가 연희동 궁동산의 종점을 향해 오르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연희궁과 연희동

연희동(延禧洞)의 이름은 연희궁(延禧宮)에서 따왔다. 연희궁은 세종 시절인 1420년에 지어진 이궁(離宮)이다. 이궁은 임금이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을 의미하는데 왕의 재액을 피하고자 방위를 달리한 곳에 궁을 조성하는 고려시대부터의 전통에 따라 건립했다.

연희궁이 들어선 무악은 원래 조선의 수도 후보지 중 한 곳이었다. 정도전이 삼각산 아래 한양을 도읍으로 추천했다면 하륜은 무악을 추천했다. 결국 한양에 도읍지가 들어섰고 무악에는 이궁을 건축했다. 

연희궁에서 세종의 부왕인 태종이 머물기도 했고, 세종도 세자인 문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잠시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연희궁은 연산군 시절 들어 연회장으로 변했다. 연희궁에서 연산군이 궁녀들과 음주가무를 즐긴 것. 연회장이 된 연희궁은 이궁으로서 기능을 점차 잃게 된다. 

결국 1764년 영조가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묘를 연희궁 자리에 조성하면서 이궁으로서 연희궁은 폐지됐다. 다만 ‘궁뜰’, ‘궁동’, ‘궁동산’이라는 인근 지명이 연희궁의 흔적으로 남았다. 여기서 ‘궁’은 연희궁을 의미한다. 

영빈 이씨의 묘인 수경원이 조성되며 연희궁은 사라졌지만, 정조 시절 이 지역이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연희궁계(延禧宮契)로 편제되며 연희궁의 흔적은 지명으로 남게 된다. 

일제시대에 연희동 일대는 경기도에 편입됐다가 다시 경성이 되는 변화를 겪기도 한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희동은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연희리로 편입됐었는데 1936년 경성 확장 과정에서 연희정(延禧町)으로 복귀한 것.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가 경성부에 구제도(區制度)를 도입하면서 연희정은 서대문구로 편제된다.

해방 후인 1946년에야 일제식 동명인 연희정이 우리 식으로 바뀌며 연희동이 된다. 지금의 연남동도 당시에는 서대문구 연희동에 속했다. 하지만 1975년 그 일대가 마포구로 편입되자 연희동의 남쪽이라는 의미를 가진 연남동으로 변경됐다.

연희궁터와 서잠실터의 표석. 연세대학교 안에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연희궁터와 서잠실터의 표석. 연세대학교 안에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오늘날 연희궁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연희궁을 폐지하며 들어선 영빈 이씨의 묘 ‘수경원’이 연세대학교 부지 안에 있었던 건 확실하다. 연세대 박물관에 그 기록과 흔적이 남아 있다. 연세대 정문 근처에는 ‘연희궁터·서잠실터’라는 표석이 있다. 연세대가 연희궁 자리에 들어선 것을 보여주는 한편 연희궁에 잠실도회가 설치됐었단 것을 알려준다.

잠실도회(蠶室都會)는 조선 시대에 양잠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치한 일종의 국립양잠소다. 세종 시절 연희궁에 잠실도회를 설치했는데 잠실은 누에 치는 방을 일컫는다. 송파구의 잠실은 도성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잠실로 불렸고, 연희궁에 설치한 잠실은 서잠실로 불렸다. 나중에 서초구 잠원동에도 잠실이 들어섰는데 신잠실로 불렸다.

연희동 주택가

마을버스 서대문04는 궁동산 자락의 연희동 주택가를 운행한다. 주택가를 빠져나온 마을버스는 연희로를 거쳐 성산로에 올라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을 지나고 경의중앙선과 지하철 2호선의 신촌역을 지난다. 그리고 다시 궁동산 자락의 연희동 주택가로 향한다.

서대문04의 미덕은 궁동산 자락 경사진 주택가를 순례하는 데에 있다. 연희로에서 주택가로 들어설 때는 완만했지만 점점 경사가 지더니 ‘서연중학교’ 정류장을 지나면서는 아예 급경사를 이룬다. 마주 오는 차를 기다려 준 마을버스가 다시 출발할 때 출렁이며 뒤로 밀렸다가 출발할 정도다.

서대문04는 연희동의 고지대인 궁동산 근린공원 옆 도로를 운행한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대문04는 연희동의 고지대인 궁동산 근린공원 옆 도로를 운행한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연희동 주택가는 안산과 궁동산이 둘러싼 곳에 들어섰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연희동 주택가는 안산과 궁동산이 둘러싼 곳에 들어섰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종점은 궁동산 등산로, 혹은 산책로 입구에 있다. 산 너머 쪽 도로로 내려가면 홍제천이 나오고 홍제천을 건너면 남가좌동이 나온다. 궁동산 등산로에서 연희동 주택가를 내려다보니 높은 건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연희동이 안산과 궁동산 자락에 들어선 분지 지형임을 잘 보여준다.

마을버스 서대문04는 궁동산 근린공원을 따라 들어선 도로를 운행한다. 그곳에는 1971년에 건축한 연희시민아파트가 있었는데 2000년대 초반 철거되고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근처 정류장에서 한 주민이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분마다 마을버스가 오지만 무릎이 안 좋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마을버스 정보에는 서대문04가 12분 배차라고 했지만, 함께 기다려보니 체감 배차시간은 더 긴 듯했다.

주택가 입구 정류장에서 만난 주민은 “올라갈 때는 언제나 마을버스를 기다렸다가 탄”다고 했다. 1979년부터 연희동에서 살았다는 그는 연희동이 “공기가 맑고 조용해” 살기 좋지만 “경사진 길은 오르내리기가 힘들다”고도 말했다. 

연희동 주택가의 이면도로는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따로 없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연희동 주택가의 이면도로는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따로 없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연희동에는 주택을 개조한 각종 상점들이 들어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연희동에는 주택을 개조한 각종 상점들이 들어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서대문04의 연희동 주택가 노선을 걸어보았다. 경사가 심해 힘들기도 했지만, 보도와 차도 구분이 없어 걷기 힘들었다. 거친 엔진소리를 내며 경사진 길을 오르내리는 차량을 행인들이 알아서 피해야 했다. 연희동에 처음 주택가가 들어설 때만 해도 골목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차량을 위한 이면도로가 되어 있었다. 

서대문04가 지나는 평지 쪽 주택가 이면도로는 번화했다. 도로변 주택을 개조해 카페나 식당 혹은 개성 넘치는 각종 상점이 들어섰다. 그래도 연희동은 조용하고 푸근한 주택가의 정서를 아직은 만끽할 수 있다.

다시 돌아온 봄

연희궁 표석을 확인하러 연세대학교에 들렀는데 새 학기가 됐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로 가득한 대학 캠퍼스,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고, 그래서 반가웠다. 

연세대학교는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교가 합치며 두 학교에서 한 자씩 교명을 따온 것이다. 교명에서 보듯 연세대학교는 연희궁이 있었던 연희동에 세운 학교라는 역사를 지녔다.

지금의 신촌 캠퍼스는 1917년에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그랜트 언더우드의 형제인 존 언더우드의 기부금으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의 대지 19만 평을 교지로 사들인 게 기반이 됐다. 교지가 연희궁터 일대였다는 기록도 있다.

연세대학교 앞 성산로를 지나는 마을버스 서대문04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캠퍼스의 봄 풍경을 배경 삼아 달린다. 

2023년 봄 연세대학교. 새 학기를 맞이한 캠퍼스는 활기차 보였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3년 봄 연세대학교. 새 학기를 맞이한 캠퍼스는 활기차 보였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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