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 하기 위해 선택한 직업 ‘여행작가’"

한국여행작가협회 국내 전문 여행작가 200여명 활동중
기억에 남는 여행, 2002년 어린 딸과 함께한 전국일주
아빠와 함께 떠난 여행 덕분에 딸도 일찍 꿈 찾아
“새로운 시도를 한 번 해보자” 늘 도전 위해 노력

▲ (사진=뉴스포스트 최유희 기자)

[뉴스포스트=최유희 기자]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인 이종원 여행작가는 기자에게 ‘여행이 길 위의 학교’라고 말했다. 휴가철이 다가오는 8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에 대한 설렘을 한아름 안겨주는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11년 간 근무했던 회사를 나와 140만원을 들고 5살 난 딸과 함께 떠난 전국일주. 이 여행을 시작으로 이 작가는 서울과 경기,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등 전국 방방곡곡, 더 나아가 해외에 숨겨진 재미난 이야기들까지 독자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단순한 여행지 소개가 아니라 스마트폰의 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현지에 녹아있는 진득한 삶의 내음, 진솔한 사랑과 재미와 감동이 묻어 있는 스토리들을 담고 있는 이 작가의 여행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으면 누구나 혹부리 할아버지가 되어 아이들에게 동화 같은 여행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지난 5일, 이 작가를 만나 여행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고 여행에 대한 설렘과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한국여행작가협회에 대해 소개해주신다면?

“우리나라의 여행 글을 쓰고 있는 전문가 집단이라 보시면 될 거예요. 협회원은 국내외로 한 200명 됩니다. 초반에 전반적인 취지는 ‘우리나라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을 소개하자’였는데, 지금은 해외여행 수요가 많다보니까 국내여행 작가만 뽑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해외여행 작가도 뽑고 있어요. 동시에 국내외 모두 하는 작가도 있고요.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저처럼 강연을 하거나, 방송출연을 하거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여행인솔을 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행작가협회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행작가 학교도 운영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누가 여행작가 되고싶어하는 사람이 많을까’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1년에 2번씩 40명 모집해서 개강하는데 전부 마감이 되더라고요. 그만큼 ‘여행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수요가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무래도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여행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여행작가라는 직업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제가 모 손보사에서 11년 간 근무를 했었어요. 근데 어느 한 순간에 ‘평생 이걸 해야 되나?’ 이런 자괴감이 든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생에 한번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 직업들을 보는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세상을 막 다니는 여행작가인 것 같아서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던 거 같아요.

사표를 내는 것이 솔직히 힘들었죠. 집사람한테 말하면 허락을 안 해줄 거 같아가지고 미리 얘기도 안하고 사표를 냈어요. 그리고나서 말했는데 농담인 줄 알더라고요. 근데 다음 날 출근을 안 하니까 그제서야 비상이에요. 근데 어쨌든 이미 떠나간 거고(웃음).

근데 알고보니 제가 사표 냈을 때, 제가 모시던 차장님이 회사 공금을 가지고 회사의 5억을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을 간 거예요. 저하고는 관계가 없는 줄 알았더니 제가 보증을 섰었던 거죠. 그래서 주택자금 융자 받은 거, 보증 선 거, 다 제하고 나니까 정말 회사를 관둘 때 210만원 현찰을 쥐고 있었어요. 이거 가지고 평생 먹고 살아야 되는데 양심이 있어가지고 그 중에 70만원은 집사람한테 줬고요. 그 다음 남은 140만원 가지고 전국일주를 갔어요. 언제까지? 140만원이 0원이 될 때까지.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았어요.

그래야 새로운 세상에 도전을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 ‘여기서 번 돈을 여기서 털자’ 이렇게 생각을 했던거죠. 근데 만약에 차장님 보증 선 걸 진즉 알았으면 회사도 못 그만 뒀겠죠? 그렇게 여차저차 제가 여행을 가고자 “나 간다”하고 집사람이랑 새벽에 인사를 했는데, 바깥에서 집사람이 엘리베이터를 다시 누르더라고요. ‘내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은 건가?’하고 집사람한테 “왜 열었어?”라고 물었더니, 5살이었던 딸을 데리고 가라는 거예요. 그렇게 5살 딸 정수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어요.

