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범(87)·강용배(89)·김종환(90세)·김명자(90세) 6.25전쟁 참전 용사 인터뷰
전역 후 한국은행·외환은행·통신공사·언론사·델타항공 근무하며 국력 회복 선봉

우리나라는 지난 2017년 전체 인구의 14%가 65세 이상 노인에 해당하는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통계청은 우리나라가 오는 2025년이면 전체 인구의 20%가 노인에 해당하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이라 분석했다. 문제는 사회가 고령화됨에 따라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 사이의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 세대는 ‘틀딱충’, ‘할매미’, ‘연금충’ 등 원색적인 노인혐오 표현을 일삼고 있다. 일부 노인들의 잘못된 행태를 전체 노인으로 확대하는 노인혐오 문제는 이제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됐다.

<뉴스포스트>는 일방적으로 비난받는 노인의 젊은 날을 조명한다. 우리 금수강산에 뿌리 뻗고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낸 노년 세대를 만나 한때 청년이었던 이들의 삶을 소개한다. 젊어 봤던 노년 세대의 청년 시절을 소개함으로써, 세대 간 간극을 좁히고 서로를 이해하는 장을 마련한다. - 편집자주

[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오는 6월 25일은 6.25전쟁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은 선전포고 없이 38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했다. 북한 김일성과 소련 스탈린, 중국 마오쩌둥이 세운 암호명 ‘폭풍’ 아래 실행된 남침이었다. 이에 대한민국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물러나 대구와 부산을 수성하기 급급했다.

이인범 6.25전쟁 참전 용사가 '9.28서울수복' 태극기 게양식을 재연하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이인범 6.25전쟁 참전 용사가 '9.28서울수복' 태극기 게양식을 재연하고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춘천-홍천 전투 △다부동 전투 △장진호 전투 △지평리 전투 △설마리 전투 △인천상륙작전 △백마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등은 6.25전쟁 당시 수많은 아군과 적군의 목숨을 앗아간 생사의 현장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까지 국군과 유엔군만 17만5천여 명이 전사했다. 민간 피해도 컸다. 10만 명의 전쟁 고아와 30만 명의 미망인,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뉴스포스트는 지난 1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만났다.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소재 전쟁기념관에서 진행된 이날 인터뷰에서 △강용배(89세) △김종환(90세) △김명자(90세) △이인범(87) 등 네 명의 참전 용사들은 아직도 생생한 전쟁의 기억을 전하며 “청년들이 호국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인범 “인민군 폭격한 전투기 폭탄들, 제 손으로 직접 달았죠”


이인범 용사는 15살에 6.25전쟁 참화를 겪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이인범 용사는 15살에 6.25전쟁 참화를 겪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이인범 용사는 15살 때 6.25전쟁과 마주했다. 본래 평안북도가 고향이었던 이인범 용사의 일가족과 지인들은 1948년 월남했다. 월남 후 이 용사의 형과 지인들은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해 대한민국 국방을 수호했다.

이인범 용사는 “6.25전쟁 발발 당시에 중학생이었는데 형님과 형님 친구들이 모두 군인이었던 터라, 8사단 정보참모에게 나도 국군에 들어가 인민군과 싸우고 싶다고 얘기했다”면서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대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담했다”고 토로했다. 어린 나이 때문에 국군이 되지 못한 이인범 용사는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강릉에서 부산까지 피난을 떠나야 했다.

부산 피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이인범 용사는 생존을 위해 신문 배달과 부두 노동을 하면서 고학했다. 특히 30만 중공군의 공세에 국군이 38선 이남까지 퇴각한 1951년 ‘1.4후퇴’ 때는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에 운집해, 어린 이 용사도 통나무 위에 가마니 하나를 깔고 겨울을 나야 했다.

삶의 터전이었던 강릉이 수복된 이후 이인범 용사의 일가족은 다시 강릉으로 돌아갔다. 이 용사는 다시 돌아온 강릉에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강릉 비행장에 운집한 전투기에 직접 폭탄을 조립해 장착한 것이다.

