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리더론⑥] 평범함으로 천재를 넘어선 ‘유비’(下)
[삼국지 리더론⑥] 평범함으로 천재를 넘어선 ‘유비’(下)
  • 홍성완 기자
  • 승인 2019.07.10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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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적이지 않은 생각으로 객관적 안목 갖춰
-거시적 안목과 인내력으로 만들어 내는 탄탄한 내실
-천재 조조의 중국 통일을 막아낸 적벽에서의 승리
-돗자리 장수에서 촉한의 황제가 되기까지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에서 삼국지와 관련된 책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 많은 영웅들과 호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호족과 군벌세력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때의 이야기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건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이 현 시대에도 많은 의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건 유비와 조조, 그리고 손권 정도다. 삼국지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연의’(이하 ‘연의’)인데, 현재 많은 사람들이 연의에 대해 ‘역사를 바탕으로 한 허구소설’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연의를 통해 중국의 삼국시대가 알려졌고,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어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연의로 인해 진수가 집필한 정사 ‘삼국지’(이하 ‘정사’)까지 주목을 받았다. <뉴스포스트>는 창간을 맞아 삼국지의 연의와 정사 등을 통해 중국 삼국시대 인물들을 조명하고, 경영자들과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한다. (편집자주)

유비 상상도 (출처=위키백과)
유비 상상도 (출처=위키백과)

▲ 최후의 위기이자 운명의 ‘적벽대전’

[뉴스포스트=홍성완 기자] 조조의 추격을 뿌리친 유비는 조조군에게 막혀버린 강릉성을 포기하고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하구라는 곳에 도착한다. 

여기서 유비의 진가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데, 대부분의 장수들과 가솔들, 그리고 서주에서부터 함께 했던 병사들이 그 혼란을 뚫고 유비에게 돌아왔다는 점이다.

여기에 유기의 군사까지 더해지면서 유비의 군사는 약 2만이 약간 넘는 수준까지 늘어났다. 그렇게 패배하는 상황에서도 이 같은 수준의 군세를 유지했다는 점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과 그런 그들이 강한 충성심을 갖도록 하는 유비의 강점이 잘 드러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손권은 유표의 조문을 핑계로 책사 노숙을 파견한다. 손권 입장에서는 조조의 다음 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조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인물인 유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노숙이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숙은 원래 서주 사람으로 서주대학살 때 강동으로 이주하면서 손권의 책사로 발탁됐다. 따라서 조조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노숙을 형주에 파견했다는 것부터 손권은 이미 유비와 동맹을 맺을 마음을 정해놨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노숙은 유비를 만나러 가기 전 손권에게 “유비는 영웅의 기개를 지닌 자가 조조와의 불화로 유표에게 의탁했으나, 유표는 그의 재능을 질시해 중용할 수 없었다”고 평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조조의 책사였던 곽가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조조에게 했던 것을 비춰볼 때 비록 변변한 기반이 없던 유비였으나 천하에 이름난 책사들은 그의 그릇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적벽에서 유비와 함께 활약하는 주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유는 손권에게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평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쨌든 노숙은 유비를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넌지시 묻는다. 이에 유비는 “옛 친구 오거에게 의지할까 한다”고 답한다.

노숙은 이 같은 유비의 말에 애가 달아 “토로장군 손권께서는 총명하고 인자해 현인을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니 강동의 영웅호걸들이 그에게 귀순했다”며 “이미 여섯 군을 점거하고 정예 군사를 가졌으며 군량도 많아 족히 대사를 이룰 수 있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이어 “지금 유비님께서는 동쪽과 결친해 연합의 우호를 다지고 함께 세업을 이루는 것 만한 것이 없는데, 먼 군에 치우쳐 있고 장차 남에게 병탄될 것이 자명한 오거에게 어찌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손권과 동맹을 맺을 것을 건의한다.

유비는 노숙의 말에 수긍하면서 번구에 군사를 세우고 노숙이 돌아가는 길에 공명을 함께 보낸다. 유비 역시 짐짓 오거에게 의탁하겠다고 했으나, 속으로는 동오와의 동맹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노숙을 따라 손권을 만난 공명은 “유비님을 도와 싸우도록 하십시오.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면 그냥 조조에게 항복하시든가요”라고 말한다.

