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이남 서울의 표지석들은 도시로 개발되기 전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표지석에는 그곳의 역사가 담겨 있다. 서울 강북 도심을 걷다 보면 그곳이 예전에 어떤 관청이었다거나 유명한 인물의 집이었다고 알려주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강북의 표지석은 주로 근대화와 현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옛 구조물의 흔적들이다.

반면 한강 이남 서울, 즉 강남의 표지석들은 서울의 확장과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진 흔적의 기록들을 새겨놓았다. 

한남대교 아래 나루터

한강에 교량이 놓인 자리는 거의 나루터였다. 뚝섬 나루터 자리에 영동대교가 놓였고, 양화진 나루와 광진 나루 자리에는 양화대교와 광진교가 놓였다. 강북과 강남을 바로 이으며 고속도로까지 연결되는 한남대교가 놓인 자리도 예전에는 나루터였다. 

강남구 신사동 네거리의 나루터로 표지판.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강남구 신사동 네거리의 나루터로 표지판.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한남대교 인근 신사동 네거리에 가면 나루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신사동 네거리에서 잠원동 방향의 도로 이름이 ‘나루터로’다. 오래전 잠원동에 나루터가 있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나루터로’를 따라가 보면 잠원동의 아파트 단지들만 나오고 정작 나루터는 볼 수 없다. 다만 한강공원에 놓인 표지석 두 개에서 과거 나루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표지석 하나는 잠원동과 한강공원을 연결하는 지하도 출구에 있다. ‘잠원 나루터(蠶院津 址)’라 쓰인 표지석에 ‘한남대교 북단 한강진에서 말죽거리 원지동을 거쳐 삼남지방(충청, 영남, 호남)으로 이어진 교통 요충지였다’고 설명돼 있다.

다른 표지석은 한남대교 남단 아래에 놓여 있다. 이 표지석에는 ‘새말 나루터’라 쓰여 있고, 한남동 한강 나루터와 이어지며 상업이 성행했던 곳이라 설명돼 있다. 새말은 한남대교 남단에 있던 마을로 신사동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잠원 나루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잠원 나루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새말 나루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새말 나루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한남대교가 놓이기 전 잠원 나루터와 새말 나루터는 강남에 사는 서울 주민들에게 교통의 요지였고, 강남에서 재배한 채소류 등을 강북으로 운송하는 거점이었다. 그래서 말죽거리 등지에서 재배한 각종 농산물을 실은 우마차들이 나루터로 향하는 모습을 묘사한 과거 기사를 볼 수 있기도 하다.

나룻배는 특히 강남에서 강북으로 등교하는 학생과 출근하는 직장인들에게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타고 멀리 동작동과 흑석동을 지나 한강교를 건너서 강북으로 가는 것보다 배를 타고 곧장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훨씬 편했다.

이런 모습들도 한남대교가 완공되며 사라지게 된다. <경향신문> 1969년 12월 26일의 ‘근대화에 밀려나는 한남동 나루터’ 기사는 “나룻배의 목숨이 내 여생처럼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50년 경력의 사공을 소개한다. 75세인 사공은 나루터와 나룻배의 운명을 노년인 자기의 삶에 빗댔고, 나루터의 흔적은 표지석으로만 남았다.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

잠실은 원래 한강의 섬이었다. 석촌호수가 한강의 물길을 막은 흔적이다. 옛 잠실 주공아파트 단지들과 잠실 종합운동장이 자리한 구역에 경사진 곳이 없는 연유도 그곳의 흙을 퍼 강을 메우고 택지를 넓힌 흔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터 닦고 살던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표지석을 옛 고향 인근에 남겼다.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앞 아시아공원에 자리한 '부리도'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앞 아시아공원에 자리한 '부리도'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종합운동장역에서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쪽 출구로 나서면 아시아공원이 니온다. 그 입구에 ‘부리도(浮里島) 부렴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공원 인근에 있던 마을로 예전에는 부리도라는 섬이었다. 

부리도는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모래섬이다. 평소에는 잠실에 붙은 모습이지만 큰물이 지면 마을 인근만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부리도(浮里島)는 그 모습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표지석 기록에 따르면 잠실은 원래 살곶이, 지금의 자양동 아래에 붙은 반도(半島)였다. 하지만 조선 시대 중종 15년인 1520년에 대홍수가 나 뚝섬 아래로 샛강이 생겨 잠실 일대가 섬이 되었다. 

1969년 한강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 잠실이 섬인 것을 보여준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1969년 한강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 잠실이 섬인 것을 보여준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섬이 된 잠실은 북쪽 지역에 신천리, 지금의 신천동이 있었고, 남쪽 지역에 잠실리, 지금의 잠실동이 있었다. 그 서쪽에 부렴마을이 있었다. 1969년의 항공사진을 보면 아직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송파구에 속한 지역의 과거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지역적 다양성을 알 수 있다. 서울로 편입되기 전 송파구 영역 대부분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했었다. 다만 신천동과 잠실동은 경기도 양주군과 고양군에 속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행정구역상 잠실은 원래 한강 북쪽 경기도 땅이었다. 

한편, 부렴마을은 광주군 중대면이 아니라 '언주면 삼성리'에 속한 부락이었다. 그러니까 부렴마을은 행정구역상 지금의 삼성동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잠실과 붙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송파에 속하게 되었다. 만약 탄천의 흐름이 모래섬인 부렴마을을 잠실 쪽으로 밀어내지 않았다면 삼성동과 육지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광주군 언주면 일대는 나중에 강남구가 된다. 

표지석에는 해방 이후 부렴마을에 37가구가 살았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물막이 공사로 육지가 된 잠실에서 올림픽을 준비하게 되었고 올림픽 시설 대상지가 부렴마을 인근으로 정해졌다. 부렴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며 ‘없어진 마을 이름을 기리고 잊지 않기 위하여’ 표지석을 세웠다.

'대동여지도' 한양 인근 확대. 빨간 원이 잠실섬이다. 탄천 하구에 모래섬이 보이는데 부렴마을로 보인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대동여지도' 한양 인근 확대. 빨간 원이 잠실섬이다. 탄천 하구에 모래섬이 보이는데 부렴마을로 보인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표지석으로 남은 옛 흔적들

잠실 물막이 공사의 흔적이기도 한 석촌호수에 가면 송파 나루터 표지석이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며 건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유래가 오랜 나루터다. 하지만 을축년(1925) 대홍수를 겪은 후 쇠퇴했고, 인근이 육지가 되며 나루터 흔적은 싹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있다.

헌릉로를 따라 강남으로 향하다 보면 도로변에 있는 표지석들을 볼 수 있다. 샘마을, 염통골, 게리마을 등 그곳에 있었던 마을의 유래를 알리는 표지석들이다. 게리마을처럼 개발제한구역이 아닌 동네는 오래전에 택지로 개발되었지만 아직 규제가 적용되는 곳은 개발되지 않고 녹지와 옛 구획의 모습이 남아 있다. 

한강 이남 서울의 표지석들은 이렇듯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져간 옛 흔적들이다. 표지석들을 잘 살펴본다면 한강 이남 지역이 서울이 되기 전, 그리고 도시로 개발되기 전 강남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표지석은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글씨가 쓰인 돌덩이일 뿐이겠지만,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던 사람들과 그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아쇠일지도 모른다.

석촌호수 산책로 인근에 놓인 송파나루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석촌호수 산책로 인근에 놓인 송파나루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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