이인범 용사는 “강릉 비행장에서 폭탄에 휴즈를 조립한 뒤, 인민군을 폭격하는 전투기에 직접 손으로 폭탄을 달았다”면서 “비행기 1대당 최대 10개까지 달곤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민군과 중공군이 강릉으로 진격한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칼빈 소총을 들고 비행장을 밤새 지키곤 했다”고 덧붙였다.

1953년 휴전 협정 체결 이후 군대를 갈 수 있는 나이가 된 이인범 용사는 4년 동안 공군 병사로 복무하다, 미 공군 기지가 있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1년 동안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했다. 이후 10년을 더 공군에 몸담았다.

이인범 용사는 “당시엔 나라가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상태라 장교고 병사고 영양실조에 걸려 비쩍 마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장교라고 해도 한 달 월급 5천 원으로는 월세와 생활비도 내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생계가 힘들었지만 금방 통일이 될 줄 알고, 통일될 때까지만 국군에 있자고 다짐했는데 14년이 지나도 통일되지 않았다”면서 “결국 생계를 위해 전역했다”고 토로했다.

영어를 잘 했던 이인범 용사는 퇴직 후 외국계 회사에 취업했다. 어린 시절 강릉 비행장에서 일하며 배운 영어와 미 공군 기지에서 1년 동안 받은 영어 교육이 영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인범 용사의 마지막 회사는 글로벌 항공사 델타항공이었다. 델타항공 한국지사의 재무담당이었던 이 용사는 상무이사로 정년퇴직했다. 이 용사는 “퇴직 후 처음엔 외국계 발전소 건설 회사에서 재무를 봤는데 공군 장교 월급보다 10배가 더 많았다”면서 “델타항공에서 일하면서 대한민국이 대통령 전용기도 없던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종환 “군번도 없는 학도병에서 인천상륙작전 영웅됐어요”


'이름 없는 학도병'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이 된 김종환 용사.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이름 없는 학도병'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이 된 김종환 용사.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김종환 용사는 대구중학교(당시 5년제) 3학년 재학에 중이던 19살에 6.25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김종환 용사는 “당시 담임 선생님인 손영구 선생님이 너희들 군대 자원하고 싶으면 대구농림중학교로 가라는 말에 바로 친구 4명과 함께 학도병으로 자원했다”고 말했다.

김종환 용사가 인민군을 처음 마주한 장소는 경북 포항 북구 기계면이었다. 김 용사 등 학도병들은 기계면의 한 사과밭에 자리 잡고, 431미터 고지를 차지한 인민군들과 10여 일 넘는 교전을 이어갔다.

김 용사는 “당시가 7월이었는데 기계면 부근에 큰 소나기가 사흘 동안 쏟아졌다”면서 “물어난 물에 여기저기 방치된 학도병들과 농부들의 사체가 쓸려 내려오곤 했다”고 전했다. 이어 “한창 전투 중인 8월에 별안간 부대가 부산으로 이동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김종환 용사가 속한 국군 제17연대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미 제10군단 예하로 편성된 데 따른 이동이었다. 김 용사는 “처음엔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 신식 무기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면서 “그때까지 군번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군번을 받고 미제 군복과 방탄까지 받았다”고 했다.

1950년 9월 18일 인천에 상륙한 제17연대 소속 김종환 용사는 서울 수복을 위한 수색대로 활약했다. 17연대의 한강 도하를 위해 인민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선발대 역할을 한 것이다.

김 용사는 “당시 나와 김종오 분대장, 이보검이란 내 중학교 동창 등 세 명이 수색대로 인민군을 정찰하는 임무를 맡았다”면서 “서울 양재동에서 정보를 수집해 17연대가 서울을 수복하는 데 앞장섰다”고 했다. 이어 “서울 수복하고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군까지 수색대로 갔는데 거기서 인민군 패잔병 무리를 마주쳤다”고 말했다.

숲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수많은 인민군 패잔병의 모습에 김종환 용사 등은 보고를 위해 본대 복귀를 서둘렀다. 그러다 인민군이 쏜 기관총에 중학교 동창이자 전우였던 이보검 용사가 쓰러졌다.