조조에게 패해 처자식도 못 챙기고 도망갔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한 유비의 사자 주제에 와서 한다는 말이 ‘우리랑 같이 조조랑 싸우든가, 아님 그냥 항복하든가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말을 하니 어떻게 보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손권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군주답게 공명의 도발에도 화를 꾹 참으며 “그럼 유비는 왜 항복은 안하는가”라고 되묻는다.

이에 공명은 “유비님은 뛰어난 영웅인데 어찌 남의 밑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한다. ‘우리 주인은 영웅이라 죽을지언정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너라는 인간은 어떤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이에 손권은 발끈하여 “나는 이미 조조에게 항전할 뜻을 굳혔으니, 함께 싸울 계책을 논의하자”고 말했고, 공명은 이에 “아직 유비님에게는 2만의 병사가 있고, 조조군은 밤낮을 달려 남하했으므로 지친 상황인데다 형주의 인심마저 얻지 못하고 있으니 유씨와 손씨가 힘을 합하면 솥의 세 발과 같은 균형 잡힌 세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화답한다.

이를 들은 손권은 공명의 말을 옳다 여기고 부하들과 유비와 함께 조조와 싸울 구체적인 방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동 대부분의 호족들은 조조와 싸우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할 경우 우리에게 명분이 없다는 점, 그리고 조조가 이미 형주를 얻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의 병력을 막을 마땅한 계책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동오는 일시적으로 난을 피하기 위해 손씨 세력에 가담한 호족들이 이룬 연합체에 가까웠다. 따라서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항전을 할 경우 역적의 편에 서게 된다는 심리적 압박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손권의 사촌형인 손분은 아들을 볼모로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볼 때 그들이 항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손권 입장에서는 아직 강동 호족들에 대한 지배권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의견을 내칠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때 맞춰 조조는 “근래 천자의 말씀을 받들어 죄지은 자를 처벌하고,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니 유종이 손을 모았소. 지금 수군 80만 명의 무리를 다스려서 바야흐로 장군과 함께 오에서 만나 사냥하려고 하오”라는 편지를 보내온다. 

이는 항복하지 않으면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강동을 치겠다는 뜻이 담겨 있던 것이다.

편지 내용을 확인한 장수들도 조조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와 항복해야 한다는 주화파로 나뉘어 분열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손권은 장수들과 호족들의 의견이 좀처럼 통일되지 않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회의 자리를 피하게 되는데, 이때 노숙이 슬그머니 따라 나선다. 

노숙의 뜻을 알고 있던 손권은 노숙의 두 손을 잡고 그의 의중을 물었고, 이에 노숙은 ‘다른 사람들은 항복할지라도 주공(손권)만큼은 항복해선 아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손권은 노숙의 대답을 듣고 다시 한 번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주전론을 강하게 밀어붙이기로 마음먹는다. 바야흐로 삼국시대 3대 전투로 불리는 적벽대전의 큰 결정이 화장실에서 이뤄지는 순간이다. 그것도 남자 둘이 손을 붙잡고 이야기 하는 뭔가 이상한 그림 속에서 말이다.

▲ ‘적벽대전’의 승리, 대반격의 발판 마련

손권은 파양에 있던 주유를 급하게 불러 현재의 상황들을 설명했다. 이에 주유는 사실상 황실의 적인 조조를 이 기회에 무찔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한편, 네 가지의 이유를 들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주유는 첫 번째로 하북을 지배하는 조조는 말을 잘 다루지만 수전에는 익숙하지 않기에 수전에 강한 우리 오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과 북쪽에는 아직 마초와 한등 같은 배후 세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기에 말을 먹일 식량이 부족하여 조조군의 장기인 기병전을 쓸 수 없고, 조조군은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반드시 질병이 돌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손권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천자의 밀명을 받았던 유비와의 동맹으로 인해 조조를 역적으로 몰 수 있는 명분이 생겨났고, 좌중을 압도하는 주유가 조조를 이길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손권은 칼을 뽑아 책상을 내려치면서 “이 시간부터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 탁자 같이 될 것이다”라고 일갈한다.

이렇게 역사적인 유‧손 동맹의 첫 시작과 향후 삼국시대를 이끌어갈 세력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어우러지는 적벽대전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조조와의 항전이 결정되면서 동오 최고의 책사이자 장수인 주유는 3만의 부대를 이끌고 유비가 있는 번구에 합류한다. 

