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도 엘레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 오르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新 복합 문화 공간
돈벌이·유명세보다 ‘하고 싶은 것’ 실현에 보람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골목. 2018.05.24. (사진=김나영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골목. 2018.05.24. (사진=김나영 기자)

[뉴스포스트=김나영 기자] 을지로는 투박한 노동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서울 중구 을지로 3가에는 인쇄소, 기계부속품, 공구, 철물, 조명 상가가 모여 있다. 산업화를 상징하는 물성을 지닌 것들이다. 상가 안에서는 인쇄 기계가 새로운 출판물을 찍어내느라 귀를 찢는 소리와 매캐한 냄새를 만들어 내고, 바깥에선 을지로에서 생겼을 법한 주름살이 진 중년 남성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관계자 외 접근금지’라고 못 박아 둔 것도 아니건만 가벼운 호기심으로 구경하기엔 어려운 아우라가 있다. 뚜렷한 목적 없이 을지로를 방문하는 일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저녁이면 을지로도 넥타이를 푼다. 노가리골목, 골뱅이골목 혹은 대로변 뒤 실핏줄같은 먹자골목 등지로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려는 노동자들이 찾아오면서 긴장이 느슨해지고 목소리가 커진다. 여기까지가 익히 알아온 을지로다.

 

네이버 데이터랩 '을지로' 검색결과 (2016.01.01~2018.05.27) (사진=네이버 제공)
네이버 데이터랩 '을지로' 검색결과 (2016.01.01~2018.05.27) (사진=네이버 제공)

“여기 혹시 ‘십분의 일’이 어디인지 아세요?”

지난 24일 오후 4시 을지로 골뱅이골목에서 수표로로 이어지는 길목. 인쇄소에서 막 나와 종종걸음치던 이근식(56·남)씨는 기자의 질문에 익숙하다는 듯 골목 끝을 가리켰다. 이씨의 손가락 너머에는 온통 인쇄소 뿐 찾던 와인바는 없었다. 머뭇거리는 기자에게 이씨는 “저쪽으로 쭉 더 가야혀”라며 손짓으로 자신을 따라오라고 일렀다.

이씨를 따라가는 골목에 젊은 남녀 한 쌍이 눈에 띄었다. 둘은 핸드폰에 코를 박았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여기가 맞나?”, “내가 저쪽이라고 했잖아” 두 사람에 가까워지자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을지로에 처음 놀러왔다는 한성진(25·남)씨는 “SNS에 을지로가 많이 올라와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며 “요즘엔 모바일 지도에 가게마다 상호명이 나와 있어 길 찾기 쉬웠는데 여기는 숫자만 나와 있는데다가 건물들이 붙어 있어 한참 헤맸다”고 말했다.

모바일 지도가 현위치를 가게 앞이라고 깜빡여도 우려는 계속됐다. 외부인이 편히 들어갈 만한 밥집이나 술집, 찻집이 도통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드나들기 쉬운 1층 통유리나 시선을 끄는 간판은 을지로에 없다. 홍대나 강남, 이태원 등 여느 번화가처럼 지나가다 우연히 방문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건물 안 계단에 사람들이 줄지어 선 것을 보고서야 "여기가 거긴갑다"하고 뒤에 설 뿐이다.

줄 끄트머리에 선 박 모(33·여) 씨는 "찾아오는데 힘들긴 했지만 마냥 힘들기보다 찾는 재미가 있었다"며 "해리포터가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을 찾아가는 기분이 이랬을까 싶다"고 말했다.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은 해리포터가 소위 머글이라 불리는 일반인 세계에서 마법사 세계로 이동하는 통로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벽에 불과해 일반인들은 그곳이 승강장인지 모른다.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의 존재를 아는 마법사만이 과감히 벽으로 돌진해 마법사 세계로 갈 수 있다.

