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다. 외출보다는 집에 머물러야, 모이기보다 흩어져야 하는 게 미덕인 상황이다. 하지만 전염병도 태국 청년들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공권력의 잔인한 물대포 앞에서도 이들은 정치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달 15일(현지 시간) 태국 방콕에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시민들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막기 위해 헬멧을 착용했다. (사진=AP/뉴시스)
지난달 15일(현지 시간) 태국 방콕에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시민들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막기 위해 헬멧을 착용했다. (사진=AP/뉴시스)

8일(현지 시간) 방콕포스트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방콕 시내 민주주의 기념탑 앞에 모여 시위를 진행하던 시민들은 왕실 자문기관인 추밀원 쪽으로 행진했다. 영국 로이터통신이 추산한 시위대 인원은 약 1만 명이다. 시위대는 대학생 등 젊은 청년들이 주축이다.

태국의 10·20 세대가 시위를 통해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현 총리 퇴진 ▲ 국회 해산 및 총선 실시 ▲ 왕실 개혁 ▲ 헌법 개정 ▲ 민주 인사 탄압 중단 등이다. 정치와 왕실 개혁, 민주주의 확립 등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경찰은 이들을 막기 위해 왕실로 향하는 길목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옮기려고 하자 물대포를 발사했다. 국내 언론에서는 지난 정권이 서울 종로구 광화문 등지에서 진행된 대규모 집회에 사용한 물대포를 빗대어 이를 ‘K-물대포’라고 불렀다. 태국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K-물대포를 발사한 건 지난달 16일 이후 두 번째다.

국내에서는 현 정부 들어 사실상 사라진 물대포 시위 진압이 ‘인도차이나 반도의 맹주’ 태국에서 다시 부활한 상황. 정부 당국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강력한 조치를 취하는 것일까. 태국 청년들은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 것일까.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해 3월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달 19일(현지 시간) 태국 방콕 교외의 한 교차로에 모인 반정부 시위대가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지난달 19일(현지 시간) 태국 방콕 교외의 한 교차로에 모인 반정부 시위대가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헝거게임과 소녀시대의 공통점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 따르면 지난 총선에서 진보 성향의 퓨처포워드당(Future Foraerd Party)은 국회 3분의 1에 해당하는 의석을 얻어 제2 야당이 됐다. 군부의 지지를 받던 현 여권과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계 제1야당으로 양당제가 이어졌던 상황에서 개혁 성향의 제3 정당이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군부는 퓨쳐포워드당 티나톤 중룽르앙낏 대표가 당에 거액을 대출해줬다는 것을 빌미 삼았고, 올해 2월 당을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태국 정부와 왕실의 개혁을 바라는 젊은 층은 퓨처포워드당의 해산에 크게 반발하면서 태국 전역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됐다가 재개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은 영화 ‘헝거 게임’에 나온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독재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또한 걸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면서 민주화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해당 노래는 2017년과 2018년 한국의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와 미투 운동 지지를 위해 부른 바 있다.

민주화의 열망이 거세지만, 태국 당국의 탄압은 만만치 않았다. 물대포 발사와 시위대 체포도 모자라 지난달 15일에는 ‘5인 이상 집회 금지’라는 법적 근거도 부족한 조치를 내렸다. 시위대는 한국어를 비롯해 각국의 언어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며 SNS를 통해 국제 여론에 지지를 호소하는 상황이다.

태국 시민들이 전 세계인들을 상대로 민주화 시위 지지 호소에 나섰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역된 시위대의 입장문. (사진=SNS 캡처)
태국 시민들이 전 세계인들을 상대로 민주화 시위 지지 호소에 나섰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역된 시위대의 입장문. (사진=SNS 캡처)

1987년 6월 그날, 태국에서 재현되나

태국 시민들의 입장문 등에 따르면 군인 출신인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2014년 5월 쿠테타로 집권했다. 이후 시민들은 6년 동안 군부 독재의 억압 하에 살아왔다. 군부를 비판 세력을 탄압하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도 통제됐다. 2017년에는 재집권을 위해 헌법까지 뜯어고쳤는데, 총리를 선출하는 상·하원 750명 총리 중 상원 250석을 군부가 지명할 수 있도록 했다.

군부 독재가 지속하면서 기득권층의 부패와 특권 의식은 커졌다. 일례로 스포츠 음료 레드불의 공동 창업주의 손자는 2012년 뺑소니 사망 사고를 냈지만, 태국 검찰에 의해 불기소 처분되기도 했다. 전형적인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사례였다. 오랜 재수사 끝에 재판에 넘겨졌지만, 유죄 판결을 받을지는 오리무중이다.

문제는 집권 여당뿐만이 아니었다. 태국 왕실은 21세기에 걸맞지 않는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다. 태국 형법에 따르면 국왕이나 왕비의 자유를 방해하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왕실 모독죄’. 이를 어길 시 최대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또한 왕가를 모독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해도 최고 징역 15년형까지 받을 수 있다.

특히 마하 와치랄롱꼰 태국 국왕이 2016년 즉위하면서 왕실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사실상 군부 독재를 왕실이 묵인하고 있는 상황인 데다 마하 국왕의 잦은 이혼과 사치 등이 국민들을 자극했다. 태국에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는 왕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시위대는 입장문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목숨까지 담보로 내걸어 진실의 목소리를 내는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의 외침이 더 널리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지구촌 시민들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하다”며 “1987년 한국의 6월 민주 항쟁과 같이 2020년 태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다시 시작됐다. 이를 널리 알려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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