그 때가 2002년도였는데 가장 행복했던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여행을 수도 없이 많이 다니고 해외도 40개국 이상 다녔었는데 가장 배고플 때, 순수 했을 때 떠난 여행이 가장 행복한 여행이 아닐까 싶고요. 지금도 우리처럼 직업으로 떠난 여행보다 직장에서 잠시 짬을 내서 휴가 때 가족들이랑 떠난 여행이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여행을 떠난 지 14일째 되는 날, 경북 안동이었어요. 돈도 다 떨어지고 이제 집에 들어가야 된다면서 자고 있던 정수를 깨웠어요.

“정수야 일어나” “왜?” “내일 이제 엄마 보러 갈거야”라고 했더니 “아빠,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좋아” 집에 돌아가기 싫다는 거예요. 그 때 든 생각이 최고의 사교육, 가장 멋진 사교육은 여행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딸이 일찍 자기 꿈을 찾았어요. 아빠하고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그러다보니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한국 조리고등학교를 들어갔고,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지 않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취직을 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3년만 일하기로 했는데, 자기가 3년 동안 번 돈을 가지고 스페인 유학을 간대요. 스페인 유학간다는 이유도 되게 웃겨요. 제가 작년에 유럽을 50일 다녀왔는데 그 중에서 어디가 제일 맛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스페인이 가장 맛있는 거 같더라. 왜냐면 거기가 이슬람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동양음식이랑 퓨전음식이 되게 많아”라고 했어요. 그게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이유예요.”

수많은 여행경험이 여행작가로서 성공요인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포터들 최고의 기억

▲ 안나푸르나 (사진=이종원 작가)

여행작가가 되신 이후, 첫 책을 냈을 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아~ 그 책도 참 사연이 깊어요. 저는 그래도 예전에 글을 잘 쓰는 줄 알았어요. 그 당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도 하고, 나중에 글 잘 쓴다고 무슨 정식 기자 비슷하게 기자증도 주고 그러더라고요. 3년째 쯤 모 출판사에서 ‘오마이뉴스’에서 기사를 보고 책을 한 번 내자고 연락이 왔어요. ‘아~세상이 이제 나를 알아보는구나’라고 생각했죠.

근데 샘플을 출판사에 보냈더니 연락이 안오는 거죠. 그래서 ‘왜 연락이 안오나’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그 담당자가 도저히 활자로 낼 수 없는 함량미달의 글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때 정말 충격이... 제 일생에서 가장 힘들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아마 시장을 배회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다시 회사로 돌아갈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집사람이 “이왕 한 거 한 번 더 해봐라. 당신의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라는 희망의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새로 시작했죠.

‘글을 다시 배우자’해서 구청에서 하는 수필과정 수필선생님한테 작가라는 말 안하고 새로 배우고, 사진도 동호회나 기존 작가 선배님을 따라다니면서 밑바닥부터 배운 거예요. 그리고 첫 책을 내게 됐는데, 잘 안 팔렸어요. 실패한거죠. 왜 그런가 생각했더니 ‘여행 경험이 부족하다’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미친 듯이 여행을 다녔어요.

이후 두 번째 책과 세 번째 책이 되게 많이 팔리고 반응이 좋았어요. 두 번째 책이 3만5000부, 세 번째 책이 거의 4만부? 두 책들이 반응이 좋았던 이유로는 ‘스토리를 많이 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에는 스마튼 폰 안에 모든 정보가 다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똑같은 내용의 인터넷에 있는 글들을 적어봐야 팔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뭔가 취재를 하면서 정말 재밌는 스토리들을 제 책속에 ‘트레블 스토리’ 등으로 모아서 했던 거 같아요. 이런 것이 사람들한테 책이 재밌다는 생각을 줬고 성공요인이 아닌가하고 생각해요.

이거 전에 적은 책은 우리 가족 이야기를 되게 많이 썼어요. 예를 들면 딸이랑 처음 떠난 여행에서 놀이공원도 가고 경치 좋은 데도 많이 갔었으니까 딸한테 물었죠. “정수야. 아빠하고 14일동안 여행하면서 어디가 제일 좋니?” 하고 물었는데 5살짜리가 청도에 운문사가 제일 좋대요.