아는 사람만 오던 을지로에 새로운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 을지로 곳곳에서 간판도 달지 않은 채 시작한 장사가 입소문을 타면서 '새로운 것'을 찾는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호텔 수선화', '잔', '을지로 미팅룸', '서울털보', '십분의일' 등이 SNS를 중심으로 을지로를 알리기 시작했다. 을지로가 단지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가들이 모여 새로운 역사를 쓰는 모습도 젊은이들의 구미를 당겼다.

을지로에 대한 관심은 검색 통계로도 나타난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따르면 ‘을지로’ 검색 건수는 2016년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해 2018년부터 눈에 띄게 상승하는 곡선을 보였다. 데이터랩 그래프는 네이버에서 해당검색어가 검색 및 클릭된 횟수를 일별로 합산해 조회기간 내 최대 검색량을 100으로 표현하여 상대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검색어를 '을지로 맛집'으로 바꾸면 변화는 두드러진다. 2017년 5월까지 일일 검색량이 최대검색량의 10%에서 20%를 웃돌았으나 올해 4월 30일 정점을 찍고 최근에는 매일 최대검색량의 70%이상이 검색되고 있다.

 

서울 중구 을지로 3가에 위치한 갤러리 'OF' (사진=김나영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 3가에 위치한 갤러리 'OF' 2018.05.24. (사진=김나영 기자)

저렴한 임대료에서 가능성을 찾다

을지로에 새로운 바람이 들어선 것은 최근 5년 사이의 일이다. 도심 공동화로 을지로에 빈집이 늘어나자 서울 중구는 2015년부터 재생사업을 펼쳤다.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중구는 청년예술가를 공모해 빈 점포를 작업공간으로 사용하도록 임대료를 일부 지원했다. 현재 ‘슬로우 슬로우 퀵퀵(Slow Slow Quick Quick)’, ‘퍼블릭쇼(Public show)’, '새작업실‘, 'R3028', ’을지로움‘, ’산림조형‘, ’써클활동‘, ’이현지 을지로 기록관‘이 참여 예술가로 활동 중이다. 이 외에도 ’예술 기획집단 개방회로‘, ’1인 갤러리 빠빠빠탐구소‘ 처럼 을지로에 입주한 예술가, 기획자, 창업가 등이 100여명에 이른다.

청년들은 을지로의 저렴한 임대료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올해 1월 을지로 3가에 술집 '감각의 제국'을 연 흥건(38) 씨는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망원동, 연남동 일대도 살펴봤지만 이미 권리금이 높이 책정돼 있었고 대규모 프랜차이즈가 입점한 경우도 있었다"며 "이미 완성된 곳이 아니라 마음껏 색깔을 만들어보고 싶어 을지로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3월부터 을지로 3가에서 갤러리 'OF'를 운영한 오웅진(28) 씨는 "돈은 없지만 하고 싶은건 많은 젊은이들이 을지로에 많이 모이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월세 때문"이라며 "용산도 재개발됐고, 종로·피맛골도 정리돼서 을지로는 얼마 안 남은 동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쪽에서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많이 하는데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며 "여기까지 개발돼버리면 어쩌나 조여오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을지로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위협이 다른 곳보다는 덜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을지로에서 인쇄소나 철물점 등을 하는 상인들은 대부분 60년대부터 생업으로 삼아왔기에 가게를 닫거나 옮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주도 임대료를 받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다. 10년 전부터 을지로가 재개발 지역으로 거론되면서 을지로 건물들이 곧 헐릴 것이라 예상하고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조합원들끼리 모여 보상금을 얼마 받을 수 있을지 논하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인쇄업, 제조업 등 업계 자체가 쇠락하면서 가게를 접는 곳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접근성이 좋다는 것도 을지로의 장점이다. 서울의 한가운데 위치해 종로 일대에서 일하는 직장인은 물론 대학생이 밀집한 신촌, 주거지인 한남동 등 어디에서도 쉽게 을지로를 찾을 수 있다.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다가 재료를 구하기도 쉽다. 전시 등을 앞두고 주변 철물점 주인 등 기술 장인들이 찾아와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감각의 제국' 2018.05.24. (사진=김나영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 3가에 위치한 '감각의 제국' 2018.05.24. (사진=김나영 기자)

