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자르는 소리와 예술의 향기가 어우러지는 문래창작촌
LH의 전신인 조선주택영단이 오래전 택지개발한 곳이었는데

문래역 7번 출구 근방의 문래창작촌 안내판.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역 7번 출구 근방의 문래창작촌 안내판.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서울 영등포의 ‘문래창작촌’을 찾았다. 철공소들이 모여 있는 서울 지하철 2호선 문래역 근처에 형성된 예술작업실 마을이다. 2000년대 들어 서울시의 공장 이전 정책과 재개발로 일부 공장들이 떠나자 젊은 예술가들이 빈 철공소 공간에 작업실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로변에 있는 ‘문래창작촌’ 간판이 아니라면 첫인상은 그냥 철 다루는 곳으로 보인다. 철을 자르고 두드리는 소리와 용접할 때 불꽃이 튀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단층의 낮은 천장을 가진, 낡고 오래된 철공소들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삼사 층 높이의 건물에 들어선 공장들도 있었다. 

낮고 오래된 단층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영등포 공업 단지의 노동자들을 거주시킬 목적으로 건축한 ‘영단주택’의 흔적이다.

사료들과 논문들을 종합하면 문래동 영단주택은 1942년에 553채가 분양 혹은 임대되었으며, 우리나라 택지개발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존 정경. 청년 예술인의 작업으로 보인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존 정경. 청년 예술인의 작업으로 보인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조선주택영단은 나중에 LH가 되고

문래동에 ‘영단주택’을 지은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거점 도시들의 주택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1941년에 세운 기관이다. 해방 후인 1948년에 ‘대한주택영단(大韓住宅營團)’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62년에 ‘대한주택공사(大韓住宅公社)’가 되었다. 그리고 2009년에 한국토지공사와 합병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 즉 LH가 되었다.

사료를 보면 LH는 50년대와 60년대 서울 등 대도시로 몰리는 지방 인구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을 중심으로 국민주택 단지를 건설했다. 당시 흔적이 서울 수유동, 갈현동, 상도동 등지에 예전 구획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70년대 이후에는 대단위 아파트단지로 택지개발이 이루어졌다. 민간 건설회사가 시행과 시공을 맡은 지역이 많지만, LH도 대한주택공사의 이름으로 시행을 맡은 곳이 많다. 흔히들 ‘주공아파트’라고 부르는 곳들이 그곳이다.

대한주택공사의 수유동 국민주택 단지 개발 현장(1963). (출처:국가기록원)
대한주택공사의 수유동 국민주택 단지 개발 현장(1963). (출처:국가기록원)
과천 주공아파트 단지 전경(1983). (출처:국가기록원)
과천 주공아파트 단지 전경(1983). (출처:국가기록원)

첫째, 영단은 서민 주택건설 공급을 목적으로 한다. (중략) 일곱째, 필요할 때는 토지를 수용할 권리를 갖는다.

1941년 7월 1일에 발족한 조선주택영단의 정관 내용 중 일부다. 주택공급이라는 공공성도 가졌지만, 택지 개발 계획을 미리 알 수 있는 특권까지 가진다는 것을 오래전 정관은 밝히고 있다.

조선주택영단을 연구한 논문들을 보면 조선주택영단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세워진 기관이지만 그 역할과 경험이 워낙 독점적이어서 해방 후 미군정시절에도 조직이나 인력의 변동 없이 공영주택 공급기관 역할을 계속 맡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조선총독부 시절 세웠던 도시개발사업 계획을 한동안 추진했다고 한다.

지금은 토지와 주택을 아우르는 거대한 공사(公社)로 성장했지만, 업무 철학은 오래전에 만든 정관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다만 오늘날, LH가 택지개발계획 수립과정에서 다루는 정보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 조직원들 때문에 LH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LH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해 12월에 발표한 ‘2020년 공공기관 청렴도 측정 결과’에서 종합청렴도와 외부청렴도에서 4등급을 받았다. 그런데 최하위인 5등급을 받은 기관이 없기에 LH는 사실상 최하 등급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LH 조직원들이 직접 측정한 내부청렴도는 2등급이었다. 외부의 평가와 달리 자신에게 관대한 조직 분위기를 상상하게 한다. 

