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 못 한 학살 多...감춰진 미군 범죄
정부·국회 지지부진..."과거사법 개정하라"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어떻게 된 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부분 가난해요. 그런데 친일 세력들은 다 잘 살아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유족들, 피를 본 사람들은 전부 다 가슴을 못 펴고 삽니다. 그런데 가해자들은 지금 얼마나...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김복영 한국전쟁유족회 회장이 유족회를 상징하는 깃발 옆에 서 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김복영 한국전쟁유족회 회장이 유족회를 상징하는 깃발 옆에 서 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한국전쟁 당시 114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우리나라 군경 등에 의해 학살된 비극의 역사는 끝나지 않고 계속됐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과 학살·전쟁 트라우마는 물론 공공기관 취업 불이익 등 연좌제 고통까지 안고 반세기 가까이 살아왔다. 하지만 유족들이 처음부터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 4·19 혁명의 바람이 분 후 유족들은 같은 해 10월 한국전쟁유족회(이하 '유족회')의 전신인 전국유족회를 결성하고, 한국전쟁 당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제4대 국회에서는 1951년 2월 경남 거창에서 벌어진 일명 '거창 양민학살' 등이 폭로되는 등 정권의 민간인 학살 만행 증언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진실규명 촉구 목소리는 전쟁 발발 10년이 지나서야 나오기 시작했지만, 역사는 유족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유족들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유족회 관련자들은 북한과 연결돼있다는 오명을 쓰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대구유족회 이원식 대표위원은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으나, 집행되지는 않았다. 그는 2011년 재심에서 사형 선고 50년 만에 무죄를 받으면서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군사 정권 기간 전국유족회는 사실상 와해됐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금기시 됐다. 유족들에게는 침묵이 강요됐다.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지역유족회와 시민사회계가 민간인 학살 피해 문제를 다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들의 노력은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를 이끌어내면서 결실을 보았다.

과거사위는 114만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을 풀어줬을까. 풀어주지 못했다면 유족들이 현재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 본지는 이달 18일 진행됐던 한국전쟁유족회 김복영 회장으로부터 과거사위 진상규명 활동 및 유족들의 바람 등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유족회 사무실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연도별 자료가 놓여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한국전쟁유족회 사무실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연도별 조사보고서가 놓여있다. (사진=이별님 기자)

유족 한 풀기엔 너무 짧았던 5년 

과거사위는 2005년 12월부터 2010년 12월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까지 약 5년간 활동했다. 구체적인 성과도 있었지만, 114만 명 규모 민간인 학살 피해를 규명하는 데에는 활동 기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실제로 김 회장의 아버지가 희생됐던 1950년 충북 충주 일대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을 하지 못했다. 김 회장은 "진상규명이 100분의 1 정도 됐을까 싶다"며 "다수는 진상규명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과거사위 활동에 대한 홍보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과거사위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과거사위가 있다는 건 어디서 들었지만, 나와 관련된 줄 몰랐다. 나는 물론 우리 고향 근방에 수많은 유족이 아무도 몰랐다"며 "정부 차원에서 홍보를 대대로 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김 회장은 자신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인지도 모르는 유족들도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과거에는 나도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신지만 알았지, 그게 민간인 학살 문제와 관련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며 '민간인 학살'이란 역사적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짧은 활동 기간과 홍보 부족만이 과거사위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니다. 김 회장은 "후손들이 과거사위에 피해 신고를 할 수 있는 것이지, 죽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한다"며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에는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전국의 피해 유족을 만나보면 '어떤 집은 흔적도 없이 싹 다 죽었다'라는 증언을 듣기도 한다"며 "후손도 연고도 없이 모든 식구가 학살되면 신고도 못 한다"고 설명했다.

부족하지만 의미있는 성과가 나오기도 했다. 과거사위는 5년간 1만 1,175건을 신청받아 8,450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528건은 '진실규명 불능', 1,729건은 각하 처리했다. 김 회장은 "성과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일부 유족들이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며 "어떤 유족 분은 결정서 종이 한 장을 아버지 산소에 모셔놓기도 했다. 그 심정은 말도 못 할 정도란다. 조금은 후련하다고도 하시더라"라고 말했다.