유비는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하고 함께 계책을 논의하자고 제의하는데, 주유는 부서를 떠날 수 없다면서 볼 일이 있으면 직접 오라고 전한다. 어떻게 보면 아랫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그가 ‘할 말 있음 당신이 오라’는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이다.

주유의 태도에 관우와 장비 형제는 격양된 반응을 보였으나, 유비는 달랐다. 그는 “이미 힘을 합치기로 했는데 부르는 것을 안 갈 수 없다”며 혼자 주유를 찾아간다. 보통 관‧장 형제가 함께 가기 마련인데, 그들이 유비를 혼자 보낸 것은 그만큼 주유에 대해 관‧장 형제의 노여움이  컸던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주유를 찾아간 유비는 동오의 군대가 3만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보고 실망한다. 그러자 주유는 “내가 듣기로 유공(유비)은 3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놓고 실제 병력은 겨우 2만에 불과하지 않소”라고 말하며 “내가 조조군을 쳐부수는 것을 지켜보기나 하라”고 핀잔을 준다.

이에 유비는 노숙 등을 불러 함께 논의 하자고 말했지만, 주유는 또다시 “노숙은 명을 받아 움직일 수 없고,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시든가요”라며 “공명도 조금 있으면 올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시오”라고 답한다.
 
이 정도면 공명이 손권을 도발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주유가 유비를 대하는 태도는 도가 지나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유비는 노숙을 부르려고 했던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면서 주유의 엄정함에 오히려 그가 신뢰할 수 인물임을 느끼고 기뻐했다. 

이 정도면 일부 사람들이 ‘호구 유비’라고 폄하하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유비는 권위적인 자존심을 중시하기보다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면서 포용을 우선시 하는 넓은 도량을 지속적으로 보여 왔다. 

유비에게 권위라는 것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허례허식일 뿐이었으며, 이런 유비이기 때문에 사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조조군과 유‧손 동맹군은 ‘적벽(중국 후베이성 남동부)’에서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된다. 

조조군은 주유가 예측한 대로 풍토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에 첫 교전에서는 동맹군이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조조의 대군은 여전히 건재했고, 병력의 차이는 크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손권의 장수 황개가 직접 주유를 찾아와 조조의 수군이 서로 배를 엮고 있다는 점을 들어 화공을 사용하자는 계책을 제시한다. 또한 자신이 직접 거짓 항복으로 조조를 속이겠다고 자처하기까지 한다.

황개가 전쟁을 반대한 주화파였다는 걸 조조도 첩자 등을 통해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따라서 조조가 거짓 항복에 속을 것이라 여긴 주유는 황개의 계책을 받아들여 미리 기름을 가득 태운 배를 준비한다. 

하지만 문제는 바람이었다. 조조군이 장강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동남풍이 불어야 화공이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때는 겨울이라 북서풍이 불고 있었고, 조조 역시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화공을 대비하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이때 제갈량은 자신이 동남풍을 불게 할테니 사흘 후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고 말한 뒤에 단을 쌓고 기도를 시작한다. 이후 정말로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고, 그 틈에 황개는 불붙은 배를 조조군의 배에 충돌시켰다. 

사슬로 엮여져 있던 조조의 배들은 강한 바람을 타고 거세어진 불에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시작했고, 거센 불길은 강 언덕 위 군영까지 집어삼켰다. 

조조군은 혼란에 빠져 도망가기 시작했는데, 때맞춰 주유는 조조군의 퇴로를 차단해 버린다. 이로 인해 조조군은 대부분 죽거나 도망치는 등 전멸당하고 만다.

제갈공명이 도술을 부려 동남풍이 불어오도록 했다는 설정은 연의의 창작으로 사실이 아니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공명이 당시 한 번씩 불어오던 무역풍이 올 시기에 맞춰 이 같은 장면을 연출 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조조군이 무너지자 유비와 주유는 조조를 쫓기 시작한다. 연의에서 조조는 도망가면서도 곳곳에서 “저들이 이곳에 군사를 두었더라면 나는 꼼짝 없이 잡혔을 것이다”라고 비웃다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명이 매복시켜놓은 군사들에게 혼쭐이 나 계속 쫓기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그의 주변에는 10여기에 달하는 군사들만 남아 화용도에 도착했는데, 여기서도 “유비는 내 맞수지만 계책을 쓰는 건 늦다”고 비웃다가 관우를 만나게 된다. 조조는 관우를 보고 옛정을 생각해 보내 달라 간청하고, 관우는 결국 조조를 그대로 보내준다.

