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의 삶으로 돌아본 치욕스런 일제강점기의 자화상

덕혜옹주의 산책로를 따라 조선 황실의 사진 36점이 전시되어 있다.(사진=신현지 기자)

[뉴스포스트=신현지 기자] 최근 영화와 소설로 덕혜옹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2016년 9월부터 11월 임시개방 되었던 덕혜옹주능이 2017년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과 함께 전면개방되었다.

전면개방에 따라 문화재청은 홍유릉에서 덕혜옹주묘·의친왕묘에 이르는 산책로에 '왕릉공감(王陵共感)-세계유산 조선왕릉'을 비롯하여 ‘덕혜옹주와 의친왕’에 관련한 사진 36점으로 황실가족의 일대기를 소개했다. 또한 조선 시대 왕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사진에 담아 능을 찾는 관람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한편, ‘남양주의 홍릉’은 대한제국 제1대 고종황제와 명성태황후를 합장한 곳이며 유릉은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를 비롯하여 황태자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잠든 ‘영원(英園)’ 황세손 이구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의 원(園) 2기, ‘덕혜옹주묘’와 ‘의친왕묘’등 황실 가족의 묘(墓) 7기가 자리해 있다. <본지>는 문화재청의 덕혜옹주능 전면개방을 기회로 조선의 마지막 황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재조명 했다.

덕혜옹주의 유치원(사진=산책로의 전시전 제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비운의 황녀로 알려진 덕혜옹주(1912~1989)는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양씨는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으로 성은 양(梁) 씨요 이름은 춘기(春基)였다. 덕혜옹주를 얻기 전 고종에게는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명성황후 민씨 소생의 순종 이척,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이강, 황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 이은이 있었다. 뒤늦게 양씨로부터 옹주를 얻은 고종은 몹시 기뻐하며 양씨를 귀인(貴人)에 봉하고 ‘복녕(福寧)’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고종의 옹주 사랑은 각별했다. 고종은 이른 아침부터 옹주의 탄생을 축하하러 오는 이왕직과 친인척들을 맞이하며 하루에 두세 차례나 복녕당에 들러 산모와 아기를 살피는 것도 부족해서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아기를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 동온돌에 데려다 키웠을 만큼 사랑이 컸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도 짧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옹주의 비운은 시작되었다.  

 고종의 인산일인 3월 1일을 기하여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일제가 문화정책이라는 기만적인 방법으로 고종의 혼전을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해 4월부터 덕혜옹주는 일본 거류민들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개방된 덕혜옹주의 능(사진 =신현지 기자)

따라서 조선의 옹주는 일본 아이들처럼 게다와 하오리 차림으로 등교했고 창덕궁에 돌아와 순정효황후 윤씨에게 ‘호타루(螢) 찬가’ 등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예사로이 불러주었다. 그런 가운데 덕혜옹주는 그해 5월 4일 정식으로 ‘덕혜(德惠)’라는 호를 받았다. 그리고 1925년 정월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는 순종에게 누이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을 통보하기에 이르렀다. 덕혜옹주의 일본유학은 ‘문명한 여성 교육’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일본의 속내는 그것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 고종황제를 상기시켜주는 왕녀를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친왕을 인질로 데려갈 때의 명분이 ‘황태자에 대한 최상 교육’이었다면 덕혜옹주의 경우는 소위 ‘문명한 여성 교육’이었다.

의친왕의 능(사진=신현지 기자)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조선의 옹주

1925년 3월 24일, 마침내 순종은 14세의 덕혜옹주에게 도쿄 유학을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갑작스럽게 일본행을 통보받은 덕혜옹주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머니와 생이별이라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경성을 떠난 그녀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건 이방자 여사였다. 다행히 덕혜옹주는 볼모로 잡혀가듯 일본에 와 있던 영친왕의 거처에 함께 머물게 되었다. 영친왕은 어린 나이에 자신처럼 일본에 오게 된  가엾은 막내동생을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솽관없이 일본으로 떠밀리어 온 옹주는 그해 4월부터 일왕가와 화족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 중등과 2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에 등교하고 오후 2시에 하교한 뒤에는 학습원 교수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고 틈틈이 동요도 지었다고 전해졌다.

