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곡동 느티나무와 대치동 은행나무, 그리고 논현동 자작나무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지난 11월 5일 강남구 도곡동 경남아파트에서 ‘역말 도당제’가 열렸다. 단지 안 공원의 커다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제단이 차려졌고 제관이 마을제를, 무속인이 마을굿을 주관했다. 이 느티나무는 서울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수령 700년이 넘은 고목이고, 제관들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 느티나무 근처 역말에 살았던 주민들이다.

2022년 11월 5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경남아파트에서 '역말도당제'가 열렸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년 11월 5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경남아파트에서 '역말도당제'가 열렸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강남은 오래도록 농촌이었다. 1970년대 강남이 한창 신도시로 개발될 때도 아파트지구에 속하지 않은 지역은 한동안 전통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80년대 이후 그런 마을들도 차츰 사라지고 아파트로 변해갔는데 오직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들만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곡동 느티나무

‘역말’은 역(驛)이 있던 마을을 의미한다. 과거에 말은 교통수단이면서 통신수단이었다. 조선시대에 지방이나 한양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마다 역 혹은 역참(驛站)을 설치해 말을 관리했고, 그 주변 마을은 역말이나 역촌(驛村)이라 불렸다. 도곡동의 역말은 과거 삼남 지방과 연결되는 길목에 설치한 양재역(지하철역이 아니라 역참) 인근에 자리했던 마을이었다. 
 
역말은 역삼동(驛三洞)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양재역 인근에 자리했던 말죽거리, 방아다리, 역말 등 세 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이름 지었다. 1963년 강남이 서울로 편입되기 전까지 역삼리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했다. 역삼리가 서울이 된 후에는 역삼동과 도곡동으로 나뉘었는데 역삼동 지명의 유래가 된 역말은 도곡동 관할이 된다.

1972년 역말 일대 항공사진. 사진 중앙의 마을이 역말이고 마을 위 도로의 흔적은 지금의 도곡로다. 도로 왼쪽 방향으로 가면 뱅뱅사거리가, 오른쪽으로 가면 강남세브란스병원이 나온다. 빨간 원은 도곡동 느티나무, 노란 원은 과거 광주군 언주면사무소였고 지금은 도곡1동 행정복지센터 자리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제공)
1972년 역말 일대 항공사진. 사진 중앙의 마을이 역말이고 마을 위 도로의 흔적은 지금의 도곡로다. 도로 왼쪽 방향으로 가면 뱅뱅사거리가, 오른쪽으로 가면 강남세브란스병원이 나온다. 빨간 원은 도곡동 느티나무, 노란 원은 과거 광주군 언주면사무소였고 지금은 도곡1동 행정복지센터 자리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제공)

1972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역말은 북으로 지금의 도곡로에, 남으로는 지금의 남부순환로에 접하는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넓은 논을 가운데에 두고 와이(Y)자 모양의 마을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걸 볼 수 있다. 

역말에는 75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다. 1972년 항공사진에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가 흐릿하게 보인다. 높이 27m, 둘레 7.9m의 느티나무에는 효자의 기도를 들어줬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역말 사람들은 영험한 느티나무 앞에서 매년 마을제를 지내며 신성시했다. 1968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도곡동 느티나무는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재개발이 추진되자 주민들이 역말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부터는 아파트로 개발되며 집들이 헐리고 느티나무만 남았다. 그나마 보호수라 뽑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개발 지역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는 느티나무는 어떤 이에게는 고향의 흔적이었고, 누군가에는 걸림돌이었다. 

<경향신문> 1995년 9월 21일의 ‘테러 당한 700년 고목’ 기사는 누군가 도곡동 느티나무에 농약을 뿌려 고사시키려 했다는 의혹을 다뤘다. 이후에도 느티나무를 두고 보존하자는 측과 뽑아버리자는 측의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는 신문 기사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1998년 11월경 여러 신문 기사가 도곡동 느티나무 인근을 공원으로 지정해 보호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도곡동 느티나무는 아파트 건물들에 둘러싸인 공원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도곡동 느티나무. 강남구 도곡동 경남아파트 단지 안 공원에 자리한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도곡동 느티나무. 강남구 도곡동 경남아파트 단지 안 공원에 자리한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대치동 은행나무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아파트 일대는 예전에 논이었다. 양재천과 탄천이 주변으로 흘러 물을 대기 쉬운 곳이었지만 장마 때는 하천이 넘칠 위험이 있는 저지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래전 항공사진에서 구릉에 들어선 마을을 볼 수 있다. 동 이름에 들어간 대치(大峙)도 높은 언덕을 의미한다.

<경향신문> 1972년 6월 21일의 ’사재로 탁아소 마련‘ 기사는 농촌이었던 대치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대치동은 “농사터가 많은 서울의 변두리”여서 한 주민이 “주부들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자기 집에 탁아소를 만들었다고 기사는 전한다. 

