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경기도’ 속했던 광화문, 역사성과 상징성이 담긴 곳
이순신 동상 등 권력을 잡은 이들에 따라 풍경이 바뀌기도

한때 농경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공업 국가가 되며 도시화를 겪었다. 도시화는 옛것을 그냥 허물고 새것을 급히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 도시에는 많다. 한때는 소중한 보금자리나 일터였던 곳이, 혹은 피와 땀이 담긴 곳들이 개발을 명목으로 묻히거나 버려졌다. <도시탐구>는 언젠가 누군가는 그리워하고 궁금해할 지금은 사라지거나 희미해진 그 흔적들을 답사하고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화문 앞길은 600년 넘는 역사를 품고 있다. 긴 세월 이길의 풍경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 너른 길에 담긴 정치성은 그대로였다. 즉 광화문 앞길은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를 운영하는 육조길로,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경영에 앞장 선 총독부 가는 길로,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집권한 세력들이 통치 이념을 펼치는 광장으로 이용하는 등 광화문 앞길은 그 시대 권력을 잡은 이들의 정체성에 복무해 왔다. 그만큼 사연도 많다.

(2022. 01. 27) 서울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7) 서울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화문에 경기도청이?

서울은 우리나라의 오랜 수도이지만 한때 경기도에 속한 시절이 있었다. 고려 시대뿐 아니라 100여 년 전에도 그랬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1910년 8월 조선의 왕도(王都)였고 대한제국의 황도(皇都)인 한성부를 경기도청 소재지인 경성부로 격하했다. 

조선 시대에 경기도 감영은 돈의문, 즉 서대문과 가까운 한성부 반송방에 있었다. 그래서 돈의문 경기감영으로도 불렸다. 그런데 경기도를 다스리는 관청이 왜 한성부에 있었을까.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를 지방의 농사 현황을 파악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때 기준으로 삼았고, 경기도가 한성부 방위에 역할을 담당해 관찰사가 머무는 감영을 수도와 가까운 곳에 둘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앞의‘서울적십자병원’ 자리에 있었던 경기 감영은 1896년에 수원으로 이전한다. 

1930년 경기도청 청사. 광화문 건너에 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930년 경기도청 청사. 광화문 건너에 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980년 옛 경기도청 청사. 길 건너에 중앙청이 보인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980년 옛 경기도청 청사. 길 건너에 중앙청이 보인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경기도청 소재지를 수원에서 경성으로 옮긴다. 도청이 들어서려면 건물이 필요한데 마침 대한제국이 짓고 있던 관청 건물이 광화문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대한제국은 1907년에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의정부 건물을 헐고 내부(內部) 청사를 짓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에 완공된 그 건물을 경기도 청사로 전용한다. 

해방을 거쳐 전쟁 후에도 광화문 앞길에 경기도청이 계속 자리했다. 경기도 주요 도시들이 도청 유치 운동을 벌인 계기였다. 대한제국 시절 경기감영이 있었던 수원은 물론 인천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 인천은 직할시나 광역시가 아닌 경기도에 속한 도시였다. 

결국, 1963년에 경기도청 소재지가 수원으로 결정되었고, 경기도청은 신청사가 완공된 1967년 수원으로 이전을 한다. 그 후 치안본부가 광화문 건너 옛 경기도청 건물을  청사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1989년에 철거되었는데 빨간 벽돌의 외관이 인상적인 근대 건축물이었다.

(2022. 01. 27) 옛 경기도청 자리. 조선 시대에는 의정부 청사가 있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7) 옛 경기도청 자리. 조선 시대에는 의정부 청사가 있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7) 광화문 앞길의 옛 경기도청과 의정부 터. 지금 발굴과 복원이 진행 중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7) 광화문 앞길의 옛 경기도청과 의정부 터. 지금 발굴과 복원이 진행 중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옛 경기도청 자리는 한동안 가로공원과 주차장으로 이용되다 1998년부터 ‘시민열린마당’이라는 작은 광장이 된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옛 의정부와 경기도청이 있던 자리를 발굴 조사했고 앞으로 주요 건축물과 시설 등에 관해 학술적으로 밝힐 예정이라고 한다.

2020년 의정부 터는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58호 ‘의정부지’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높은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진 연유는

광화문 앞길은 600년 넘도록 국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 때문에 해방 후에는 새로 태어난 나라를 위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공간이 되었다. 국가 권력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선전의 장으로 광화문 앞길을 이용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8년에 광화문 앞길에 건립한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애국선열을 기리는 조형물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시작은 안중근 의사 동상 건립이었다. 안의사 동상 건립 움직임은 해방 직후부터 있었지만 정치 혼란과 전쟁으로 인해 흐지부지됐다. 1950년대 말 이를 다시 추진한 단체들은 광화문 앞길에 세우길 희망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다른 곳에 세우길 바랐다. 단체 간 알력이 심한 가운데 안중근 의사 동상은 결국 1959년 광화문이 아닌 남산 왜성대 터에 세워졌다.

