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청계천 옛 흔적을 상상하며 걷다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계천은 조선 시대 초기부터 관리 기록이 남아있는 하천이다. 한양도성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남북을 구분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청계천은 오래전에는 개천(開川)으로 불렸다. 인왕산과 남산 등 근처 산에서 흘러내린 물과 민가에서 내다 버린 물이 청계천에서 합쳐져 동쪽으로 흘렀다. 그렇게 흐르다 중랑천과 만나고 한강과 합쳐졌다.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청계천은 수위가 낮은 데다 오수 범벅이었고 장마철에는 물이 주변으로 흘러넘쳤다고 한다. 청계천 주변만 가면 악취가 진동했다고. 그래서 ‘개천’이 구정물 흐르는 지저분한 도랑을 은유하는 명사로 자리 잡은 거로 보는 설(說)도 있다.

현재의 청계천은 사철 내내 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악취는 없다. 도심의 온도를 낮추고 바람의 통로 역할도 한다. 이러한 청계천은 사람들은 물론 여러 종류의 동물도 불러 모은다.

지난 19일 광화문 네거리 인근 청계광장. 이곳에서 청계천은 흐르기 시작한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지난 19일 광화문 네거리 인근 청계광장. 이곳에서 청계천은 흐르기 시작한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무교동 인근 청계천.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무교동 인근 청계천.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청계천은 광화문 네거리 인근 청계광장 아래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한다. 어디선가로부터 흘러오는 것이 아닌 인공 구조물에서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며 청계천을 흐르게 한다. 그 많은 물은 어디서 오는 걸까.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서울지하철에서 나오는 지하수와 한강의 물을 적당히 섞는다고 한다. 즉 펌프로 물을 끌어오는 것이다.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남북의 하천 변에는 산책로가 있다. 청계천 시작점의 북쪽 산책로는 종로구에 속하고 남쪽 산책로는 중구에 속한다. 나중에는 동대문구와 성동구를 지난다. 청계천의 제반 시설은 서울시설공단이 관리한다.

기자가 청계천 답사를 시작한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이라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책하는 사람은 물론 간혹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점심시간 그리 넓지 않은 산책로는 산책객들로 붐볐다.

광통교. 조선 시대의 돌과 기둥을 구조물로 사용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통교. 조선 시대의 돌과 기둥을 구조물로 사용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통교. 조선 시대의 돌과 기둥을 구조물로 사용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통교. 조선 시대의 돌과 기둥을 구조물로 사용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통교. 조선 시대에 돌에 그림을 남긴 흔적.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통교. 조선 시대에 돌에 그림을 남긴 흔적.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통교를 지날 때는 조선 시대 교량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옛 흔적이 남아있는 돌들로 벽을 쌓았고 기둥을 세웠다. 돌들과 기둥에는 선조들의 글씨와 그림이 조각으로 남아있다. 합장한 채 인자하게 웃는 부조(浮彫)가 인상적이다. 어떤 소망을 담고 있는 걸까. 

청계천에 산책객들만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동물들도 많이 찾아오는데 특히 새들이 많이 보인다. 도심을 점령한 비둘기는 물론 참새떼까지. 작은 참새들이 나무와 덤불을 오가며 지저귀는 소리는 흐르는 물소리와 무척 잘 어울린다.

도심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철새도 볼 수 있다. 특히 청둥오리 수컷들이 암컷을 두고 다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암컷은 산책로에 올라와 마치 그 싸움을 관전하는 듯한 모습이라 산책객들의 웃음을 사기도 했다. 

백로 중 가장 작은 종인 쇠백로도 살고 있다. 발등이 노란색이라 알아보기 쉽다. 왜가리 여러 마리도 관찰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산책하는 사람들이 두렵지 않은지 징검다리 중간에서 사람이 지나려 해도 비켜주지 않는 용기도 보여주었다. 물론 사람이 다가가자 날아가긴 했지만.

청둥오리 암컷. 이때 수컷 청둥오리 두 마리가 물 위에서 다투고 있었다.청둥오리 수컷은 머리가 초록색이지만 암컷은 몸 전체가 갈색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둥오리 암컷. 이때 수컷 청둥오리 두 마리가 물 위에서 다투고 있었다.청둥오리 수컷은 머리가 초록색이지만 암컷은 몸 전체가 갈색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쇠백로. 백로 중 가장 작은 종이고 발등이 노랗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쇠백로. 백로 중 가장 작은 종이고 발등이 노랗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계천 물속에는 물고기 여러 종도 볼 수 있다. 특히 커다란 잉어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징검다리 근처 여울의 물살을 이용해 이동하는 모습을 산책객들이 신기하게 바라봤다. 손가락 길이만 한 물고기들도 몰려다니는 걸 볼 수 있다.

