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버스 서대문02가 운행하는 충현동과 천연동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서대문02는 충현동과 천연동을 지난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두 동의 이름이 낯설 수 있는데 충현동에는 북아현동 고지대 주택가가, 천연동에는 독립문과 영천시장 있다. 서대문02는 큰 버스와 작은 버스가 있는데 일부 다른 구간을 운행한다. 작은 버스는 경사진 좁은 길 구간을 좀 더, 큰 버스는 대로변 구간을 좀 더 길게 운행한다.

금화장오거리 정류장에서 마주친 서대문02.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금화장오거리 정류장에서 마주친 서대문02.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충현동의 금화산 자락에 들어선 주택가

서대문은 예나 지금이나 서울 서부의 시작점이다. 옛 지도를 보면 서대문인 돈의문 바깥에서 연결되는 도로망이 동대문인 흥인지문 밖이나 남대문인 숭례문 바깥보다 촘촘한 걸 볼 수 있다. 서대문을 나서면 마포나 양화진으로 가는 지름길과 연결됐고 평양과 의주로 가는 의주로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마을버스 서대문02는 그런 서대문 일대 주택가를 운행한다.

서대문역사거리에서 충정로를 지나온 마을버스 서대문02는 방향을 틀어 충현동의 경사진 길을 올라간다. 경사길 초입에는 각급 학교가 있다. 경기초등학교, 인창중학교와 인창고등학교, 그리고 경기대학교 등이다. 넓은 부지에 들어선 학교들과 달리 고지대에 들어선 주택가는 밀도부터 촘촘해 보인다. 

경사진 이차선도로는 충현동이 예전에 산자락이었음을 보여준다. 무악재 쪽 안산에서 뻗어 나온 금화산 자락이다. 충현동은 충정로와 북아현3동을 합친 지명인데 미근동도 행정적으로 관할한다. 이름에서 보듯 아현동과 북아현동은 같은 뿌리를 가졌다. 조선시대까지는 한성부 아현계(阿峴契)에 속한 같은 동리였다. 

하지만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남부를 용강면 아현리로, 북부를 연희면 아현북리로 갈라놓았다. 해방 후에도 이를 거의 그대로 적용해 마포구 아현동과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나뉘게 되었다.

충현동 전경. 아래에 보이는 도로가 금화장오거리 정류장 인근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충현동 전경. 아래에 보이는 도로가 금화장오거리 정류장 인근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서대문02가 오르는 충현동 언덕길은 일제 강점기에 고급 주택지로 개발된 곳이었다. 하지만 산동네가 그렇듯이 도심에서 밀려 나온 서민들이 터를 잡고 사는 곳이기도 했다. 

서울시 자료를 보면 충정로에서 이화여대 방향의 고지대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토막집이 많았다고 한다. 토막집은 벽과 지붕을 갖춘 주택 형태가 아니라 구덩이를 판 후 거적 등으로 하늘을 가린 형태의 거주 공간을 말한다. 한국전쟁 후에도 이주민이 밀려와 금화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이들은 주로 국유지를 점유해 판잣집을 짓고 생활했다. 

1960년대 들어 정부는 서울에 시민아파트를 건설하면서 불량주택을 양성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때 많은 판잣집이 시멘트 집으로 바뀌었고 골목길도 넓어졌다. 충현동의 1970년대 항공사진을 지금과 비교하면 구획이 그대로이다. 다만 주택 형태만 다세대주택으로 바뀐 곳이 많아 보인다. 

마을버스 서대문02 작은 버스. 종점에서 천연동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서대문02 작은 버스. 종점에서 천연동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천연동의 시민아파트와 전통시장

마을버스 서대문02는 종점에서 큰 버스와 작은 버스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출발한다. 큰 버스는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가지만 작은 버스는 천연동 쪽 좁은 길로 넘어간다. 그쪽 길은 작은 버스밖에 다닐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천연동으로 내려가면 뜨란채 아파트단지가 나온다. 독립문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인왕산이 보이는 고지대에 들어섰다. 이 자리는 원래 1969년에 건축한 금화시민아파트였는데 재건축한 것이다. 