애국선열을 기리는 조형물을 광화문 앞길에 조성하려는 시도는 박정희 정부에서도 계속되었다.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이 약했던 정권은  역사적 사건이나 위인들을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해 국민에게 관심을 끌고 단결을 꾀하고자 했다.

광화문 앞길은 그 사업들을 펼치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서울은 물론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공간인 데다 사람이 모이고 관심이 쏠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기념물 조성 사업의 시작은 1964년에 추진한 ‘애국선현 37인 석고상’ 건립이었다. 광화문 앞길, 즉 중앙청에서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대로 중앙에 37개의 석고상을 배치한 것이다. 이 작업에 서울대, 이화여대, 홍익대, 서라벌예대(지금의 중앙대) 등 4곳의 미술대학이 참여했고 작업 기간은 2개월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난다. 작업 기간이 짧아 졸속으로 제작되어 엉성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평가를 받았고, 습기 등 환경에 민감한 석고상이 변색하고 망가지기도 했다. 광화문 한복판의 흉물이 된 석고상들은 결국, 1966년에 전면 철거된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이순신 장군 등 애국선열 동상 건립 운동이다. 석고상들이 철거된 1966년에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조직되어 서울은 물론 전국 여러 도시에다 역사적 위인들의 동상을 세우는 운동을 벌였다.

이 위원회에 정부와 민간 측 인사가 고루 참여했지만 김종필 등 박정희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결과적으로 위인 동상 건립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박정희 정부의 통치 이념을 선전하는 장이 되었다. 

이 운동의 핵심은 광화문 앞길에 세운 이순신 장군 동상에 있었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 내내 이순신을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꼽았다. 현충사도 성역화한 박정권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국민적 모범으로 선전했다.

그러니 박정희 정권은 광화문 앞길이라는 상징성 있는 공간에 전 국민의 모범인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설치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애국주의를 심어주고자 했다.

(2022. 01. 27)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7)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2)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2)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하지만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이순신 동상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았다.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어 항복한 장수로 비칠 수 있고, 이순신의 얼굴이 표준 영정과 다르고, 갑옷이 발목 아래까지 내려와 전투 지휘관의 모습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등이 지적되었다. 

이 때문에 동상을 새로 제작해야 한다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10년 보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긴 했어도 이순신 장군 동상은 지금껏 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다.

광화문 앞길은 현재 공사 중

서울시는 지난 2018년 4월에 문화재청과 합동으로 〈광화문 광장 개선 종합기본계획〉을 세웠다.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고 주변 지역도 정비하겠다는 사업계획이다. 2009년에 조성된 광화문 광장을 11년 만에 대대적으로 재정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는 5가지 전략이 담겼다. 먼저 광화문 광장의 역사성 회복을 꾀한다. 두 번째는, 광화문에서 경복궁 그리고 백악산으로 이어지는 ‘국가중심 상징 경관 축’을 조성한다. 세 번째는, 시민이 중심이 되는 ‘열린 광장’을 조성한다. 네 번째는, 걷기 편하고 쾌적한 환경의 ‘가로공원’을 조성한다. 마지막으로는 시대의 트렌드에 맞춘 ‘스마트 광장’으로 만든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해당사자들의 반대에 부닥쳐 광장 재조성 착공 시기를 연기하고 설계안도 재검토하는 등 의견 수렴 과정에 난항을 겪었다. 게다가 시장이 바뀌기도 해 이 사업의 철학 자체가 흔들리기도 했다. 

(2022. 01. 27) 광화문 앞길은 새로운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7) 광화문 앞길은 새로운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7) 광화문 앞길은 새로운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가림막에 막혀 시설물에 접근하기 어렵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27) 광화문 앞길은 새로운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가림막에 막혀 시설물에 접근하기 어렵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아무튼, 서울시는 지난 2020년 9월 〈광화문 광장 일대 변경 계획〉을 발표했고, 같은 해 11월부터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공사에 착수했다. 지금도 광화문 앞길은 공사 중이다. 가림막으로 곳곳을 가려 놓아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등 광화문 광장의 시설물에 가까이 접근하기는 어렵다.

광화문 광장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까. 역사성과 상징성이 큰 광화문 앞길이 모두가 인정하고 누릴 수 있는 도심 공공 공간으로 태어나길 기대한다.

 

※ 참고 문헌

 서울역사편찬원, 《광화문 앞길 이야기》

경기문화재연구원, 《기록으로 남은 경기감영, 경기도청》

은정태, 〈박정희 시대 성역화 사업의 추이와 성격〉, 역사문제연구

정호기, 〈박정희 시대의 '동상건립운동'과 '애국주의'〉, 정신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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