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거리, 광화문통’으로 불렸던 광화문 앞길의 변신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화문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할 때가 있다. 이때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의미할 수도 있고, 그 남쪽으로 이어진 광화문광장이나 세종대로 네거리, 즉 광화문 네거리 근처를 의미할 때도 있다. 광화문은 이렇듯 특정 건축물에만 머물지 않는 상징성을 지녔다.

광화문 앞길, 지금의 광화문에서 세종대로 네거리까지의 길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있었으니 6백 년이 훌쩍 넘었다. 광화문 인근은 지금도 서울 곳곳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지만 조선 시대에도 도성의 여덟 문과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관청들이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2022. 01. 20)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화문과 육조길

조선 건국 초기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로운 수도인 한양 건설을 맡긴다. 정도전은 치밀한 도시계획하에 경복궁을 건설했고 궁궐의 남문인 광화문 앞에 관청들을 배치했다.

광화문 남쪽 길을 따라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주요 관아들이 들어섰고 그 뒤편으로도 크고 작은 관청들이 들어섰다. 경복궁이 왕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면 광화문 앞길은 관원들의 활동 공간이면서 각종 국가 행사와 국가 경영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광화문 남쪽 좌우로 관아들을 배치하며 가운데에는 큰길을 내었다. 그 길의 이름은 ‘육조길’ 혹은 ‘육조거리’로 불렸다. 한성부는 물론 조선에서 가장 큰길이었다고 한다. 

'도성대지도'에서 육조거리를 표시한 부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의 '육조거리' 전시물 촬영)
'도성대지도'에서 육조거리를 표시한 부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의 '육조거리' 전시물 촬영)

당시 기록에 따르면 도로의 폭을 대로, 중로, 소로로 나누어 크기를 규정했는데 대로의 너비는 56척이었다. 1척을 30cm로 환산하면 17m 가까이 된다. 다만 광화문 앞길은 법전에 규정된 대로의 폭보다 넓게 조성되었다고 한다. 

넓은 길인만큼 국왕의 행차가 많았다. 국왕이 궁궐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 항상 지나는 길이 광화문 앞길, 육조거리였다. 국왕이 행차하는 모습을 보려고 백성들이 몰려들었고 간혹 그들이 직접 왕에게 민원을 고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육조거리에서 대규모 행사도 거행되었는데 과거 시험도 이곳에서 시행되었다. 특히 무과에 응시한 이들이 말을 타고 무예를 겨루는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고. 각종 관청이 있어 관리들은 물론 민원인들도 들락거리고 인근에는 시장까지 있어 육조거리는 한양에서 가장 분주한 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광화문 그리고 육조거리의 관아들은 불타거나 파괴된다. 전쟁 후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정궁이 되고 주요 관서들만 조금씩 복구된다. 그렇게 경복궁과 광화문은 3백 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고종 즉위 초인 1865년에야 중건된다. 

조선 건국의 상징성을 간직한 곳인 만큼 경복궁 중건은 왕권 부흥의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일본에 의한 국권 찬탈로 경복궁과 광화문은 또다시 훼손된다. 

광화문과 광화문 앞길의 훼손과 복구

예전에 ‘중앙청’이라 불린 곳이 있었다. 한때 우리나라 정부가 정부 종합 청사로 사용한 건물을 말한다.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의 여러 시설을 허물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1926년에 들어섰다. 지금의 광화문으로 입장하면 바로 보이는 곳에 세웠다. 광화문은 총독부 건물을 가리는 모양새여서 경복궁 동쪽 담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총독부 건물은 경복궁 중심축과 3.5도 정도 틀어지게 건축됐다. 덕분에 경복궁이 반듯하지 않게 보였다. 이 건물을 하늘에서 보면 일본을 뜻하는 날일(日) 자 모양이었다고. 

공사중인 조선총독부. 일제는 광화문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광화문' 전시물 촬영)
공사중인 조선총독부. 일제는 광화문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광화문' 전시물 촬영)

광화문 앞길은 일제가 ‘광화문통’이라 이름 짓고 다양한 행사 장소로 이용했다. 광화문통은 너른 길이었기 때문에 군사 분열식 같은 무력 행사와 대규모 행사가 열리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박람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그 목적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기념하는 전시회였다. 1915년에 열린 ‘시정 5주년 조선물산공진회’가 대표적이다. 경복궁이 공진회의 주 전시장이어서 광화문 앞길이 연일 붐볐다고 한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건물은 미군 군정 청사로 사용되다가 대한민국 정부 설립 후에는 정부 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된다. 중앙청이란 이름은 미군정이 ‘캐피탈 홀(Capital Hall)로 불렀던 것을 직역한 것이다.