김 용사는 “김종오 분대장이 왼쪽, 내가 가운데, 친구 이보검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기관총 소리가 들리자마자 친구가 퍽 하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면서 “나와 분대장은 살기 위해 뛰었다”고 했다. 이어 “지금도 손 한 번 못 잡아주고 흙 한 줌 덮어주지 못한 보검이가 생각난다”면서 “인민군 기관총에 어디를 맞아 쓰러졌는지 아직도 모른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김종환 용사는 휴전 협정 이후 전역해 체신부와 향후 체신부에서 분리된 한국전기통신공사에서 36년 동안 일한 뒤 정년퇴직했다. 김 용사는 재직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로 ‘남북한 통신 교환’ 사건을 꼽는다. 당시 담당과장이었던 그는 “내가 ‘남쪽 대표 김종환이요’라고 말했을 때 감회가 정말 새로웠다”고 말했다.
 


강용배 “총포 오가는 최전방 방어기지 구축, 목숨 걸고 했죠”


강용배 용사는 인민군의 여의도비행장 폭격과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등 굵직한 6.25전쟁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강용배 용사는 인민군의 여의도비행장 폭격과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등 굵직한 6.25전쟁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서울 영등포가 고향인 강용배 용사는 6.25전쟁 발발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8살이었던 그의 눈앞에서 여의도비행장을 폭격하는 인민군 전투기들을 목격한 것이다.

강용배 용사는 “일요일 아침에 밖에 나가보니 인민군 ‘야크기’가 와서 기관총을 쏘면서 여의도비행장에 폭탄을 떨구는 것을 봤다”면서 “지금 생각해도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괴이한 풍경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튿날 내가 다니는 성남고등학교에 갔더니 일단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면서 “집으로 가려면 영등포역을 지나야 하는데, 영등포역 인근 야산에 도착하자마자 인민군 야크기가 영등포역을 폭격하는 걸 눈앞에서 또 봤다”고 했다.

1950년 6월 28일 강 용사는 새벽에 ‘꽝’하는 폭발음과 진동에 잠을 깼다고 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현장 소리였다. 그날 낮 강 용사 일가족은 대구로 피난길에 오른 뒤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수복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상 회복을 위해 애쓰던 강 용사가 6.25전쟁에 참전한 계기는 ‘중공군’ 때문이었다.

강용배 용사는 “유리하던 전황이 30만 중공군의 공세로 갑자기 불리해졌다”면서 “이러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전장으로 향했다”고 했다. 강 용사는 국군 입대를 위해 영등포에서 동대문, 여주, 이천, 장원, 충주, 문경을 거쳐 경남 진주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진주에 있는 국민방위군 교육대에 합류하기 위해서다.

병사로 복무하던 강 용사는 이후 ‘눈에서 불이 날 강도’의 훈련을 했던 ‘하사관 교육대’를 졸업하고 ‘일등중사’가 돼 간부로 활약했다. 강 용사는 “부산에서 공병 일등중사로 임관한 뒤 바로 최전방에 투입돼 진지구축 작업을 했다”면서 “인민군들이 500미터 앞에서 총포를 쏴도 국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고 말했다.

이후 강 용사는 연천에서 포천으로 향하는 국군의 퇴각로를 건설하는 작업에 투입된다. 본래 2년이 걸리는 작업을 7개월 만에 완수했다. 그는 “인민군이 연천까지 내려오면 연천에 주둔한 국군과 유엔군 몇 개 사단이 퇴각로가 끊겨 전멸할 수 있는 위기였다”면서 “공병 전우들과 밤새 산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길 내고, 자갈 깔면서 2년이 걸리는 작업을 7개월 만에 끝냈다”고 설명했다.

공병으로 활약을 인정받는 강 용사는 국군이 활용하는 지도를 만드는 육군본부 직할대대인 측지부로 발령받아 남북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제작했다. 전역 후에는 한국은행에 입사해 8년간 일했다. 이후 외환은행이 한국은행에서 분리될 당시 외환은행으로 소속을 옮겨 22년을 재직했다. 한국은행과 외환은행을 합쳐 은행원으로 30년을 근무한 뒤 정년퇴직한 셈이다.