모호한 새로움, 을지로만의 色 만들다

을지로에 위치한 상가들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 을지로 3가역 10번출구 인근에서 운영하는 ‘감각의 제국’은 과거 ‘남성힐링샵’이라는 이름의 대딸방이었다. 방 세 개로 나뉘어 있던 건물 한 층을 허물었지만 세면대나 창문 등 기존 인테리어를 살려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술과 안주를 팔지만, 주말이면 클럽처럼 춤을 추고, DJ나 댄스 등 문화강연도 연다.

을지로 3가의 터줏대감 '양미옥' 뒷골목에 있는 갤러리 ‘OF’는 을지로 노동자들이 세들어 사는 옥상 단칸방이었다. 각각 영상, 사진, 음악을 전공한 세 청년이 작업실을 얻으러 을지로를 찾았다가 옥상이 논다는 건물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전시관을 차리게 됐다. 단칸방 네 개에 각기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다. OF를 운영하는 오웅진(28) 씨는 “전시를 하지만 전시관이라 정의 내리기엔 음료를 팔고, 주스와 맥주를 팔긴 하지만 카페라 하기도 어렵다”며 “기존에 없는 새로운 개념의 장소를 만들어 보자는 의도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을지로에서 운영하는 카페 ‘호텔 수선화’, ‘물결’, ‘커피사 마리아’, ‘skyfish', 'mwm' 등은 방문객에게 커피를 팔지만 주인이 작업실로 쓰는 곳이기도 하다. ‘백두강산’은 카페지만 작품 전시도 한다.

을지로에 모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을지로에서 독특한 색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을지로가 더 알려져 손님이 늘었으면 좋겠다거나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을지로를 지키면서 하고 싶은 것을 실현하는 데 더 큰 의의를 둔다. OF를 운영하는 오 씨는 “독일이나 유럽에는 갤러리로 치면 3부리그나 4부리그가 있는 느낌이라면 우리나라같은 경우는 서울의 북카페 아니면 바로 갤러리”라며 “이렇게 허름한 건물 옥상 단칸방에 유명 작가들이 올 것도 아니고 전시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공간이 없어 하지 못했던 동시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을지로 상가들 중에서도 후발주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을지로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게 50년씩 세금 따박따박 내면서 자식 길러온 사람들을 타자화시키는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며 “기존에 이런 대안공간에 대한 니즈가 있었는데 그걸 실현시키고 눈으로 확인한 데에서 사람들이 쾌감을 느낄 뿐이라 보고 기성세대에 작은 울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각의 제국’을 운영하는 흥건 씨도 “아직 장사를 시작한지 3개월밖에 안 된 시점에서 을지로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는게 조심스럽다”면서도 “을지로에는 자신만의 취향을 살려 다양한 색을 보이려는 시도가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향후 패션 사업에도 도전하고 싶다”며 “이 곳이 하고 싶은 것들을 실현하는 베이스캠프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올해 3월 중순에는 을지로의 변화 양상을 다룬 책 '다시, 을지로'가 출판되기도 했다. 저자 김미경은 '다시, 을지로'에서 “을지로의 청년들 대부분은 퇴사한 경험이 있다”며 “경제 활동이 가장 활발한 나이의 퇴사는 단순히 직장을 그만두는 것 이상의 함의를 가진다”고 썼다. 그는 “을지로의 청년들은 맹목적으로 돈만을 좇는 삶으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시도하면서도 적정 수준의 형제활동을 수반하는 삶을 영위한다”며 “사회에서 청년 세대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영웅적이고 거대한 성공보다는 스스로가 원하는 가치를 각자가 가진 자원과 조건으로 시도함으로써 삶의 행복을 실현해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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