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탄생 575돌...정부기관부터 일상까지 전방위 홀대 여전
“공공 자료마저 한글 대신 외래어 표기, 국어기본법 위반 한 것”

본지는 지난 7월부터 ‘쉬운 우리말 공공문서’ 기획 기사로 한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왔다. 모든 국민이 우리말 공공문서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행정업무에서 널리 쓰이는 일본어식 표현, 한자 등을 지적하고 쉬운 우리말로 수정하도록 권고했다. 아무리 세계 언어 석학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멀리하면 점점 잊히지기 때문이다.

워싱턴타임스 서울특파원으로 한국에서 30년은 지낸 마이클 브린은 한국인조차 모르는 한국의 강점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맹률이 1%인 나라’를 꼽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부심은커녕 한글의 고마움을 잊고 산다. 한글 열풍은 유럽까지 퍼져 나가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여전히 찬밥신세다.

10월 9일 제575돌 한글날을 맞아 우리말과 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포스트는 일상에 파고든 한글 파괴 현상 및 과제를 짚고, 한류의 축으로 자리잡은 한글에 대한 고마움과 우수성을 되새겨 본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오백일흔다섯돌 한글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특별히 올해 한글날은 주말과 대체 휴일이 맞물린 연휴라서 시민들의 기대가 크다. 하지만 한글날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단순히 하루 놀기 위함이 아니다.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기리기 위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이다. 

세종대왕 상. (사진=뉴스포스트 DB)
세종대왕 상. (사진=뉴스포스트 DB)

우리가 매년 10월 9일마다 맞이하는 한글날. 자연스러운 연례 행사처럼 느껴지지만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어연구회가 주축이 돼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이라고 정했고, 2년 후인 1928년 명칭을 한글날로 바꿨다. 당시 한글날을 기리는 것은 목숨을 내걸어야 할만큼 위험했다. 우리 글을 말살하려고 했던 일제 치하에서는 한글 자체가 민족 의식 고취와 독립 의지의 상징이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지켜진 한글날은 광복 이후인 1946년부터 훈민정음 창제일에 가깝게 환산된 10월 9일에 거행됐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는 공휴일의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경제활동에 지장이 생긴다는 재계의 압력으로 이듬해부터 한글날은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2013년 다시 공휴일로 지켜지기 전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숱한 어려움에도 매년 기려 온 한글이지만 정작 국내에서 한글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특히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TV 방송 프로그램부터 정부, 광역자치단체까지 한글 파괴 현상이 전방위에 만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일 한글 단체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은 우리 말과 글을 해치는 ‘으뜸 헤살꾼’으로 청와대를 선정했다. 정부가 ‘벤처’나 ‘뉴딜’과 같은 불필요한 영단어를 정부 부처나 정책 명칭에 넣고, 청와대 안 손님맞이 한옥에 걸린 ‘常春齎’란 한자 현판을 한글로 바꿔달라는 시민단체의 건의를 무시했다는 게 선정 이유다.

청와대에 이어 중소벤처기업부 소속 서울창조혁신센터와 국가기술표준원, 기획재정부, 문화재청을 ‘헤살꾼’으로 꼽았다. 이들 대부분 기관은 정책 광고문이나 알림 글에 한글이 아닌 영문을 그대로 사용했던 전례가 있다. 단체는 “미국 공공기관의 알림글로 보일 정도”라며 “이런 공공기관은 셀 수 없이 많다”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사용하고 있는 어려운 용어들 사례. (제공=조경태의원실)
교육부가 사용하고 있는 어려운 용어들 사례. (제공=조경태의원실)

전 분야에 스며든 ‘한글 홀대’...“윗물이 맑아야”

교육기관에서도 한글 홀대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언어 사용을 지도해야 할 교육기관이 한글파괴 행위에 앞장서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에 따르면, 2020년 교육부가 시행했던 사업명 중 영어와 정체불명의 합성어를 조합한 한글파괴 용어들이 상당수였다. 예를 들면,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를 뜻하는 ‘K-MOOC’, 교육(Education)과 기술(Technology)를 합성한 ‘K-에듀테크’, 우리(We)와 교육(Education)을 합성한 ‘Wee프로젝트’, 산업-교육간 직무교육 프로그램을 뜻하는 ‘매치業’ 등이다. 지난 8월 경기도교육청은 대표 교육사업인 강좌 제공을 홍보하며 Let’s go의 한글 표기와 한자 高를 합성한 ‘렛츠高’를 사용하기도 했다.

시민들이 시청하는 방송에서도 한글 파괴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인기 예능 프로그램들의 자막이 한글을 파괴한다며 ‘주의’를 내린 바 있다. 문제 삼은 표현들은 ‘딥빡’, ‘프로 불편러’, ‘핵인싸’, ‘RGRG(알지 알지)’, ‘Pa스Ta(파스타)’, ‘Aㅏ’, ‘ㄴㄴ’등이다. 정체불명의 신조어와 불필요한 외국어 혼용 등을 지적한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 안이 아닌 일상 곳곳에서도 외국어를 남발하는 사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표기된 간판들이 대표적인 예시다. 2019년도 기준 서울시 12개 자치구 7,252개 간판 대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국어 간판은 23.5%(1,704개), 병기 간판은 15.2%(1,102개)로 나타났다. 

한글문화연대는 <뉴스포스트>와의 통화에서 “윗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 등 이들이 올바른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해야 한다. 정부 보도 자료만 봐도 한글 대신 로마자를 표기하는 사례가 수없이 많다. 이는 국어기본법을 위반 한 것”이라며 “국어기본법 14조 1항에 따르면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 이를 위반한다고 처벌을 받는 건 아니지만, 나라에서 법 규정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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