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버스 종로12 노선을 따라서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종로12는 서울대학교병원의 셔틀버스처럼 이용된다. 종로3가 일대와 대학로 주변을 지나지만, 핵심 코스는 서울대학교병원 구내 구간이다. 치과병원, 어린이병원, 암병원은 물론 장례식장까지 들린다. 서울대병원이 경사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종로12는 승용차 없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편리한 발이 돼주고 있다.
공공의료의 최전선 서울대학교병원
마을버스를 타고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 들어서면 본관 앞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한 채 보인다. 서울대병원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대한의원 건물이다. 건물 옆에는 ‘제중원 뜨락’이라는 표석이 서 있다.
서울대병원 자료에 따르면 제중원(濟衆院)은 1885년 4월에 조선 정부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부지와 건물, 시설, 행정인력과 운영비 일체를 제공했고, 미국인 의사들을 고용해 환자 진료를 맡겼다. 당시 선교사들이 제중원을 ‘the government hospital’, 즉 정부병원이라 칭한 것을 두고 제중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으로 보기도 한다.
서양식 의학교육을 위해 1899년에 의학교가 설립됐다. 구한말에 병원 운영을 맡은 선교사들이 1904년 서울역 앞에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했는데 이때 제중원의 인력도 데려간다. 그래서 세브란스병원 역사를 보면 제중원에서 시작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까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 모두 제중원이 뿌리라는 것.
대한제국 정부는 1905년 제중원을 미국 북장로회 측으로부터 환수하고, 1907년 대한의원을 개원한다. 이때 세운 건물이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앞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한다.
병원 구내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도 함께 있다. 의대 역사를 살펴보면 두 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선 제중원 시절에 설립한 의학교(醫學校)이다. 의학교는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설립한 관립학교였다. 1910년 한일합방 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이 되고, 의학교 또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가 된다. 1916년에 의학강습소는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한다.
1926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설립된다. 이때 조선총독부의원은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 의원이 된다. 해방 후에 두 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제대 의학부가 통합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발족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 의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됐다.
마을버스 종로12는 병원 구내에 들어서자 속도를 내지 못하고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병원 내에서 속도를 낼 수도 없지만, 병원에 진입하는 차량이 많기 때문이다. 지나는 사람들 표정은 대개 어둡다. 그중에서도 어린이병원 앞 정경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소아청소년과를 지망하는 의사가 부족하다는데 그런 만큼 서울대 어린이병원은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
서울대학교병원은 최초라는 역사와 함께 최고라는 위상도 함께 갖고 있다. 대기업 계열 대형병원과 경쟁 혹은 비교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국가중앙병원으로서 공공의료의 최전선에 서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
근대 교육의 출발점 대학로
대학로는 이름이 상징하듯 도로 인근에 대학교가 많았다. 1907년 동숭동에 공업전습소가 설립됐고, 이 학교는 1916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됐다. 1920년 숭인동(다른 자료는 명륜동)에 경성고등상업학교가 설립됐고, 이 학교는 1944년에 경성경제전문학교로 승격됐다.
경성제국대학도 이 지역에 들어섰다. 1924년에 예과가, 1926년에는 법학부와 의학부가 설치됐다. 동숭동과 연건동에는 9만 2000평 규모의 경성제대 건물들이 들어섰다.
지금의 대학로 일대가 학교촌으로 개발되면서 주변 환경도 크게 변하게 됐다. 연건동과 동숭동을 가르는 대학로는 원래 ‘홍덕동천’이라는 하천이 흘렀다. 혜화동 로터리와 이화동 사거리 구간의 하천은 1918년과 1931년 사이에 단계별로 복개돼 도로가 됐다.
이화사거리에서 충신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가는 구간은 ‘대학천’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1970년대에 복개됐다. 2010년대 초반까지 ‘대학천길’로 불렸지만 종로39길로 변경됐다. 도로가 직선이 아니라 휘어지는 모습에서 옛 하천의 물길 흐름을 알 수 있다.
대학로 인근에는 학교 교원들을 위한 관사지도 개발됐는데 국가기록원에서 동숭동에 있었던 공업전수소 관사 배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서면서 관사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당시의 관사들을 근대 주거 공간 관점에서 연구한 건축학 연구 문헌들이 많다.
해방 후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가 출범하게 된다. 이때 경성제국대학은 물론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를 통합해 국립대학이 됐다.
위에서 언급한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서울대 공대로, 경성경제전문학교는 서울대 상대로 통합된다.
1975년 대학로에 캠퍼스가 있던 서울대 문리대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관악산 아래로 이사했다. 이에 대해 유신 시국과 관련 있다는 해석이 있다. 동숭동이 서울 도심과 가깝고 사람들이 모이기 쉬워 당시만 해도 외진 관악산 자락이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데 수월하기 때문이었다는 것.
서울대가 떠나간 후 조성한 게 마로니에공원이다. 대학로라는 도로명은 1985년 5월에 붙여졌는데 옛 서울대 자리에 들어선 방송통신대학교가 대학로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방통대의 별관인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 1912년에 건축한 목조건물이 대학로의 지난 세월을 상징하는 듯하다.
쾌유의 소망을 담고 달리는 마을버스
마을버스 종로12는 율곡로의 율곡터널을 지난다.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의 율곡로 구간에 원래는 터널이 없었다. 종묘와 창덕궁을 연결하기 위해 상부를 지붕으로 덮고 터널로 만든 것이다. 종묘와 창덕궁은 원래 한 몸이었고 그 아래를 지나는 도로는 없었다.
하지만 1932년 조선총독부는 종묘와 창덕궁 사이를 허물고 창경궁으로 격하시킨 창경원까지 전차를 연결했다. 그전에 동숭동과 혜화동 일대는 종로통을 멀리 돌아서 가야 하는 외진 곳이었다. 그런 면에서 종묘를 관통하는 이 도로는 동숭동과 연건동이 학교촌으로 발전하는 것에 크게 이바지했다.
창경궁과 서울대병원을 가르는 도로변에는 약국들이 나란히 들어섰다. 대학로 쪽 도로변과 골목 안에도 약국들이 있다. 종로12를 타고 서울대병원에 가는 승객 중 일부는 병원 용무를 마치고 들려야 할지도 모르는 곳이다. 마을버스 종로12는 쾌유의 소망을 연료 삼아 달릴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