그 순간에 우리 애가 유홍준 교수인줄 알았어요. ‘얘를 잘 키워야겠다’ ‘한비야처럼 키워야겠다’ 뭐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근데 궁금하잖아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물어봤어요. “너 왜 운문사가 좋은데?” 물으니 제가 여행지 갈 때마다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뽑아줬는데 운문사에 있는 코코아는 빨대가 같이 나온다는 거죠. 그 얘기 듣는 순간 (웃음) ‘아~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의 시선들. 이런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보자’라고 생각했고 그 책이 바로 이 책(대한민국 숨겨진 여행지 100)이에요. 이 책을 통해서 한국관광의 별 장관상을 수상했어요.

아마 여행작가로서는 가장 큰 상이 아닌가 싶고요. 그 다음에 이걸로 이제 또 한 책이 있는데요. 그 책은 해외여행서예요. 새로운 시도를 한 번 해보자 해서 해외여행서까지 냈어요. 늘 그렇게 도전했던 거 같아요.”

자유롭게 여행만 하는 것과 작가로서 글로 풀어내는 것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여행이 가장 행복했을 때는 부담 없이 떠난 여행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근데 여행작가는 결과물을 내야 돼요.

여행정보들은 우선 되도록 현장에 가서 현장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죠. 독자들이 개인적으로 가도 볼 수 있는 안내판 그런 이야기들 말고 그 내면의 사람 이야기들을 하고,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한 번 해보자하는 생각이 있어요. 남들이 생각지 못한 글과 사진, 정보들을 막 캐야 되고 일 때문에 가는 거니까 여행이 솔직히 재미가 없죠.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외부에서 보면 ‘너는 참 여행 다니면서 글 쓰고 돈 벌고 얼마나 부럽냐’ 뭐 이렇게 얘기 하는데, 제가 직장 다니는 것보다 일의 강도는 2배 정도 더 센 거 같아요, 그만큼 정신적인 고통, 그 다음에 창작에 대한 고통 등 글이 안 될 때가 되게 많거든요. 그런 게 제일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다보니 슬럼프도 있죠. 예전에 정말 잘 쓸 때에는 하루에도 4-5글씩 썼어요. 요새는 한번 안 쓰기 시작하니까 쓰기가 싫어요. 솔직히 지금이 슬럼프인거죠. 빨리 슬럼프에서 벗어나야하는데 그럴수록 여행을 떠나는 게 슬럼프 극복 방법이에요. 취재하러 떠나고, 글 안 될 때 떠나는거죠.

주변에서 ‘너 여행작가 그만두면 뭐할거냐’고 물어보기도 해요. 그럼 저는 ‘여행작가 그만두면 부담없이 여행을 떠나야지’라고 말해요(웃음)”

수많은 여행지를 다니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꼽으신다면?

“‘니가 다녀온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아’라는 질문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다녀온 수많은 곳들 가운데 한 곳을 꼽으라면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가 생각나요. 8000미터의 고봉을 바라보면 ‘이때껏 인생을 아등바등 살았나’라는 생각도 들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저는 8000미터 고봉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히말라야 주민들인 포터들인 것 같아요.

히말라야에서 저희 일행 중 한사람이 고산증에 걸려서 3분의 2 지점에서 쓰러졌어요. 설사가 난거예요. 100도씨에서 끓어야하는데 60-70도에서 끓으니 위아래에서 난리가 난거예요. 그래서 ‘너는 여기 있어라. 우리가 정상 다녀오면 좀 나을거다’해서 올라간 뒤에 무전을 쳤는데 더 심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헬기를 부르려고 했더니 500만원인가 달라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했죠.

그 지역이 대나무가 많은 곳, ‘벤부’라고 하는 곳이었어요. 근데 우리가 신경도 안 썼던 포터들이 그 환자 일행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대나무 가죽을 잘라서 짐 나르는 것을 만들더니, 우리가 3일 걸린 그 거리를 딱 하루 만에 내려갔어요. 머리랑 이마에다가 무게중심 잡고 사람을 싣고 내려가서 우리 일행을 살린 거예요.

