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 그리고 지영

환을 처음 보았던 그 해 가을은 어느 해 보다 유난히 내장산단풍이 아름다웠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내장산의 단풍과 그것에 따른 다양한 행사들을 보도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에 바빴다.

부부사랑축제, 내장산가요제, 단풍미인 선발, 백일장, 풍물놀이... 그 중 백일장은 J시 인근에 있는 학교의 학생들에게도 특별한 관심거리였다. 각 학교의 문예반 아이들이 매년 그 행사를 대비해 준비를 할 정도였으니. 나와 지영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난 그 해에 안타깝게도 백일장에 참가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버스에서 내려 곧바로 백일장으로 향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긴 그랬더라면 환을 만나진 못했겠지만.

그때 나와 지영은 단풍터널 속으로 빠져드는 인파에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백일장 마당으로 향하는 대신 붉게 타고 있는 단풍나무터널을 지나 사찰 입구까지 걸어 올라갔으니. 마침 올라간 사찰 입구엔 가을국화가 한창이었다.

붉은 단풍나무 밑의 단아한 국화송이는 뭔가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뭐랄까, 절제된 성숙함이랄까. 그것은 고고한 여인의 자태이기도 했다. 팜므파탈과 같은 화려한 단풍나무속의 고고함은 특별한 아름다움이었다.

특히 향기는 기가 막혔다. 향기에 취해 그만 나도 모르게 꽃송이에 손을 내밀고 말았다. 아니, 머리를 숙여 향기를 맡았던가.

그때였다, 뭔가가 내 이마 위를 날쌔게 치고 오르더니 순식간에 바늘에 찔린 것 같은 심한 아픔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땅벌이었다. 얼굴을 감싸 쥔 채 방방 뛰었다. 이마가 불에 데이는 것처럼 뜨겁고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와 다짜고짜로 얼굴을 감싸 쥔 내 손을 확 뜯어냈다. 아, 상큼한 솔향기와 함께 내 이마 위로 솜털처럼 간지러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뜨겁고 아린 고통이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키가 멀대 같이 큰 남자애였다. 질끈 감은 눈을 떴을 때 가을빛처럼 깊고 맑은 갈색의 눈빛이 날 향해 빙그레 웃고 있었던 것이다.

“벌침을 뺀 거야.”

환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그렇지만 그날 난 부끄러움과 황당함으로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환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그 다음 해인 여고 2학년 겨울이었다.

첫 교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7교시를 끝내고 종례를 마치는 시간까지도 내렸다. 그래서 내가 교문을 나올 쯤에는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설국으로 변해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s읍에 매년 찾아오는 폭설이 그렇게 특별할 건 없었다. 그런데도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학생들은 그 해 첫 폭설에 감탄의 비명들을 질러댔다. 더욱이 내게 그날의 눈은  특별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묘사한 설국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폭설이었으니, 환이가 그 설국 안에 있었던 것이다.

“작년보다 많이 자란 것 같네, 그렇지만 너라는 건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겠다.”

상큼한 솔향기와 함께 날렵한 콧날 위로 깊은 갈색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환은 지난 가을 처음 봤을 때에도 반말이었다. ‘벌침을 뺀 거야.’

“언제 봤다고...”

애써 대적할 말을 찾으며 시큰둥하게 말을 놓았다. 언제 쫒아왔는지 내 옆에 선 지영이 붉어진 내 얼굴을 날선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오자 나보다 한 학년 높았던 환은 k시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말이면 종종 s읍인 여교 앞에서 날 기다렸다. 아니, 우릴 기다렸다고 해야 맞겠다. 지영이도 내가 환이를 만나는 것에 거리낌 없이 끼었다는 얘기다. 그것도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우습게도 지영이는 환이와 만나는 날이면 가방 안에 사복을 넣어오는 걸 잊지 않았다. 목둘레가 레이스로 곱게 장식된 하얀 블라우스며, 원피스, 물이 곱게 빠진 청바지, 그리고 연한 소라색의 후드티, 가슴이 넓게 파진 브이넥 카디건까지.

카디건을 입는 날은 멋스러운 스카프연출법으로 도회적인 멋을 풍기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그런 그녀의 대담성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부러웠다.

내게 그 같은 옷이 있다고 해도 난 그녀처럼 학교 규칙을 어길 엄두는 꿈에도 생각 못하는 소심쟁이였으니. 물론 그녀의 그런 요란함은 종종 내가 이몽룡과 성춘향이 사이에 낀 향단이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 신경 쓸 것은 못되었다.

더구나 환이를 가운데에 두고 지영이와 견제할 만큼 환이가 내게 특별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으니.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이는 점점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눈빛, 부드러운 목소리, 눈부시게 하얀 미소... 언제부턴가 그의 모든 것들은 항상 나를 향해 있었고 난 그걸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눈치 빠른 지영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백치 같은 하얀 미소로 나와 환이의 얽히는 시선들을 모르쇠 했다. 그러니 나 역시 지영이 환이에 대한 태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내 자만이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