이 기사에 나온 주소를 추적하니 은마아파트 북쪽에 자리한 ’대치동 구마을‘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대치동이 아파트 단지로 유명해졌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대치동 구마을은 한동안 농촌 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대치동에서 살았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변의 아파트 단지나 양옥들과 비교되는 농가 주택이 많아서 구마을을 ’민속촌‘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1976년 대치동 일대 항공사진. 사진 상단 가운데 마을이 대치동 구마을. 왼쪽 마을이 당시 새로 들어선 대치동 주택단지다. 사진 가운데의 농지가 은마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사진: 서울시 역사아카이브)
1976년 대치동 일대 항공사진. 사진 상단 가운데 마을이 대치동 구마을. 왼쪽 마을이 당시 새로 들어선 대치동 주택단지다. 사진 가운데의 농지가 은마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사진: 서울시 역사아카이브)

대치동 구마을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연립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구마을을 걸어보면 다른 강남 지역과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경사가 큰 언덕에 들어선 주택가에 골목 모양도 반듯하지 않다. 농촌 시절 구릉에 자리했던 마을 구획 그대로 연립주택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는 구마을이 도시 계획에 따라 구획을 새롭게 정리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모습 그대로 들어선 것을 의미한다. 다만 건축물 종류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 대치동 구마을에 주택 재건축 공사가 한창이다. 옛 구획에 들어선 연립주택들이 헐렸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옛 구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은 재건축 공사장 입구이기도 하다. 

재건축이 진행되는 대치동 구마을에서 은행나무가 보존되는 이유는 서울시 보호수이기 때문이다. 다만 공사장과 주변 건물에 둘러싸인 은행나무는 가지가 뻗어나갈 땅조차 허락되지 않은 듯 보였다.

(2022. 10. 20) 대치동 은행나무. 대치동 구마을 입구에 자리했고, 구마을은 재건축이 진행 중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10. 20) 대치동 은행나무. 대치동 구마을 입구에 자리했고, 구마을은 재건축이 진행 중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오랜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오래전 용문산에 치성을 다녀온 어느 할머니의 은행나무 지팡이에서 움이 트고 싹이 피더니 은행나무로 자랐다고 전해진다.

2017년 서울시가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를 위해 대치동 구마을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다. 구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기억을 더듬어 옛 마을 지도를 그렸는데 기억의 중심이 되는 지형지물은 언제나 은행나무였다. 농촌 마을 시절의 구마을에서 살았던 주민들에게 대치동 은행나무는 고향의 흔적이었다. 

논현동에 자작나무가 있었는데

보호수는 <산림보호법>에 의해 지정되고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한다. 관리는 기록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보호수가 있었다. 논현동 자작나무가 그랬다.

’우영우 팽나무‘가 유명세를 치를 즈음 오래전 신문 기사에서 ’논현동 자작나무‘를 알게 되었다. 1972년과 1973년 신문 기사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성사목'으로 유명한 논현동 자작나무를 소개했다. 수령 600년의 자작나무를 서울시에서 지정한 보호수로 지정했다며 작은 사진도 함께 게재됐다. 우영우 팽나무 못지않은 멋진 나무였다. 

경향신문 1973년 4월 5일 기사. 논현동 자작나무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 경향신문)
경향신문 1973년 4월 5일 기사. 논현동 자작나무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 경향신문)

그런데 논현동 자작나무는 뭔가 생소했다. 논현동에 수십 년 넘게 산 지인도 자작나무의 존재를 전혀 들어본 적 없다고 했다. 보호수라면 어딘가 있을 텐데 하며 직접 발품도 팔아봤다. 논현동 어디에도 그런 자작나무는 없었다. 

강남구청의 보호수 관리 부서에 문의해 봤지만, 논현동의 자작나무와 관련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보호수가 죽으면 보호수 지정에서 해제된다고 알려주었다. 

혹시나 해서 항공사진을 찾아봤더니 옛 기사에 나온 주소 근처에 자작나무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항공사진에서 보이던 자작나무는 1978년 항공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로 미뤄보면 1977년 즈음 고사한 자작나무가 보호수 지정에서 해제됐으며, 1978년 무렵에 뽑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1977년 논현동 자작나무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 지금은 논현동 고급 주택가로 변한 지역이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1977년 논현동 자작나무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 지금은 논현동 고급 주택가로 변한 지역이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이후에 논현동 자작나무가 있던 자리는 주택가로 변해갔다. 항공사진을 보면 자작나무가 있던 언덕뿐 아니라 논현동 일대 모두 주택가가 되었고, 나아가 강남 일대가 새로운 도시로 거듭났다.  

한편, 옛 마을이 사라져도 살아남은 보호수들은 그곳에 터 닦고 살던 원래 강남 주민들에게 고향의 흔적이 되어 주고 있다. 그런 강남구의 보호수가 지난 2018년까지는 다섯 그루였다. 하지만 삼성동 코엑스 근처에 있던 느티나무가 고사해 보호수 지정에서 해제됐고, 현재는 네 그루의 보호수만 강남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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