숨은 가해자, 미군 범죄

과거사위에서 진상규명 결정을 받지 못한 사례는 우리나라 군경에 의한 학살뿐만 아니라 미군이 저지른 학살 범죄도 있었다. 김 회장은 "미국은 어떻게 보면 좋은 나라 같지만, 한국전쟁 당시 상당히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며 일명 '노근리 양민학살' 등 미군에 의한 전쟁 범죄를 언급하기도 했다.

미군은 1950년 7월 중하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에 피난민들을 모아놓고 기관총을 발사했다. 또 굴다리로 숨어든 민간인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 최소 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2001년 미국 클린턴 정부는 노근리 양민학살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을 향해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낸 바 있다.

김 회장은 "노근리 사건은 잘 알려져 있지만, 곡계굴에서 일어난 학살도 있다"며 "1951년 1월 여기서도 300명 이상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도 나고 춥고, 먹을 것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 사람들은 굴에 들어가서 피난했다. 그럼 좀 따듯하고 좋다"며 "거기 있는 사람들이나 굴에서 나오려는 사람들을 미군들이 기관총 등으로 다 죽였다"고 설명했다.

1951년 1월 중하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곡계굴에서는 폭격을 피해 굴로 피신했던 주민들과 피란민 수백 명이 미 공군의 동굴 폭격으로 학살됐다. 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이를 피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사람들은 미군의 총 등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회장은 단양 곡계굴 사건은 단순한 오폭 사고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오폭은 절대 아니다"라며 "적군하고 싸우다 방아쇠를 잘 못 당기면 그게 오폭이 되는데, 이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어떻게 우리 국민들을 파리만도 못한 목숨으로 생각하고 학살했는지 모르겠다"며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김 회장은 "사과를 하면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는 둘째 문제다"라면서도 "일단 잘못을 하면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군의 잘못이니 미국 대통령이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덧붙였다.

한국전쟁유족회가 공개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발굴 촉구 피켓 일부. (사진=이별님 기자)
한국전쟁유족회가 공개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발굴 촉구 피켓 일부. (사진=이별님 기자)

민간인 학살, 정부와 국회가 답해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은 현재에도 유족들은 여전히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유족회 회원들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하 '과거사법')을 개정하라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법안은 과거사위의 활동을 재개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 회장은 "휴일을 제외하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고 계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의도의 시계는 유족의 간절함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 20대 국회 들어서는 7개의 과거사법을 발의된 바 있다. 가장 최근 안은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이 올해 2월 발의한 것이다. 총 7개의 법안은 현재 전부 계류 중이다. 지난달 2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소위에서는 과거사법 의결이 불발됐다. 4월 '패스트트랙 정국' 이후 국회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아 여야 협력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현재 국회가 자유한국당이 움직이는 데로 가고 있다"며 "대체 국회의원들은 심의만 몇 년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민간인 학살 유족 관련 법안은 19대 국회에서 4년 동안 있다가 휴짓조각이 됐다"며 "이번 20대 국회에서 낸 법안이 과거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과거사법 개정안 처리에 대한 국회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김 회장의 지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20대 국회에서 심의한다고 거의 3년을 허비해놓고, 지금은 내년 총선 준비한다고 야단이다"라며 "아마 심의만 9~10번 했을 거다. 장난하는 거도 아니고, 여태 심의만 한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유족회는 빠르면 이번 회기나 늦어도 올해 안에 과거사법이 통과돼 과거사위 활동이 시작되길 바란다. 김 회장은 "첫째도 과거사법 통과, 둘째도 과거사법 통과가 중요하다. 유족들은 억울함 때문에 자기 생활도 못 한다. 이건 국가에도 지장이 있는 거다"라며 "유족회 회원들은 진실규명결정서 한장을 가지고 아버지 산소나 제사상에 놓고 인사드리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 과거 정부에 의해 자행된 만큼 김 회장은 현 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과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는 "진실규명과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의 아베 총리가 일제 때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과를 요구하는 게 아니냐"며 "(정부가) 아베 총리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처럼 최고 책임자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먼저 사과해야 맞지 않는가"라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어떻게 된 게 우리나라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부분 가난한데, 친일 세력들은 다 잘 산다"며 "우리 유족들도 마찬가지다. 유족회 회원들은 전부 다 가슴을 못 펴고 사는데, 가해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과거사법의 조속한 통과와 정부의 공식 사과를 다시 한번 촉구하면서 "가해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피해자들은 고개를 들어 가해자의 숙인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어 "그것이 우리 유족의 한을 푸는 일"이라며 "우리가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평화로 가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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