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동 고분군, 몽촌토성, 그리고 풍납토성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서울에는 역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많다. 강북 도심만 하더라도 조선 시대의 도성과 성문, 그리고 궁궐들을 볼 수 있다. 한강을 건너면 강남 도심에 왕릉이 있고, 강서 쪽으로 가면 양천향교와 ‘양천현 관아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흔적들은 모두 조선 시대의 유적이다.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역사이기도 하고 남아 있는 유적이 많이 남아있기도 해서 서울의 역사를 조선 중심으로 바라볼 때가 많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도 서울은 중요한 도시였고, 삼국시대에도 한강을 중심으로 세 나라가 세력 다툼을 한 중요한 지역이었다.

서울에는 특히 초기 백제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얼마 전 잠실을 소재로 글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가 잠실 인근에 백제와 연결되는 키워드가 여럿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심코 걷던 산책로와 공원이 백제의 ‘토성(土城)’이었고 돌무덤이었다.

(2021. 06. 16)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전경.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전경.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석촌동은 옛 이름 '돌마리'를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을 보호하기 위해 고분군의 아래로 지하도로가 지난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석촌동은 옛 이름 '돌마리'를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을 보호하기 위해 고분군의 아래로 지하도로가 지난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도로를 지하차도로 만든 석촌동 고분군

석촌호수가 이름을 따기도 한 석촌동(石村洞)의 유래는 무엇일까. 석촌동의 옛 이름은 ‘돌마리’였다. 석촌이라는 한문 그대로 돌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돌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 이유는 백제 초기 적석총이 이 지역에 많이 있었고, 거기서 무너져내린 돌이 많아서 돌이 많은 마을, 즉 ‘돌마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석촌동의 고분군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기 전에는 이 돌들로 담을 쌓거나 아예 무너진 무덤 위에 집을 지은 주민들도 많았다고.

(2021. 06. 16) 적석총. 돌을 쌓은 위에 흙을 덮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적석총. 돌을 쌓은 위에 흙을 덮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움무덤. 석촌동 고분군에는 적성총들 사이에 땅을 파서 만든 '움무덤'도 여럿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움무덤. 석촌동 고분군에는 적성총들 사이에 땅을 파서 만든 '움무덤'도 여럿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적석총(赤石冢)은 돌과 흙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을 말한다. 돌을 쌓아 네모난 형태를 만들고 중심에는 동그랗게 흙을 쌓았다. 특히, 석촌동 고분군은 돌무지무덤들이 서로 연결된 연접적석총이다. 

석촌동 고분군에는 발굴이 끝난 돌무지무덤과 땅을 파서 만든 움무덤을 복원해 놓았다. 고분군 공원 안에는 아직 발굴이 진행되는 곳도 있었다. 생각보다 큰 돌무지무덤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특히 ‘3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약 50미터로 고분군에서 가장 큰 돌무지무덤이다. 그 크기가 다른 돌무지무덤들을 압도한다. 이 무덤의 주인은 백제의 정복왕으로 알려진 ‘근초고왕’이라는 학설이 있다.

(2021. 06. 16) 석촌동 고분군의 3호 고분군.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는 학설이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석촌동 고분군의 3호 고분군.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는 학설이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석촌동 고분군의 3호 고분군.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는 학설이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6) 석촌동 고분군의 3호 고분군.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는 학설이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석촌동 고분군은 지하철 ‘석촌역’에서 가깝다. 다세대주택과 빌라가 모여있는 주택가 한복판에 있다. 고분군의 동서 방향으로는 ‘백제고분로’가 지나는데 고분군 부근에서 지하차도로 연결된다.

석촌동 고분군은 공원이기도 해도 이 지역 주민들에게 좋은 산책 코스를 제공한다.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올림픽공원의 산책로가 된 몽촌토성

1970년대 초 섬이었던 잠실을 육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흙이 많이 필요했다. 당시몽촌토성을 야산 자락으로 생각한 건설회사 측에서 성을 허물고 그 흙을 가져다 쓰자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아직 발굴 전이었지만 백제의 토성이고, 그 아래에는 백제의 흔적이 많이 묻혀있을 것으로 확신한 학계에서 강력히 반대해 몽촌토성이 무사했다고. 

이후 발굴과정에서 초기 백제의 유물과 유구(遺構), 심지어 고구려의 흔적까지 출토되었다. 과거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발굴된 것이다. 이러한 과거를 모르고 몽촌토성을 걷는다면 그저 공원 산책로라 여기지 않을까. 

(2021. 06. 15) 몽촌토성의 목책.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몽촌토성의 목책.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몽촌토성의 목책.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몽촌토성의 목책.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뻗어내린 구릉을 이용해 만든 토성이다. 토성 외부에 급경사를 만들고 목책을 설치했다. 토성 주변으로는 성내천이 흐른다. 학자들은 한강으로 연결되는 성내천이 천연의 해자(垓字)였을 것으로 여긴다. 

