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정부 철군 결정...탈레반 수도 점령
시민들 망명길 줄이어...여성인권 추락 우려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지지부진한 전쟁 끝에 병력을 철수했다. 미국이 병력을 철수하자마자 들이닥친 건 외세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무장 단체 탈레반이었다. 기나긴 전쟁과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도 꿋꿋하게 나아가던 여성들은 인간의 기본권마저 박탈당할 위기다.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던 아프간의 소녀들은 SNS를 통해 조국의 긴박한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이 수도 카불에 억류됐다가 미군 비행기를 타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사진은 비행기 내부. (사진=트위터 캡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이 수도 카불에 억류됐다가 미군 비행기를 타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사진은 비행기 내부. (사진=트위터 캡처)

18일(한국 시간) 미국 AP통신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재장악 후 첫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탈레반은 앞으로 이슬람 율법 안에서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고 여성의 취업과 교육도 허용할 계획”이라며 “아프간 내 민간 언론 활동도 독립적으로 이뤄지길 원한다. 하지만 기자들은 국가의 가치에 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대변인은 기존 정부군이나 미군 협력자들 역시 사면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AP통신은 탈레반이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유화적인 정책을 발표한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대변인은 이슬람 율법과 국가 가치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여성 인권 존중과 언론의 자유를 분명히 언급했다. 외부로부터 정상 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제스처로 풀이된다는 게 주요 외신들의 전언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누리꾼이 지난 15일 탈레반의 카불 점령 이후와 이전의 CNN 특파원 의상을 비교했다. 탈레반 점령 후 여성 특파원은 히잡으로 머리를 가렸다. (사진=트위터 캡처)
아프가니스탄의 한 누리꾼이 지난 15일 탈레반의 카불 점령 이후와 이전의 CNN 특파원 의상을 비교했다. 탈레반 점령 후 여성 특파원은 히잡으로 머리를 가렸다. (사진=트위터 캡처)

하지만 탈레반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트위터 등 SNS상에서는 탈레반 대변인의 발언과 정반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수도 카불 공항에서 다치거나 사망한 시민들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과 미군 비행기를 타고 가까스로 카불을 떠난 이들의 사진 등이 올라오고 있다. 탈레반 점령으로 혼란스러워진 아프간 상황은 누리꾼들과 저널리스트 등의 개인 계정을 통해 SNS상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아프간 누리꾼들이 SNS를 통해 공개하는 장면에는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한 아프간 누리꾼은 탈레반 점령 전후 여성 앵커의 달라진 복장을 비교하는 사진을 올려 탈레반 점령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렸다. 또 다른 누리꾼은 무장 군인 앞에서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여학생들의 시위 장면을 올리기도 했다.

그 밖에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아프간 소녀는 “우리는 아프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취급을 당하고 있다. 전 세계가 우리를 버렸다”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SNS에 게재해 안타까움을 샀다.

아프가니스탄 소녀로 추정되는 여성이 자신의 SNS에 탈레반 점령 상황에 대해 절망하는 동영상을 게재했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아프가니스탄 소녀로 추정되는 여성이 자신의 SNS에 탈레반 점령 상황에 대해 절망하는 동영상을 게재했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아프간 여성인권 추락의 원죄

유독 아프간 여성에 대한 게시물이 SNS에서 화제가 된 이유는 탈레반의 원죄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초 소련 점령기 이후 파키스탄 북부에서 처음 등장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법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들은 군사력을 앞세워 1998년까지 아프간 영토 90%를 장악했다. 소련 점령에 환멸을 느꼈던 민심은 처음에는 탈레반을 지지했다가 지나친 이슬람 교리 해석으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탈레반 집권기로 지칭되는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간 여성들의 인권은 추락했다. 여성은 몸 전체를 덮는 부르카를 입고 남성 가족과 동행을 해야 외출이 가능했다. 이를 어긴 여성들은 탈레반 무장 군인으로부터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10세 이상 소녀들은 교육 기회를 박탈당했고, 성인 여성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남성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도 없어 수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간통 등의 이유로 여성을 돌로 때리는 반인륜적 형벌도 집행됐다.

탈레반 무장 군인 앞에서 아프가니스탄 여학생들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사진=트위터 캡처)
탈레반 무장 군인 앞에서 아프가니스탄 여학생들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사진=트위터 캡처)

여성에게 더욱 가혹했던 탈레반 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9·11 사태였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아프간을 침공했고, 탈레반 정권은 그해 12월 붕괴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미군 철수 계획 발표를 하기 전까지 아프간은 20년 동안 미군 점령 하에 있었다. 

미국과의 지난한 전쟁이 이어졌지만, 그 사이에 아프간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았고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 됐다. 여성 의료인은 물론 경찰 등 공무직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증가했다. 최근에는 아프간 최초로 여성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가 2020년 도쿄 패럴림픽 출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탈레반 점령 이후 사실상 출전 무산 위기에 처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철군 결정 이후 서서히 세력을 키운 탈레반은 이달 15일 수도 카불까지 점령했다. 탈레반에 점령된 아프간에서는 연일 충격적인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아프간을 떠나려는 시민들이 비행기에 무리하게 오르려다 추락사한 사실이 매체를 통해 보도됐고, 여성의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의 가격이 폭등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전쟁을 중단하려던 바이든 대통령은 아이러니하게도 집권 이후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오늘도 안녕하지 못한 아프간 상황에서 소녀들은 목숨을 걸고 SNS로 국제 사회에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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