1960년대 서울시의 고민은 도시빈민과 주거 공간의 부족이었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나온 게 시민아파트 건설이다. 도시 빈민들이 주로 살았던 산동네를 아파트단지로 만드는 것. 그렇게 1969년에 들어선 게 1969년의 금화시민아파트였다. 청와대에서 보이는 자리라 당시 서울시장이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설도 있었다. 

1969년 금화시민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공무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969년 금화시민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공무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하지만 야심 차게 건축한 서울의 시민아파트들은 부실했다. 1970년에 와우아파트 붕괴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자 다른 시민아파트들의 안전을 점검하게 됐다. 금화시민아파트도 차츰 철거됐고, 2000년대 초반 재건축하게 됐다.

천연동에는 현저동과 냉천동, 그리고 옥천동과 영천동이 속한다. 천연동에는 유서 깊은 곳이 많다. 현저동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있고, 냉천동에는 오랜 전통의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있다. 그리고 영천동에는 시민들이 많이 찾는 전통시장인 영천시장이 있다. 

박완서의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보면 6·25 전쟁 시기의 영천시장이 묘사된다. 소설 속 영천시장에서는 현금거래보다는 물물교환하는 것을 선호하는 등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응해가는 민초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영천시장 입구.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영천시장 입구.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영천시장은 원래 만초천을 따라 양쪽 하천가에 들어섰었지만, 1966년 만초천을 복개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영천시장 입구와 중앙 통로 바닥에는 네모난 덮개가 있는데 만초천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그러니까 영천시장 통로가 예전에 만초천이 흐르던 물길이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영천시장 인근 교북동에도 작은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독립문 일대는 무악재 넘어 홍제동이나 멀리 수색에서 오는 농산물이 모이는 곳이었다. 오늘날 영천시장은 서대문 주민들과 길 건너 종로구 교남동 주민들은 물론 서울시 전역에서 찾아오는 유명한 전통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금화장, 일제 강점기의 고급 주택지

마을버스 서대문02의 정류장에 금화장오거리가 있다. 충현동 고갯길 한복판에 자리한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고급 주택지로 개발된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는 3대 주택지가 있었다. 후암동의 학강 주택지, 장충동의 소화원 주택지, 그리고 북아현동의 금화장 주택지 등이다. 

금화장오거리 정류장 인근의 일본풍 주택.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금화장오거리 정류장 인근의 일본풍 주택.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름의 금화는 인근의 금화산에서 따왔다. 또한 금화산 자락에서 화초를 팔던 금화원에서 정원의 이미지를 따오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주택지를 개발할 때 유원지나 별장지에서 콘셉트를 가져오기도 했기 때문에 주택지 명칭에 유원지의 원(園)이나 별장지의 장(莊)을 넣는 경우가 많았다. 금화장(金華莊)도 그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금화장 분양 안내 기사를 보면 금화산에 둘러싸이고 금화원이 있어 녹음과 사계절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고지대라 땅이 건조하며 공기가 맑은 위생적인 주택지였다고 한다. 주택지 조성 당시 개발지 인근의 토막민들과 갈등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이들은 인근의 아현리나 홍제리로 쫓겨났다고 한다.

금화장오거리 정류장 인근에서 행인들에게 금화장에 관해 물어보니 대체로 잘 모르고 있었다. 어르신 몇몇만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곳이고 아직 당시의 문화주택이 남아있는 데가 있다며 골목 여러 곳을 가리켰다. 

그 골목들을 둘러보니 일본풍 주택 몇 채와 높게 쌓은 축대가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그 옆으로 들어선 다세대주택들도 예전에는 일본풍 주택이었을 것이다.

마을버스 서대문02를 타면 일제 시절부터 해방과 전쟁을 거쳐 현대에 이르며 거주 공간이 변화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금화장오거리 정류장 인근의 축대. 금화장 주택지의 흔적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금화장오거리 정류장 인근의 축대. 금화장 주택지의 흔적이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저작권자 © 뉴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