현재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 곳곳을 이어주는 산책로가 되었다. 토성의 상단 부분에 걷기 좋게 길을 내고 계단도 만들었다. 토성 안쪽은 경사가 낮고 잔디밭이라 벤치나 돗자리에서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2021. 06. 15) 산책로로 조성된 몽촌토성.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산책로로 조성된 몽촌토성.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산책로로 조성된 몽촌토성.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산책로로 조성된 몽촌토성.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과거 서울올림픽 준비를 위해 몽촌토성 인근에 경기장들과 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다행히 본격적 건설이 이루어지기 전에 몽촌토성 발굴이 이루어졌다. 토성의 윤곽은 물론 초기 백제의 유물과 유구가 많이 출토되었다.

올림픽공원 안에 설치된 ‘한성백제박물관’과 ‘몽촌역사관’에 가면 그 결과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몽촌토성은 사적 제297로 지정되었다.

아파트와 주택으로 둘러싸인 풍납토성

잠실에 큰 피해를 준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자료 중에는 풍납동 인근의 토성이 쓸려갔다는 내용도 많았다. 지금의 풍납토성을 말한다. 풍납토성은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 사이 주택가와 아파트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2021. 06. 15) 천호대교 부근의 풍납토성.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천호대교 부근의 풍납토성.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천호대교 부근의 풍납토성. 주택가와 시장이 들어섰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천호대교 부근의 풍납토성. 주택가와 시장이 들어섰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풍납토성은 과거 홍수로 한강 변의 서쪽 성벽은 거의 무너졌고 지금은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 일부 성벽이 남아있다. 남은 성벽 주변에는 산책로와 공원이 조성되었다. 한편 무너진 성벽 자리에는 주택이 들어서 사람들이 산다.

학자들은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중심지로 여긴다. 초기 백제의 유물과 유구가 많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울은 거의 이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도(古都)가 되었다.

특히, 1997년에 풍납토성 인근 아파트 건설 추진 과정에서 한성백제의 흔적이 드러났다. 기초 공사를 하려고 땅을 파니 초기 백제 유물과 유구가 쏟아져 나온 것. 마침 현장을 지켜보던 어느 학자가 문화재청에 이 소식을 알렸다. 그 결과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건설업자와 주민들은 불만이 많았겠지만.

(2021. 06. 15) 올림픽대교 부근의 풍납토성과 산책로.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올림픽대교 부근의 풍납토성과 산책로.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올림픽대교 부근의 풍납토성과 산책로.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올림픽대교 부근의 풍납토성과 산책로.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풍납토성 역시 산책로가 되었다. 다만 몽촌토성과 달리 토성 외부에 길을 내고 토성에는 올라갈 수 없도록 차단했다. 토성 주변으로는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토성 벽이 끊긴 곳에도 주택들이 즐비하다.

백제 시대에도 토성 안쪽에는 건물이 있었고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풍납토성은 사적 제11호다.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고민을 낳는 역사의 흔적

풍납토성은 유적 발굴과 보존에 대한 고민을 낳았다. 유적 발굴과 보존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전에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기 때문이다. 

풍납토성 주변은 현재 문화재 보존을 위해 건축 규제를 받는다. 그만큼 주민들의 불만이 크다. 하지만 지자체의 풍납토성 보존 의지도 커 보인다. 현재 보상을 마치고 철거를 하는 곳이 여러 곳이다. 

(2021. 06. 15) 풍납토성 인근에는 백제 유적 발굴을 위한 보상과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풍납토성 인근에는 백제 유적 발굴을 위한 보상과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삼표레미콘 부근 철거 현장.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15) 삼표레미콘 부근 철거 현장.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리고 철거가 예정되었지만 버티는 곳도 있다. 한강 변에 자리한 삼표레미콘 공장이다. 1978년부터 현재의 터에서 삼표산업이 운영해 왔다. 하지만 공장이 자리한 곳에 무너진 풍납토성은 물론 백제 유물과 유구가 많이 묻힌 게 밝혀졌다. 오랜 소송 끝에 현재 소유권은 송파구에 있고 삼표산업은 무단 점유 중이다. 

서울은 오랜 도시다. 강북 도심만 하더라도 재건축을 위해 땅을 파면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된 옛 흔적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현재의 법은 옛 유물과 유구가 나오면 공사를 중단하고 발굴 조사를 해야 한다. 개발 관점에서 보면 여간 손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의 흔적을 제대로 확인하고 기록하는 것 또한 그 지역의 가치를 올리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초기 백제의 흔적들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모습과 그로 인한 갈등을 보며 이천년 고도를 물려받은 후손의 무게를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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