포터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해서 일정 마지막날 저희가 염소를 잡아서 대접했어요. 근데 그걸로도 부족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존경의 표시가 뭘까’ 고민하다가 제가 마이크를 잡고, 통역하는 사람한테 “한국에서는 상대방에서 가장 존경하는 표시는 큰절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너무 고맙기 때문에 큰절을 받치겠다”해서 마지막 날 같이 춤도 추고 큰절도 했어요. 포터들은 처음 큰절을 받아봐서 쑥스러운지 얼굴을 돌리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저는 이때까지 한 여행들 가운데 포터와의 만남이 가장 멋진 만남이 아니었나 싶어요. 우리가 혼자만의 오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여행. 그래서 제 책에도 썼어요. 히말라야의 진정한 구도자는 포터다. 이런 것들도 충분히 글감이 되고요, 여행전문가들보다도 자신의 여행경험들 이런 것들이 독자들에게 더욱 감동을 주지 않나 싶어요.”

“돈은 많이 못 벌지만 하고 싶은 일 하니 즐거워”
세상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색다른 것을 보는 것이 큰 배움

▲ 실크로드 둔황 (사진=이종원 작가)

그렇다면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좋은 점을 꼽는다면?

“우선은 여행작가도 그렇고 여행작가협회도 그렇고 돈은 못 벌어요. 근데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 그래서 저는 제 일이 너무 즐거워요. 세상에 좋은 것들, 아름다운 것들, 맛있는 것들 이런 것들을 접하고 그런 새로운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사 역할도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보람을 느껴요. 보람과 긍지가 없이 여행작가를 직업으로만 느꼈으면 진즉 그만뒀을 것 같아요.”

여행작가로서 앞으로 어떤 여행을 꿈꾸세요?

“스토리가 묻어있는 여행 있잖아요. 여행작가의 소명이 그런 것 같아요. 남들 다 아는 거 이야기하는 것보다 남들이 가지 않는, 뭔가 색다른 여행지, 스토리가 가득한 여행지를 모아서 국내 도서를 하나 더 내보고 싶어요.

해외여행으로는 우리가 지금 세계화를 많이 외치잖아요. 국내와 마찬가지로 재미난 이야기들, 한국과 관련된 세계여행지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 것들을 골라서 한번 쓰고싶네요.”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 여행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제가 만난 인어공주 가운데 가장 못생긴 인어공주가 있어요. 전북 부안 격포해수욕장 바위 위에 앉아있는 노을공주예요. 근데 정말 못생겼거든요? 제가 그래서 부안구청에다가 전화를 걸었어요. “어쩜 이렇게 못생기게 만들었어요?”라고 민원을 제시했는데 몇 시간 후에 담당 공무원이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아줌마를 모델로 만든 인어공주예요”라고 하는 거예요. 전 놀랐죠.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행할 때 눈에 보이는 것만 봐요. 근데 노을공주처럼 숨겨진 내면의 스토리와 깊은 뜻을 보면서 여행하면 굉장히 흥미롭고 재밌어요. 독자들도 작가들도 우리가 가는 여행지의 숨은 뜻을 보고 알려고 노력하면 좋지 않을까요.

요즘 아이들의 가장 힘든 점이 자기 꿈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대학 들어갈 때까지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까지 자신의 적성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대다수에요. 그러다보니까 너무 힘들어하고 벅차하는 거 같아서 좋아하는 일을 빨리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거 같아요.

근데 그런 것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세상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색다른 것을 보고나면 분명히 ‘자기가 뭘 해야 될지’ 이런 것들이 서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고요. 저는 뭐 스펙 쌓는다고 외국어 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시간에 국내 배낭여행을 가든 해외 배낭여행을 가든 그렇게 떠나는 것이 훨씬 좋지 않나 생각해요.”

 

▷이종원 여행작가는?

-1966년생, 서울 출생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무역대학원 졸업
-2011년 청와대 ‘대한민국 가볼 만한 여행지’ 강연
-2012년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 원고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 수록
-2012년 ‘한국관광의 별’ 단행본 부문 대상 수상
(저서) <우리나라 어디까지 가봤니? 56> <한국인에게 더 특별한 세계여행지> 등 다수

-현) (사)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
-현) 여행 동호회 ‘모놀과 정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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