사실 이 내용도 연의의 창작 내용이다. 실제로 조조가 후퇴하면서 허세를 부리며 유비를 비웃었다는 구절이 정사에 있긴 하나, 그 외에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다만, 조조가 화용도에서는 걸어서 도망쳤다고 하니 그때의 참상이 말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여하튼 조조의 80만 대군(실제로는 조조군 16만, 형주군 8만 등 총 24만으로 추정한다)은 겨우 5만에 불과했던 유‧손 동맹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로 인해 조조는 형주 대부분 지역에서 지배권을 상실하게 된다.

연의에서는 적벽대전을 대부분 공명의 계략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서술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사나 각종 사료들을 보면 유비와 주유가 가장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싸웠고, 특히 위나라와 오나라 측 기록 모두 조조가 유비에게 패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승리로 유비는 형주 남쪽을 차지한다. 손권은 명목상 형주를 유비에게 임대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이는 손권이 동오 호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비를 방패막이 삼아 조조의 침공을 방비하는 한편, 자신은 내정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는 향후 손권과 유비가 이릉에서 맞붙게 되는 작은 불씨로 작용하게 된다.

▲ 마침내 익주까지… 위‧촉‧오 삼국시대의 도래

적벽대전의 승리로 유비는 오랜 기간의 방랑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비옥한 형주 땅에 정착하게 된다. 아울러 유표 시절부터 형주의 민심을 확보했던 유비는 단시간에 형주를 안정시킨다.

이런 때에 유비에게 익주의 유장이 제휴하자는 제의를 먼저 했다. 유비 입장에서는 알아서 복이 굴러 들어온 것이다.

유장은 덕이 있었으나 정말 능력이 ‘쥐뿔’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중의 장로는 눈엣가시였는데, 이에 유장의 참모인 장송이 유비와 제휴해 장로를 치도록 할 것을 건의했다. 

유장은 장송의 말이 옳다 여기고 유비에게 사람을 보내는데, 후에 유비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법정이란 인물이 사신으로 가게 된다.

장송과 법정은 서로 친분이 있는 관계로, 평소부터 유장이 큰일을 함께하기에는 그릇이 부족하다며 탄식하던 인물들이다. 그런 장송이 유비와의 제휴를 제안하고 법정을 유비에게 파견할 사신으로 추천했으니 당연히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새로운 주인이 익주 땅을 다스리길 누구보다 바랐던 것이다.

여기서 경영자들과 리더들이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있다.

보통 능력 있는 직원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그저 월급이 적거나 애사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떠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는 그럴지 몰라도 대부분의 능력 있는 인재들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곳으로 가기 위해 이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장송과 법정은 이런 축에 속했다. 장송은 안타깝게도 유장을 배신하려다 들켜 처형당하지만, 법정의 경우 유비라는 인물을 만나 날개를 활짝 펴게 된다. 

유비가 후에 익주를 차지한 뒤 한중공방전에서 승리할 때 가장 큰 공로를 세우는 이 중에 하나가 바로 법정이다.

많은 경영자들은 인재들이 떠나가는 것에 대해 그들을 탓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스스로 그릇이 작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유비는 서서가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 항복했음에도 자기의 덕이 모자라서 그렇다며 오히려 미안함을 표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유비의 모습은 그의 주변에 인재를 모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이야기로 돌아와 유장은 유비와 연합하기로 결정하고, 유비에게 한중의 장로를 정벌해달라고 요청한다. 유비는 이를 수락했고, 유장은 법정과 맹달을 통해 병사와 물자를 지원했다.

유비가 익주에 들어섰을 때는 유장군의 지원군까지 합해 3만의 병사를 거느리게 된다. 누구보다 익주 지역을 차지하고 싶어 했던 유비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었다. 

익주원정에서 유비군의 군사령관은 방통이라는 인물로, 와룡(臥龍. 엎드려 있는 용)으로 불리던 제갈량과 더불어 봉추(鳳雛. 봉황의 새끼)라 불렸던 형주 최고의 인재 중 하나였다. 

그는 익주원정을 떠나는 길에 유비에게 지금을 기회로 유장을 바로 공격해 익주를 취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하지만 유비는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게 하고 조조가 포악하면 나는 인을 베풀고 조조가 속임수를 쓰면 나는 충실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사소한 이유로 천하의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라며 그의 계책을 거절했다. 

