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上] 한국전쟁 피해유족 "국군은 용서해도 정권은 용서못해"
[인터뷰上] 한국전쟁 피해유족 "국군은 용서해도 정권은 용서못해"
  • 이별님 기자
  • 승인 2019.06.24 14: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전쟁 학살 100만...유족, 연좌제 고통
가해자는 누구인가...'인류의 양심' 어디에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전쟁 후 유족들의 삶은 말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요즘에는 영어로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마음고생이 말도 못 합니다. 자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나죠. 아버지 마지막 순간에 틀림없이 그놈들이 '쏜다! 쏜다!'라 했을 거예요. 그 순간이 어떻겠습니까!"

(사진=이별님 기자)
(사진=이별님 기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국군 장병 등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현충일(6일),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진 동족상잔의 비극을 기억하는 한국전쟁 발발일(25일)이 있는 6월은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로 불린다. 호국보훈은 나라를 지키거나 이를 위해 힘쓴 사람들의 공훈에 보답한다는 의미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목숨을 바친 '선량한' 호국영령들은 적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 반면 이들의 희생과 애국심을 기린다는 국가는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당시 무고한 민간인들을 향해 광기에 가까운 총질을 해댔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이면으로 자리 잡게 됐다.

전후 세대는 당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 규모와 잔인성 등을 상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교과서나 언론 매체 등을 통해 파편적으로 접했을 뿐이다. 본지는 전쟁과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보도하고자 한국전쟁 발발 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 18일 한국전쟁유족회(이하 '유족회') 김복영 회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국 나이로 올해 70인 김 회장은 1950년 음력 11월 한국전쟁 발발해에 충북 충주시 살미면에서 태어났다. 김 회장은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민간인 학살로 가족을 잃은 김 회장으로부터 본지는 한국전쟁 당시 자행된 반인륜적 전쟁 범죄들에 대해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남은 자들의 삶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한살에 불과했던 김 회장에게 전쟁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이를 전해 들었다는 김 회장은 아버지의 정확한 기일을 모른다. 김 회장의 아버지는 1950년 음력 5월 18일 우리나라 경찰들에 의해 끌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아버지가 끌려간 지 약 6개월 만에 김 회장이 태어났다.

김 회장은 아버지가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희생됐다고 밝혔다. 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이승만 정권이 좌익 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 고안해 낸 좌익 포섭단체다. 보도연맹 가입은 좌익에서 전향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농민으로 좌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당시 마을에서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생활 수준이 나아진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단체에서 밀가루나 호밋자루 하나라도 준다는 말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니까 아버지는 물론 동네 사람들 약 10여 명 정도 가입했다"며 "보도연맹이라는 데가 정확히 어떤 단체인지도 모르고 도장을 찍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당시 일부 관료들은 좌익 전향 성과를 목적으로 쌀 등 물자를 주면서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정부는 보도연맹 회원들이 북한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전국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유족회는 대략 30만 명으로 추산한다. 김 회장의 아버지도 이 같은 상황에서 희생됐다.

김 회장은 "당시 학살 집행자의 증언에 따르면 충주시에서 500명에서 1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며 "충주시에는 10여 개의 면이 있다. 우리 면에서만 78명, 우리 마을에서만 12명이 학살당했다는 통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정확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희생자 수가 더 많을 수 있다는 단서를 덧붙였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은 김 회장의 성장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그가 8살이 되는 해 어머니가 전쟁 후유증 등으로 사망했다. 그는 "부모님이 안 계시다 보니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말도 못 하며 지냈다"며 "식사라는 건 생활 수준 이하였다. 교육도 거의 못 받았다. 지금으로 빗대면 제일 어려운 형편에서 산 거다"라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성장하고, 사회에 나간 이후부터였다. 그는 "내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때 외할머니가 (아버지 죽음에 대해) 샅샅이 말씀해주셨다"며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 외할머니는 이후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에 술을 말도 못 하게 드셨다"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던 고인을 회상했다.

한국전쟁유족회가 공개한 피켓 일부. 대전 산내학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한국전쟁유족회가 공개한 피켓 일부. 대전 산내학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114만 희생자와 1천만 유가족

보도연맹 회원을 대상으로 한 민간인 학살은 충주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4·19 혁명 직후 조직된 유족 단체는 한국전쟁 기간 114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81년 국방부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3개월 동안 남한 측 민간인 106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다만 민간인 학살 피해자라는 단서는 달지 않았다.

114만 명이란 어마어마한 숫자의 학살 피해자. 김 회장은 학살 피해자 유가족만 해도 1천만 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라졌는가. 김 회장은 전국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됐다고 설명했다.

김 화장은 "제일 대표적인 사례가 대전 형무소 학살 사건이다. 산내면 골령골로 재소자들을 다 끌어다가 학살했다"며 "그 자리에서 7~8천 명을 죽였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일명 '대전 산내 학살'은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중순 사이에 일어났다. 경찰과 군인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 수는 최대 7천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보도연맹 회원과 좌익 사범, 재소자 등이 있었다.

그는 "재소자 중에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억울하게 잡힌 이들도 있었다"며 "설령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법에 따라 형벌을 내려야 했다"고 말했다. 골령골에서 죽어간 이들은 실제로 어떤 법적 절차도 밟지 못한 채 우리나라 군경으로부터 무참히 살해됐다.

아울러 김 회장은 산내 학살 외에도 경북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1950년 7월 중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 자행된 학살도 언급했다. 여기에서는 대구 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 회원 등을 포함한 1,800명 이상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학살됐다. 