철을 다루는 공장들, 그리고 예쁜 카페와 식당들

LH의 전신인 조선주택영단이 일제강점기에 지은 문래동 영단주택 단지에는 해방 후와 전쟁 후에도 계속 사람들이 거주했다. 하지만 낡고 오래되어 차츰 사람들이 떠나자 70년대부터 그 자리에 철공소들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철공소들도 문 닫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젊은 예술인들이 하나 둘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문래창작촌을 걸었을 때는 대로변과 이면 도로에, 그리고 골목들에 들어선 크고 작은 철공소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낡은 담장에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고 작은 카페와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창작촌은 어디에 있는 걸까 보이지 않았다. 골목을 여러 번 뒤진 다음에야 카페나 식당 사이에 있는 몇몇 작업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창작촌이라고 하기엔 숫자가 적어 보였다. 

문래창작촌의 카페와 철공소.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카페와 철공소.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들과 마주한 작업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들과 마주한 작업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에 입주한 어느 작업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에 입주한 어느 작업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청년 예술가들은 일층이 아닌 지하나 다른 층에 작업실을 얻는 경우가 많아요.”

점심을 먹고 성공회 교회 마당에서 쉬고 있던 근처 철공소 사장님들의 말이다. 문래창작촌에는 단층 짜리 철공소뿐 아니라 여러 층을 가진 건물들도 많다. 그런 건물들 입구의 우편함을 살펴보니 예술 관련 작업실로 보이는 곳들이 꽤 있었다.

“청년 예술가도 있지만 요즘은 카페나 식당이 더 많은 거 같아요. 이 골목 좀 보세요. 새로 카페인지 식당인지 들어오려고 공사하고 있잖아요. 빈 점포마다 그런 업종 알아본다던데.”

성공회 교회 마당에서 만난 사장님들의 말이다. 그런데 기자가 사진 찍어도 되냐 물어보니 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 찾아오고 그런 건 좋은데 카메라를 함부로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자는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관광객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찍을 때 곤혹함을 느낀다고 했다. 촬영 허락을 받기는커녕 한참을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작업을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카메라 신경 쓰다가 사고 날 뻔한 적도 있다고.

그러고 보니 문래창작촌 곳곳에 사진 촬영 관련한 안내가 걸려 있었다. 세련되고 재치있는 디자인에서 이 지역 예술인들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에 걸린 초상권 주의 안내판. 청년 예술인들이 만들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에 걸린 초상권 주의 안내판. 청년 예술인들이 만들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에 걸린 초상권 주의 안내판. 청년 예술인들이 만들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에 걸린 초상권 주의 안내판. 청년 예술인들이 만들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에 걸린 초상권 주의 안내판. 청년 예술인들이 만들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에 걸린 초상권 주의 안내판. 청년 예술인들이 만들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도시재생의 이면

기자는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다시 걸었다. 오래전 풍경을 상상하며 걸었다. 좁지만 반듯한 골목에 들어선 같은 규격의 주택들이 들어선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곳에 살던 공장 노동자들이 떠나자 같은 자리에 철공소들이 들어섰고, 세월이 지나 철공소들이 나간 곳에는 청년 예술인들이 찾아왔다. 지금은, 빈 곳이 생기기만 하면 카페와 식당이 들어서고 있다.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철공소 골목.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어느 담벼락 벽화. 청년 예술인의 작업으로 보인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의 어느 담벼락 벽화. 청년 예술인의 작업으로 보인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리고 오래된 담장에는 벽화가 그려져 관광객들의 사진 배경으로 쓰이고 있다. 이 모든 모습을 관련 부처와 지자체는 도시재생의 좋은 사례로 꼽는다. 

관광지를 만드는 것만이 도시재생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과 기반을 두고 일하는 사람들이 함께 활력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 때야 진정한 재생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문래창작촌’ 골목들 곳곳에서 목격한 ‘전기공급정지예정’ 스티커들이 그런 생각을 더욱 깊게 이끌었다.

문래창작촌 골목에서 본 전기공급중단 스티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래창작촌 골목에서 본 전기공급중단 스티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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