다만 유비는 늘어난 병사들을 데리고 장로와 대치만 할 뿐, 익주의 민심을 얻는 것에 더 주력했다.

유비의 입촉(파촉 땅에 들어오는 것. 익주를 파촉이라 부르기도 했다)을 반대하던 신하들은 역시나 유비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며 지속적으로 유장에게 상소했는데, 유장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의심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이때 손권은 조조가 침공해오자 유비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유비는 이를 핑계로 유장에게 손권을 지원한 뒤 다시 돌아오겠다는 뜻을 전하며 군사 1만과 물자를 부탁했다. 하지만 유비를 의심하기 시작한 유장은 유비에게 늙은 병사 4천과 물자도 요청한 것의 절반 정도만 지원했다. 

이에 유비는 유장에게 모든 병사를 이끌고 형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전한다. 장송은 유비가 형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해 밀서를 보내는데, 그의 형인 장숙이 이를 유장에게 폭로해 참수 당하고 만다.

이로 인해 유장은 유비군이 오면 관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 말 것을 지시한다. 이에 분개한 유비는 곧장 유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비는 그동안 유장이 베푼 호의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아 방통에게 어찌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에 방통은 군사를 휘몰아 바로 성도로 진격해 유장을 사로잡는 방법을 상책, 군사를 성도로 천천히 진군시키며 익주지역을 점령해나가는 방식을 중책, 형주로 돌아갔다가 군을 정비해 후에 다시 익주를 침공하는 방식을 하책으로 제시한다. 

이에 유비는 “상책은 너무 빠르고 하책은 너무 느리니 중책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방통은 이에 맞춰 유장이 있는 성도로 진격하면서 익주지역을 평정해 나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방통이 화살을 맞아 전사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제갈량은 형주를 관우에게 맡기고 자신은 장비와 조운 등과 함께 유비에게 합류한다. 

유비는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결국 익주를 차지하게 되고, 형주와 익주 두 곳을 기반으로 삼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 거시적 안목이 만들어낸 빠른 안정화 

유비가 익주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성도를 급하게 들이치지 않은 것은 결국 신의 한 수가 된다. 

보통 그 지역의 주인이 바뀌면 몇 년 간 반란과 민심 이반에 따른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대표적으로 손권의 경우가 그랬다. 

손권은 동오를 지배하면서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렸는데, 하제라는 장수는 반란군 진압 전담 역할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고 나서 익주지역에서는 반란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유비가 항상 멀리 바라보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익주에서 1년 이상 민심을 얻는 데 신경 썼던 유비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으니 오히려 빠르게 안정을 찾아간 것이다. 그는 앞서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형주를 단시간에 안정화 시킨 바 있다. 유비의 방식 자체가 민심을 먼저 장악해 조력자들을 만들고, 이를 통해 명분까지 확보해 나가며 일을 진행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비는 쉽게 얻고 쉽게 잃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더 확고하고 완벽한 지배력을 갖게 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또한 유비는 익주를 점거한 뒤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면서 적재적소에 이들을 배치한다. 특히 유파라는 인물은 ‘안티 유비’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음에도 중요 보직에 기용하는 등 사람을 씀에 있어 차별 없이 능력을 다해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정사에서는 “선주(유비)는 그에게 원한이 있는 자이건 혹은 유장과 친인척 관계인 자건 간에 인재를 두루 기용했다”며 “이들 모두를 현‧요직에 두어 그 기량과 재능을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치고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다른 사료들을 살펴보면 유비의 이러한 일련의 정책으로 인해 익주 사람들이 크게 화목했으며, 단 2주 만에 익주를 안정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뿐 아니라 유비는 공명과 함께 효과적인 행정 시스템을 만들어 익주지역의 생산력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크게 상승 시켰다.

이처럼 항상 그의 방식은 느려 보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가장 빠르고 안정적인 목표 달성을 이루는 결과로 이어졌다. 유비의 이런 거시적인 안목은 경영자들과 리더들이 꼭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익주가 빠르게 안정되면서 유비는 한중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장로를 격파하고 한중 지역까지 차지한 조조와 적벽 이후 처음으로 세력 대 세력으로 제대로 맞붙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한중공방전이 벌어지는데, 유비는 적벽에 이어 또다시 조조를 격파하고 한중 지역을 차지하며 스스로 한중왕에 올라선다. 