김 회장은 "그 외에도 '부역 혐의 학살'이 있다. 인민군 점령기 때 이들의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며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어떻게 그 사람들 말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총을 들고 밥을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말이다"라고 전했다. 이어 "이때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복종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부역 혐의로 학살당했다"며 "그래서 114만 명이나 된 거다"라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김 회장은 산내 학살,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부역 혐의 학살 등 우리나라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언급했다. 반대로 인민군과 중공군이 저지른 학살은 없었던 것일까. 김 회장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유족들의 증언을 들었을 때 90% 이상이 우리 국군 내지 경찰이 학살 가해자였다"며 "인민군과 중공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아주 없는건 아니지만, 극히 드물었다"고 증언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 후 남겨진 유족들의 삶은 처참했다. 김 회장은 "전 유족회 회장이 전남 함평 사람이었다. 그분이 옆집에 놀러 간 사이에 가족들이 희생됐다"며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옆집 울타리를 통해 자기 집 마당을 보니까 부모님과 조부모님 등 여덟 식구가 사망했다. 그냥 세워놓고 준비도 없이 쏴버렸다. 그 트라우마는 말도 못 한다"고 증언했다.

김 회장은 "요즘에는 영어로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마음고생이 말도 못 한다"며 "자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난다.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그놈들이 '쏜다! 쏜다!'고 말했을 거 같다. 그 순간이 어떻겠냐"라고 말끝을 흐렸다.

피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족들에게는 그림자처럼 연좌제가 따라붙었다. 반공주의에 기반한 꼬리표였다. 김 회장은 "공무원이 되거나 공공기관에 취직하려면 1, 2차에선 합격을 시켜놓고 그다음엔 떨어진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말이다"라며 "응시는 가능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거절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전쟁 때 가족이 (학살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나오면 남아있는 가족들까지 불이익을 당한다"며 "유족들은 '학살 피해자 유족'이 아니라 '빨갱이 자손'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유족회가 공개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장면. 유해와 함께 탄피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진=이별님 기자)
한국전쟁유족회가 공개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장면. 유해와 함께 탄피로 추정되는 물체가 선명하게 보인다. (사진=이별님 기자)

반성도, 처벌도 없었다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고, 그의 가족들까지 트라우마와 연좌제 등 이중·삼중의 고통을 안겨준 가해자들은 누구일까. 김 회장은 1950년 충주에서 학살을 집행한 이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고백했다. 당시 군인 신분이던 김모 씨다.

김 회장은 "총을 들고 사람들을 학살한 김씨는 현재 지금도 살아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씨가 몇해 전 우리 고향에 찾아와 충주 유족회 몇 사람을 모아놓고 자신이 이곳에서 500명에서 1천 명을 학살했다고 고백했다"며 "공식적인 사과는 아니지만, (현장에 있던) 유족들에게 말로 사과했다"고 전했다. 다만 김 회장은 김씨와 직접 만난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학살에 관여한 가해자가 피해 유족들을 찾아 과오를 고백하고, 사과한 사례는 이례적인 일이다. 김 회장은 "마을까지 찾아와 유족들에게 직접 사과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며 "김씨와 직접 만나고 싶지만, 지금은 나이가 너무 많아 말도 제대로 못하신다고 한다"고 말했다. 비록 말뿐이지만, 사과한 가해자에 대해 유족들은 더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김 회장은 "김씨도 위에서 지시를 받고 한 것이지, 자기 스스로 학살을 한 게 아니다"라며 "다른 유족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를 포함한 충주 유족회 일부 회원들은 김씨가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간접적으로나마 학살 집행자로부터 사과를 받은 김 회장이 진짜 분노하는 가해자는 따로 있었다. 당시 학살을 명령하고, 방조한 윗선이다. 정부가 무고한 자국의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이유는 무엇인지 상식을 견지한 인간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김 회장은 이유를 이승만 정권의 야욕이라고 봤다.

김 회장은 "정상적인 정치인은 정치를 잘해 국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지지하게 만드는데, 당시 정권은 그게 아니었다"라며 "(학살하면) 겁먹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른다고 생각한 거 같다. 독재 정권으로 가는 방법밖에 모르는 거 같다"고 말했다. 자신에 동조하지 않거나, 동조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게 당시 정권의 통치 방식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114만 명이 학살당했다. 이게 전쟁을 하는 것이냐"며 "전사한 군인보다 우리나라 군인과 경찰이 죽인 자국민이 더 많다. 세금으로 무기 사서 우리나라를 지키라고 했더니, 자국민을 죽였다. 이게 정권의 야욕이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의 분노는 반세기가 훌쩍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학살의 '진짜' 가해자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거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김 회장은 제대로 처벌을 받은 가해자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도리어 가해자의 '학살 만행'이 '공비 토벌'이라는 공적으로 세탁됐다는 것이다.

그는 "경북 문경 석달리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어린이나 부녀자 할 거 없이 총질해댔다"며 "이 마을 사람만 86명이 죽었는데, 관련자들이 공비 토벌을 했다며 포상이나 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전남 함평, 해남, 영광, 나주 등지에도 이런 일이 많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는 학살을 집행한 김씨와 당시 정권이었다. 하지만 두 가해자의 태도 정반대였다. 김 회장은 "우리 아버지는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김씨 만큼은 법적 처벌을 안 하는 것도 괜찮겠다"면서도 "하지만 당시의 정권이나 숨은 가해자들은 죄가 밝혀질 시 사망했다고 해도 법정에 세워 사실을 묻고 싶다. 그게 유족의 마음이다"라고 전했다.

이별님 기자 leestarnim@nate.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