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거부권 1호 법안...야당은 재발의
한층 더 강력해진 새 양곡관리법 개정안

시대가 바뀌면서 농사(農事)의 의미도 달라졌다. 농업 종사자 비율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줄었고, 풍년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다. 국가의 적극적 개입 없이 복잡한 자본 시장 경제에서 농업은 살아남기조차 어렵게 됐다. 다만 농업은 여전히 국민 주권이자 안보이다. 중요성은 과거와 마찬가지지만, 구조는 판이하게 달라진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주식인 양곡(糧穀)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뉴스포스트>가 파헤쳐봤다. -편집자 주-

지난달 13일 여야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5회국회 제4차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돌아온 양곡관리법 개정안 투표에 대한 감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달 13일 여야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5회국회 제4차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돌아온 양곡관리법 개정안 투표에 대한 감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2023년 상반기 국회는 행정부와 전쟁 중이다.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국회는 쟁점 법안 처리 때마다 번번이 정부여당과 맞붙고 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시작이었다. 지난달 4일 윤석열 대통령이 약 7년 만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의 재의 요구에 따라 재표결을 진행했지만,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3분의 2 이상 찬성표를 획득하지 못했다.

최종 부결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 쌀의 초과생산량 또는 예상량이 3~5% 이상이 돼 가격이 급락하거나 급락이 예상될 때 ▲ 단경기(7~9월) 또는 수확기 쌀값이 평년보다 5~8% 떨어질 때 정부는 초과생산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또한 벼 외 타작물 재배 지원 사업을 위한 내용도 담겨 있다. 윤 대통령은 해당 내용이 ‘포퓰리즘’이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다시 발의했다. 30일 기준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후 새 양곡관리법 개정안 3개안이 발의됐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지난달 11일에, 윤준병 민주당이 같은 달 13일에 새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가장 최근에 발의된 안은 지난 25일 윤 의원이 추가로 발의한 안이다. 다만 해당안은 양곡 보관 시설에 관한 내용이 주다.

정의당은 새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여야 합의 과정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의 중재에 따라 변경된 내용이 아닌, 기존 입법 취지를 반영하겠다는 입장이다. 앞서 김 의장은 양곡관리법 개정안 입법 과정에서 여야가 대립하자 중재안을 내놓았고, 실제로 법안에 일부가 반영됐다. 이 때문에 농업계는 내용이 후퇴됐다며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새 양곡관리법 개정안 내용은?

강은미 의원이 발의한 안에는 기존 안에는 없었던 ‘최저가격제’가 포함됐다. ‘최저가격’은 정부가 양곡 매입 시 지불해야 하는 최소한의 금액을 뜻한다. 재료비와 노무비, 운송비 등 소요 비용과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해 정한다. 정부가 양곡을 매입하려면 반드시 최저가격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강 의원 발의안은 정부의 개입 범위가 기존보다 커졌다. 강 의원 안에는 양곡 초과 생산량 또는 예상량이 3% 이상이 돼 쌀값이 급락하거나 하락이 예상될 경우, 단경기 또는 수확기 쌀값이 평년보다 5% 이상 하락한 경우 정부가 최저가격 이상으로 쌀을 매입해야 한다고 명시됐다. 또한 농민이 재배 면적을 조정해 소득이 감소했다고 인정될 경우 소득감소분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지난 28일 천안의 한 논에서 벼들이 자라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지난 28일 천안의 한 논에서 벼들이 자라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윤준병 의원이 올해 4월 13일 발의한 안에는 정부가 쌀값이 평년보다 5% 낮은 경우 정부관리 양곡이나 공공비축양곡을 일반판매용으로 판매하거나 판매하도록 허용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농민이 쌀 생산비보다 10% 높은 가격으로 매입을 요청할 경우 국가가 이를 매입하도록 한다. 쌀 생산비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비는 통계법에 따라 전년도 논벼 생산비 통계자료에 그해 생산비 변동 요인을 반영해 산출한다. 직접생산비에는 종묘비와 비료비, 농약비, 기타 재료비, 농구비, 노동비, 위탁영농비 등이 있다. 간접생산비는 토지용역비와 자본용역비로 나뉜다. 정부가 산출해 그해 9월까지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보고하고, 10월 말까지 고시해야 한다.

원점으로 온 개정안, 국회는 계류 중

행정부의 벽 앞에 막힌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더욱 강화된 내용으로 재탄생했다. 농민 단체가 요구하는 방안들이 담겼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측은 지난 19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최저임금과 같은 성격의 최저가격제 도입과 농업 생산비 보장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강 의원 발의안에는 쌀값 최저가격제가, 윤 의원 발의안에는 쌀 생산비를 보장하는 내용이 각각 포함됐다.

하지만 새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복잡한 입법 과정은 큰 장애물이다. 기존안 역시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까지 6개월 이상이 걸렸다. 또한 원내 제1당인 민주당의 주요 법안들이 아직 남아있다. 민주당은 일명 ‘노란봉투법’이라고 불리는 노동조합법 개정안과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법·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을 두고 정부 여당과 다시 격돌할 전망이다.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는 배진교 신임 원내대표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만나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나 간호법 같은 중요 법안이 거부권에 막혀 사실상 어려워진 상황이라 염려가 크다”며 “그 과정에서도 민주당은 정의당과 긴밀히 협력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양당 간 이견이 크지 않은 민생 법안에 대해서는 협력하기로 했다. 박 원내대표는 “여야 간 협치도 필요하지만, 민주당과 정의당의 협력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는 점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며 “남은 1년간 민생에 꼭 필요한 법안을 정의당과 협력해서 반드시 통과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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