이후 조조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뒤를 이은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세운다. 유비는 헌제가 살해당했다는 오보를 접하고는 한나라를 계승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스스로 황제에 올라 ‘촉한’을 세우게 된다.

▲ 안티들도 인정하는 유비의 ‘용인술’

유비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용인술’이다. 그의 이런 용인술의 바탕은 바로 신하들에 대한 ‘믿음’이다. 

유비는 관우에게 중국에서 가장 물자가 풍족한 지역이자 요충지인 형주를 맡기면서 그에게 모든 걸 위임하고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또한 책사 제갈량에게는 내정과 군통솔권을 위임하며 전적으로 이와 관련된 권한을 모두 넘겨줬다. 이때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관우와 장비가 제갈량에게 너무 큰 권한을 쥐어준 것에 대해 불만을 갖자, 모두의 앞에서 “공명(제갈량)이 지시하는 것은 곧 내가 지시하는 것이니, 그에 반하는 것은 나에 대한 반역으로 알겠다”고 공표하며 그의 권한을 더욱 공고히 해주기도 했다.

또한 유비는 연의에서 항상 장비를 꾸짖는 모습으로 많이 기억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술버릇에 대한 것만 염려했을 뿐 전장에서는 그를 누구보다 신임하면서 중책을 맡겼다.

한 예로 입촉 전쟁을 치를 때 장비에게 파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장비의 불같은 성격과 술버릇을 걱정했는데, 유비는 '장비가 비록 술버릇이 나쁘기는 하나 책임감이 있고 그 나름의 지모가 있다'며 그를 두둔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장비는 파군을 점령하는 한편, 촉에서 나름 명성이 있던 엄안이라는 장수까지 진심으로 항복하도록 만든다. 장비를 이를 통해서 여러 군을 평정하는 공적을 세우며 유비의 파촉 입성에 가장 크게 공헌한다.(이 내용은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연의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또한 장판파에서 조운이 그의 아들을 위해 대군 속에 뛰어들 때, 이를 목격한 모든 군사들이 모두 배신했다고 했음에도 그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다.

▲ 유비 사후에도 충절을 지키는 신하들

한중까지 차지한 유비의 기세는 중원에 크게 떨쳐지고 있었다. 

여기에 관우는 형주에서 조조군을 압박하며 큰 위세를 떨치며 위나라를 압박했다.

하지만 형주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던 손권이 기습 침공하면서 형주를 잃게 되고, 관우마저 참수 당한다.

이에 유비는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오나라를 침공하는데, 이것이 바로 유비 평생의 가장 큰 오점이 되는 ‘이릉대전’이다.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 장비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는 등 악재가 겹친다.

많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오나라를 향해 군사를 일으킨 유비에게 또 하나의 비보가 전해지는데, 바로 장비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유비는 장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오열하나,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는 없었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죽음을 기리며 오나라 침공을 강행하게 되고, 초반 승기를 잡아내며 유능한 야전사령관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혜성처럼 등장한 육손이라는 신예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릉에서의 참패는 촉한의 많은 젊은 인재들이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촉한은 인재난에 허덕이게 된다. 

유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촉한’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2세대 인재들의 몰살은 후에 촉한이 쇠락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릉에서 대패한 유비는 수도인 성도로 돌아오지 못하고 백제성에서 병을 얻어 숨을 거둔다. 이때 유비는 이릉대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면서 마지막까지 신하들을 향한 변함없는 믿음을 보인다.

대표적인 일화로 전쟁의 패배로 인한 혼란 속에 길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한 황권에 대해 신하들이 그의 처자들을 벌할 것을 건의하자, 유비는 "그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버렸다"라며 그의 처자들을 이전과 같이 대우하도록 명했다.

황권도 위나라에 항복해 벼슬까지 받은 상황에서 자신의 처자가 주살되었다는 헛소문이 퍼졌으나 이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유비에 대한 충절을 잊지 않아 유비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유비는 또 죽기 전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유선(후주, 촉한의 2대 황제)이 만약 왕의 그릇이 아니라고 한다면 승상(제갈공명의 직책)이 그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유비가 마지막까지 공명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평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믿음이 확고했다는 반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유비는 공명에게 또 하나 마지막으로 당부한 것이 있는데, 바로 공명이 아끼던 ‘마속’을 너무 중히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사람을 잘 보는 유비가 공명에게 그동안 별말이 없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당부를 했다는 것은 생각해 볼 부분이다. 