강 용사는 “전쟁 당시를 생각하면 살아남은 게 죄스러울 정도”라면서 “옆에 있던 가족이, 친구가, 그냥 멀쩡히 걷다가 인민군 총포에 퍽퍽 쓰러져 죽어나가는 건 말로만 듣고는 실감이 나지 않는 충격”이라고 전했다.
 


김명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으로 활약했어요”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으로 활약한 김명자 용사.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으로 활약한 김명자 용사.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김명자 용사는 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살에 6.25전쟁을 맞았다. 김 용사는 “제가 대구에 살고 있었는데도, 6.25전쟁이 발발했던 걸 알았다”면서 “인민군 포 소리가 대구까지 들렸다”고 했다.

김 용사는 “전쟁이 난 그해 8월에 여자 의용군을 모집해 지원했다”면서 “400명이 지원했는데 200명만 뽑았다”고 했다. 이어 “지금은 여군이 제도화됐지만, 당시는 여자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뽑았다”면서 “여자 의용군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여자 의용군 1기인 김명자 용사는 “당시만 해도 남존여비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면서 “남존여비 시대니까 여자는 학교 졸업하면 자수 배우고 시집가는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성별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여자 의용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여자 의용군으로 활약하던 김 용사는 후방에서 행정과 통신을 담당하다, 장교 시험을 본 뒤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정훈장교로 진중신문을 만들며 전투에 지친 전우들을 위로했다.

김명자 용사는 북한 상공을 돌며 인민군을 상대로 ‘삐라’로 불리는 전단지를 살포하기도 했다. 김 용사는 “미군 수송기를 타고 쌀가마니에 담긴 수천 장의 삐라를 살포하곤 했다”면서 “그러다 인민군이 쏘는 총포에 격추될 위험도 겪었다”고 전했다. 정훈장교에서 보급장교로 보직을 옮겨 복무하던 김명자 용사는 1956년 대위로 전역했다. 전역 뒤에는 대구매일신문 문화부 기자로 재직했고, 출판사에 근무하기도 했다.

김명자 용사는 “지금 자유민주주주의 시대는 정말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결실”이라면서 “나라가 없는 설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다. 이어 “내 젊은 날은 일제강점기 풍파와 6.25전쟁 참화 속에 흘러갔다”고 말했다.
 


6.25전쟁 참전 용사들 “청년들, 나라 사랑하고 호국정신 잊지 말기를”


인터뷰가 끝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비를 통과해 가는 김종환 용사의 뒷모습. 이날 참전 용사들은 청년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 던진 순국선열들을 기억하고, 호국정신을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인터뷰가 끝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비를 통과해 가는 김종환 용사의 뒷모습. 이날 참전 용사들은 청년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 던진 순국선열들을 기억하고, 호국정신을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 (사진=뉴스포스트 이상진 기자)

이날 인터뷰를 통해 6.25전쟁 참전 용사들은 한목소리로 청년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고 호국정신을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종환 용사는 “여러 전투에서 총알이 날 피해간 덕분에 내가 아직 살아있다”면서 “국가를 위해 항상 최전방에 몸을 던졌다”고 했다. 이어 “우리 청년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정도를 걷는다면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서 “또 큰 사람이 되려면 나라와 국가를 위해서 싸울 줄 알아야 한다”고 전했다.

이인범 용사는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면서 외국 출장도 자주 다녔지만, 대한민국만큼 잘 살고 안전한 나라를 찾기 쉽지 않다”면서 “195개 국가 가운데 경제가 10위권이라는 건 굉장히 잘 사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지만, 순국선열에 감사함을 느끼고 나라를 위해 애쓴다면 지금 이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강용배 용사는 “전쟁은 실제로 겪어봐야, 정말 심각하고 잔인한 단어라는 걸 안다”면서 “이런 전쟁을 막기 위해선 청년들이 중심이 돼서 국가 안보의식을 철두철미하게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자 용사는 “지금 대한민국을 보면 정치는 당파 싸움에만 바쁘고, 집을 사고 투기하는 데만 열정을 쏟는 것 같다”면서 “우리처럼 나라 잃은 설움을 겪지 않으려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호국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저작권자 © 뉴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