이들 철새는 청계천에 눌러앉은 텃새로 보인다. 철마다 이동해야 하는 철새가 한 곳에 터 잡고 살게 하는 나름의 매력이 있을 터이다. 물고기들이 자발적으로 들어와 사는지 아니면 서울시에서 방류했는지는 공식적 기록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청계천을 순수한 자연환경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생물이 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환경인 듯했다.

청계천에서는 왜가리 여러 마리를 꽤 자주 만날 수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계천에서는 왜가리 여러 마리를 꽤 자주 만날 수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잉어. 이외에도 청계천에는 여러 종의 물고기가 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잉어. 이외에도 청계천에는 여러 종의 물고기가 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종로3가쯤 가자 청계천 주변 풍광이 바뀌기 시작했다. 광화문에서 종각쯤까지 청계천 주변이 높은 빌딩 숲이었다면 종로3가쯤부터는 낮은 건물들이 이어졌다. 특히 시장들이 계속 이어졌다. 청계천 남쪽의 방산시장과 북쪽의 광장시장, 그리고 동대문종합시장이 눈에 띄었다. 기다랗게 이어진 평화시장 건물도 인상적이다.

청계천 인근은 오래도록 서민들의 생활터전이었다. 청계천 변에 집을 짓고 살거나 청계천이 복개된 후에는 공장들이 들어섰다. 한때 우리나라 산업을 대표했던 봉제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이 사람들 뇌리에 박히게 된 계기도 청계천과 관련 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를 담은 곳이 바로 청계천이다. 비극적 노동 환경에 떠밀린 청계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사업주들의 근로기준법 준수를 촉구하며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었다. 청계천 6가의 ‘전태일다리’ 혹은 버들다리에는 전태일 동상이 있다. 

청계천 왼쪽으로 평화시장 오른쪽으로 동대문 시장.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계천 왼쪽으로 평화시장 오른쪽으로 동대문 시장.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계천 평화시장 인근 전태일다리의 '전태일' 열사 동상.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계천 평화시장 인근 전태일다리의 '전태일' 열사 동상.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계천 개발 역사

조선이 한양을 도읍지를 정했을 당시 개천(開川), 청계천은 평소에는 오수가 괴어있고 비만 오면 넘쳤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태종이 최초로 청계천 치수 사업을 벌였고, 영조 때 유로변경 공사를 해서 구불구불하던 흐름이 직선화했다고.

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개천 준설 공사, 하천 바닥의 지저분한 것을 치우는 공사가 이루어졌고, 이름을 청계천(淸溪川)으로 바꾼 일제 강점기에도 준설 공사는 계속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름처럼 맑게 흐르는 하천은 되지 못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중반 청계천을 덮는 복개 공사를 계획했다. 하지만 전쟁 준비가 더 급했던 조선총독부는 광화문에서 광교까지만 덮고 더는 진행을 하지 못했다.

복개되기 전 청계천. (사진=서울정책아카이브)
복개되기 전 청계천. (사진=서울정책아카이브)
복개되기 전 청계천. (사진=서울정책아카이브)
복개되기 전 청계천. (사진=서울정책아카이브)

그 계획을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이어받았다. 1958년에 시작된 청계천 복개는 1차로 동대문 인근까지, 2차는 마장동 인근까지 진행되어 1977년에 공사를 완료했다. 

복개된 청계천 위로는 고가도로가 세워졌다. 1967년에 ‘청계고가도로’ 공사가 시작되어 1971년에 마무리되었다. 종로2가 인근 ‘3·1빌딩’에 진출입로가 있어 일명 ‘3·1고가도로’라고도 불렸다.

수십 년간 공사가 이어진 청계천은 또 대형 공사를 겪는다. 청계고가도로를 해체하고 청계천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며. 고가도로가 오래되어 안전에 문제가 있고 주변 지역이 슬럼화하고 있다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의 공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2003년부터 시작된 공사로 고가도로는 철거되고 청계천은 포장을 뜯어냈다. 하천과 그 주변은 정비되었다. 수동태 문장을 쓸 만큼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2005년 10월 청계천은 그렇게 복원되었다.

청계천은 어떻게 기억될까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옛 교량의 흔적 등 조선 시대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유물들 대부분이 박물관이 아닌 하수종말처리장에 보관하고 있다고.

원래 도시개발 과정에서 역사적 유물이 발굴되면 그 즉시 공사는 중단되고 유물 확인 작업부터 해야 한다. 그게 법률로 정한 절차다. 하지만 공사 지연을 우려한 정치적 결정으로 대충 넘어갔다는 지적이 지금도 나오고 있다.

청계천은 이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기록으로나 볼 수 있는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개천은 더는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비되기까지 가려버리고 치워버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산책객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것은 조선 시대 유물들 흔적이기도 했고, 청계천 주변에서 생계를 이어갔던 서민들의 눈물이기도 했다. 

지금의 청계천이 시간이 흐르면 어떤 존재가 될까. 또 어떤 개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만약 또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청계천은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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