그 동안 자신의 판단으로 믿음이 가지 않은 인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면 그를 담당하는 사람의 판단을 존중하고 맡겼다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공명은 유비의 이런 당부를 잊고 1차 북벌 원정에서 마속에게 중한 역할을 맡겼다가 그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인해 북벌을 실패한다. 그 책임을 물어 공명은 마속을 울며 목 베었는데, 이것이 바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유례다. 

이때 서글프게 우는 공명에게 다른 신하들이 “이리 슬퍼하시면 건강을 해치실까 염려된다”며 “마속을 위해 승상께서 충분히 그 마음을 표하셨으니 그만 마음을 추스르시라”고 말한다. 

이에 공명은 “내가 우는 것은 마속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마속을 중히 쓰지 말라’고 하셨던 선주(유비)의 현명한 조언이 생각나 그 그리움이 크기 때문이오”라며 더욱 구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후 공명은 비록 북벌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내정을 보살펴 국력을 키우는 한편, 국력이 6배 이상 차이나는 위나라를 상대로 끊임없이 공세를 펼치며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살아 있을 때 유비의 행보는 공명을 비롯해 그와 함께했던 신하들이 그의 사후에도 충절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 ‘지피’보다 ‘지기’가 우선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적군을 알고 아군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상대를 아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반대로 ‘지피’(知彼)보다 ‘지기’(知己)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면서 말이다.

유비는 장판파 전투에서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며  “나는 조조와 대척점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내가 백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조조와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조조와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그와 대적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조조라는 인물을 잘 파악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함으로써 비범한 그를 상대로 대등하다 못해 어떤 때는 압도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신하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스스로의 부족한 부분들을 상쇄시키고, 자신들과 신하들이 가진 장점들을 잘 살리게 하여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지피지기백전불태’의 모범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조조가 아닌 유비의 방식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

조조와 유비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조조는 자신의 특출한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지휘하며 자신이 주가 되고 뒤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조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면, 반대로 유비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적재적소 투입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택했다.

회사가 조금이라도 발전하거나 유지된다는 것은 한 사람만의 능력이 아니다.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실적을 내는 직원 주변에는 항상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것이 바로 팀워크를 이루면서 시너지효과를 발휘해 꾸준히 발전해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점들을 잘 파악해 이에 대해 알아주고 격려하면서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배치시키는 ‘용인술’은 리더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인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진다는 것은 용인술이 없는 리더의 책임이다. 

유비는 공(功)을 신하들에게 돌리고 책(責)은 자신이 짊어지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행했다. 그리하여 역사상 가장 비범한 인물이었던 조조에 견줄만한 인물이 되었다. 아니 그의 시작이 그 누구보다 한미했다는 점과 후대의 평가를 보면 오히려 조조를 뛰어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과연 지금의 많은 CEO들은 어떤 방식을 택하고 있는가? 개인적인 경험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크고 작은 회사의 CEO들은 대부분 조조의 방식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언급했듯, 조조라는 인물은 비범함을 가진 인물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조조와 같은 비범한 인물들이라면 그 방식이 맞겠지만, 과연 스스로가 조조만큼의 능력을 가졌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오히려 대부분의 CEO들은 부하를 의심하고 뛰어난 책사였던 전풍의 이야기를 등한시하다 몰락한 원소의 모습이 보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인 것일까?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유비와 조조가 서로 대척점에 있었어도 공통적으로 자신을 보좌하고 따르는 신하들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귀히 여겼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손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이들은 전성기 시절 여러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를 통해 가장 최선의 방법들을 도출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유비는 자신을 낮춰가면서까지 신하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들의 의견들을 자신의 의견과 대조하며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런 유비의 모습은 현 시대 경영자들과 리더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세워주도록 직원들에게 강요하거나 그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비는 반대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부하들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이로 인해 대외적인 권위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또한 많은 경영자들은 자신과 기업의 장기적 가치보다 당장 눈앞에 이득으로 인해 부하들을 내몰아 압박하는 경우가 많다. 억지로 내몰린 직원들이 과연 제대로 된 책임감과 충성심을 가지고 일을 수행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의 경영자들과 앞으로 경영자가 되려거나 리더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이들은 스스로가 패망한 군주들의 모습들을 갖추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또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유비를 통해 앞으로 본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지기’의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홍성완 기자 seongwan62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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