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중건을 위해 자재로 쓰인 경희궁의 전각들
일제강점기 경희궁 터에 들어선 학교와 총독부 관사
서울역사박물관은 물론 인근 동네도 과거 경희궁 영역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광화문이나 서대문 인근의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은 후 즐겨 찾는 장소가 있다. 바로 경희궁이다. 무료로 입장해 궁궐 경내를 둘러보며 머리를 식힐 수도 있고 궐 주위로 조성된 산책로를 걸으며 유산소 운동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희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더불어 서울의 5대 궁궐로 분류된다. 그런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의 관리를 받는 다른 궁들과 달리 경희궁은 서울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또한 사적으로 지정되었어도 경희궁이 아니라 경희궁지(慶熙宮址)라는 명목으로, 즉 궁궐이 아닌 궐이 있었던 터라는 이유로 지정되었다. 궁궐로서 경희궁의 부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희궁은
경희궁은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해 인조 원년인 1623년에 완공됐다. 결국 광해군은 완성된 경희궁을 이용하지 못했다.
경희궁의 크기는 경복궁의 2/3 정도였고 그 영역은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 대부분을 차지했다.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담은 <도성대지도>에 인왕산 줄기를 따라 도성과 돈의문과 붙어 있는 경희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의 한양도성 부분에서도 경희궁은 한양 도심 서쪽 영역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경희궁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는 의미로 서궐로도 불렸다. 같은 맥락에서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로 불렸다. 경희궁은 건립 초기에 서별궁으로 불리다가 경덕궁으로 이름을 정했다. 그러다 영조 시절에 경희궁으로 변경했다.
경희궁이 오늘날 경희궁지가 된 연유는 궁궐이 빈터가 될 정도로 훼손됐고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가 일부 영역만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경희궁의 훼손은 19세기 중엽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고종 시절부터 시작됐다. 경복궁 중건 자재로 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뜯어낸 것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당시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200년 넘게 방치되어 있었다. 경복궁 중건은 1865년(고종 2년)에 시작돼 1868년에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희궁 전각의 90% 이상이 헐렸다. 자료에 따르면, 경복궁 중건 후 경희궁에 남은 전각은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정도였다고 한다.
한양의 궁궐과 도성이 일제에 의해 훼철된 사례가 많아 경희궁도 일제 때문에 훼손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경희궁만큼은 조선시대에 왕실에 의해 전각들이 뜯겼다. 결국, 경희궁은 빈 땅이 되었다. 그 후 경희궁 터는 도성 내 여러 궁궐과 관청에서 경작지로 이용했다.
학교와 관사가 된 경희궁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에는 학교와 관사가 들어섰다. 그 이유는 경희궁 터가 황실 재산이 아닌 국유지였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을 황실 재산, 정확히는 이왕가의 재산으로 인정했지만, 경희궁 터는 국유지로 귀속해버렸다. 그래서 경희궁 터에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와 총독부 직원을 위한 관사가 들어설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해방 후 4개의 궁궐이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문화재로 지정되고, 경희궁지가 서울시에서 관리하는 부지로 선정된 결과와 연관된 건 아닐까.
한편,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은 경성중학교의 교사나 숙소로 쓰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뜯어내 다른 곳에 옮겨가 설치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흥화문이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1932년에 장충동 박문사 정문으로 쓰기 위해 옮겨졌다.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장충단 경내에 지은 사찰이었다. 광복 후 흥화문은 영빈관과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이다 1994년에 경희궁지로 옮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경희궁지 입구에 자리한 흥화문은 제 위치가 아니다. 원래는 구세군회관 즈음에 있었다. 이 건물 앞 ‘흥화문터’ 표지석이 원래 위치를, 그리고 경희궁의 옛 경계를 알려준다. 흥화문이 현재 서 있는 위치는 서울고등학교가 경희궁지에 있던 시절에 정문이 있던 자리다.
서울고등학교는 광복 후인 1946년 경희궁지에 설립된 학교다.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행정적으로 해체된 후 맥을 잇는 듯한 모습이지만 서울고의 공식 개교일은 1946년 3월 5일이다. 서울고등학교는 1980년에 서초동으로 이전했다. 경희궁지 초입의 ‘서울중고등학교터’ 표지석이 옛 학교의 흔적으로 남았다.
서울고등학교가 이전할 때 서울시는 학교 터를 현대건설에 매각했다. 현대건설은 이 땅에 인력개발원 등을 지으려 했는데 유적 훼손에 대한 비판이 일자 서울시는 다시 매입했다. 그리고 옛 전각 일부를 복원했는데 지금의 경희궁지다.
한편, 경희궁 동쪽 영역엔 방공호와 총독부의 일본인 직원들을 위한 관사가 있었다. 지금도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지 사이에 두꺼운 철문의 방공호가 자리하고 있다. 내부 길이가 약 100m에 이층 구조라고 한다. 박물관 측은 방공호를 수장고로 이용하려는 계획이었지만 경희궁지 복원 계획과 맞물려 중단된 상태다.
광복 후에 관사 영역은 여러 필지로 분할돼 민간에 팔렸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이 필지들에 대형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고, 80년대에는 대사관과 출판사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지금도 외국 공관 관련 시설은 물론 미술관이나 각종 재단으로 이용되는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동북쪽 동네가 그곳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영역 또한 경희궁 전각들이 있던 곳이다. 그러고 보면 경희궁은 지금의 경희궁지뿐 아니라 서울역사박물관과 인근 동네까지 포함하는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경희궁지는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광복, 한국전쟁을 거치며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 변화해 왔다. 특히 서울이 팽창하며 확장하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고민을 던져주는 사례가 되었다.
좁아진 경희궁 터 주변으로 조성된 산책로
새문안로의 경희궁지 앞 보도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유독 점심 무렵 경희궁지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대개는 점심시간에 짬을 내 산책하려는 직장인들이다.
궁궐 경내를 둘러보는 이도 있지만 주로 궁궐 외곽에 조성된 산책로 혹은 둘레길을 걷는 이들이다. 특히 둘레길은 평지와 구릉이 잘 조화되어 있다. 경희궁이 인왕산 자락에 들어선 만큼 궁궐 영역의 외곽은 동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경희궁지 둘레길은 평지와 경사지를 함께 걸을 수 있어 유산소 운동을 하기에 좋은 코스다. 무엇보다 산길을 걷거나 숲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3월 어느 점심 무렵 산책로에서 만난 인근 직장인들은 날씨 좋으면 경희궁지 곳곳을 걷는다고 했다.
둘레길 외곽에는 담장이 처져 있는데 그 바깥쪽은 ‘서울특별시교육청’과 ‘국립기상박물관’이다. 두 기관이 들어선 부지 또한 경희궁 영역에 속했다. 이 담장에 작은 철문이 있는데 바깥으로 나가면 ‘국립기상박물관’과 연결된다.
기상박물관 건물은 원래 1932년에 건축한 서울기상관측소 건물이었다. 이곳에는 서울의 개화 시기를 알려주는 10종의 식물, 즉 관측목이 있다. 특히 단풍나무와 벚나무는 기상관측소 건물과 함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러니까 이곳의 꽃나무에 꽃이 피지 않았다면 아직 서울에는 그 꽃이 피지 않은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지난 19일에 국립기상박물관에 가보니 관측목인 진달래와 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서울에 봄꽃이 피었다. 그리고, 걷기 좋은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