국회의사당은 이후에 부민관으로 이전했다가 여의도로 옮긴다. 정부 부처들도 인근 정부서울청사나 정부과천청사로 분산 이전했다. 지금은 많은 부처가 대전과 세종으로 옮겼지만 외교부와 통일부 등 일부 부처는 광화문 인근에 남아 있다.

중앙청으로 불렸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1995년에 옛 중앙청 건물은 철거된다.

1968년에 복원된 광화문. 중앙청이 그 뒤에 보인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68년에 복원된 광화문. 중앙청이 그 뒤에 보인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에 경복궁 동쪽 담장으로 옮겨간 광화문은 어떻게 되었을까. 6ㆍ25 전쟁 때 포격을 받아 목조 부분이 파괴되었고 석축만 남았다. 그러다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남아 있던 석축을 중앙청 앞으로 이전해 복원했다.

그런데 많은 문제를 남긴 복원이었다. 외형 복원에만 급급해 시멘트를 사용했고 경복궁이 아닌 중앙청 기준으로 복원했기 때문에 위치와 각도가 원래의 그것과 맞지 않았다고 한다. 광화문 현판을 쓴 박정희의 글씨도 지적이 많았다고. 결국, 2006년에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경복궁 복원 사업을 위해 광화문을 철거한다.

새로운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된다. 틀어진 각도를 바로 잡아 원래의 위치에 복원했다. 2010년 광복절에 현판식도 거행했는데 현판의 글씨 또한 옛 기록을 토대로 변경되었다. 

(2021. 01. 20) 광화문 현판. 옛 문헌 등을 통해 복원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1. 20) 광화문 현판. 옛 문헌 등을 통해 복원되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옛 중앙청, 조선총독부가 있던 자리.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옛 중앙청, 조선총독부가 있던 자리.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광화문의 수문장.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광화문의 수문장.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화문 앞길 지금은

광화문 앞길을 걷다 보면 넓은 길 좌우로 펼쳐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로변 많은 건물이 정부와 관련한 건물들이다. 세종대로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정부서울청사 본관과 별관이, 동쪽으로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과 주한미국대사관이 있다. 

민간 회사가 보유한 건물들도 그 터의 유래가 한때 정부 기관이었던 곳이 여러 군데다. KT의 광화문West 사옥도 원래는 서울중앙전신국이 있던 자리였다. 1970년대에 담당 부처인 체신부가 신청사를 계획하기도 했다. 광화문을 대표하는 교보빌딩도 예전에는 전매청이 있던 자리였다. 광화문 앞길을 걷다 보면 오랫동안 관청들이 몰려 있던 전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2022. 01. 20) 광화문 안쪽에서 바라본 광화문 앞길. 조선 시대에는 육조거리였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광화문 안쪽에서 바라본 광화문 앞길. 조선 시대에는 육조거리였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광화문 앞길에서 바라본 광화문.  길 건너 옛 육조거리 터에서 유물 발굴을 진행하느라 가림막이 처져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광화문 앞길에서 바라본 광화문. 길 건너 옛 육조거리 터에서 유물 발굴을 진행하느라 가림막이 처져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국가 운영을 상징하는 광화문은 시민의 목소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광장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는 백성들이 광화문 앞 육조거리로 나섰다고 한다.

이렇듯 광화문 앞길은 오래전부터 시민에게 열린 광장이었다. 도로와 광장으로 나뉘었지만 뜻이 모이면 시민은 광화문 앞길 모두를 광장으로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기에 많은 주장이 펼쳐지는 곳이다. 법이 허락하는 요건만 갖추면 그 어떤 주장이라도 펼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2022. 01. 20) 광화문 광장에는 다양한 목소리를 펼치는 사람과 단체가 모인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광화문 광장에는 다양한 목소리를 펼치는 사람과 단체가 모인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광화문 광장은 공사 중이다. 광장 밑에 묻힌 육조거리의 유물 발굴 후에 새로운 광장으로 공사할 예정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0) 광화문 광장은 공사 중이다. 광장 밑에 묻힌 육조거리의 유물 발굴 후에 새로운 광장으로 공사할 예정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년 1월 어느 날 광화문 앞길은 펜스로 가려진 곳이 많았다. 새로운 광장을 만들기 위한 가림막이라고 한다. 역사에 기록될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한편, 광화문 인근 박물관 세 곳에서 '광화문'을 소재로 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 전시가 3월 27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의 〈고궁연화, 경복궁 발굴 복원 30주년 기념 특별전〉이 2월 27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공간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광화문〉 전시가 2월 2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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