한편, 덕혜옹주는 자신이 대한제국의 황녀로서 일제의 눈엣가시라는 점을 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 고종의 사망 원인을 의심하고 있었던 그녀는 학교에서도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늘 끓인 물을 담은 보온병을 들고 다녔다. 동창생 소마 유키카가 까닭을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왜 여기에 있나요?”라는 소마의 철없는 질문에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만리타국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 살고 있던 그녀에게 그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었다.

일본에 온 그 이듬의 1926년 3월, 덕혜옹주는 영친왕과 함께 귀국하여 와병 중이던 순종을 알현하고 도쿄로 돌아갔다가, 순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4월에 다시 귀국했다. 그달 25일 순종이 승하했지만 그녀는 일본의 조급함에 인산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다시 도쿄로 돌아가야만 했다.

정신적 충격은 정신분열증으로 나타나

덕혜옹주의 일본 생활 5년째인 1929년 5월 29일 순종의 뒤를 이어 어머니 귀인 양씨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한 덕혜옹주는 검은 상복 차림으로 장례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일본은 귀인 양씨가 《왕공가궤범》에 따르면 귀족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덕혜옹주를 복상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장례 이틀 후 곧바로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그일로 옹주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자유롭게 참석하지 못하고 일본에 돌아온 덕혜옹주는 영친왕의 저택에 머물며 침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녀는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을 때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며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식사도 걸렀다. 또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뛰쳐나가곤 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영친왕 부부가 병원에 데려가 진찰한 결과 조발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본인과 정략결혼, 덕혜옹주 와 그녀의 딸 마사에 (사진=산책로의 전시전 제공)

일본인 남자와 정략결혼과 이혼

그 무렵 일본은 덕혜옹주의 혼사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물론 당사자인 덕혜옹주에게는 자신의 혼사에 관한 어떤 선택권이나 결정권도 없었다. 당시 그녀는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옹주의 혼사는 일본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본이 정한 덕혜옹주의 남편으로는 쓰시마의 36대 도주 24세의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였다. 그는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으로 문학적인 소질과 유화를 잘 그리는 청년이라고 알려졌다. 그의 혼사는 후원자였던 사다코 왕후였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가 혼인하게 된 배경에는 쓰시마가 오랫동안 조선과 일본의 외교창구 역할을 해왔다는 상진적인 의미 외에도 대한제국 황실의 유일한 미혼여성으로서 상당한 경제력을 보유한 덕혜옹주를 소 가문에 맺어주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였다. 그러고 보면 소 다케유키도 정략결혼의 희생자였다. 덕혜옹주가 고귀한 신분에 지참금도 많다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그 역시 심사가 편할 리 없을 터였다. 왕실의 일원으로서 그 역시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는지 몰랐다.  

1931년 5월 8일 마침내 덕혜옹주는 일본의 쓰시마 백작 소 다케유키와 혼인으로 그들 부부는 도쿄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정략결혼이었으나 신혼초반에는 그들 부부사이가 순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 다케유키가 신혼 초기 각종 행사에 덕혜옹주와 동부인으로 의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증세가 심해지면서는 그와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본 사회에서 정신병은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았으므로 소 다케유키가 아내를 내보이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나마저도 남편 소 다케유키가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외부와의 교류를 끊어 버렸다. 그 때문에 침묵의 나날 속에서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귀족들의 근황을 담은 《황실황족성감》에 덕혜옹주가 1932년 8월 14일에 딸 소 마사에(宗正惠)를 낳았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누구의 기억 속에도 없는 잊혀 진 여인

그 후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에 미군정이 들어섰다. 1947년 10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신적강하(臣籍降下), 즉 '왕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다는 결정’에 따라 일본의 왕족들은 연금을 비롯한 각종 면세 특권을 박탈했다. 이때 소 다케유키도 백작이라는 작위와 재산상의 특권을 잃었다. 이왕가 역시 왕족으로 간주 되었으므로 덕혜옹주에 대한 지원도 끊어졌다.

1946년 소 다케유키는 그녀를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10년 뒤인 1955년에는 영친왕 부부와 협의한 끝에 옹주와 이혼해버렸다. 따라서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성씨인 양(梁)과 봉호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梁德惠)라는 이름으로 따로 호적에 등재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한 그 해에 가츠무라 요시에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얻었다.

서울신문 김을한 기자에 의해 귀국길 열려

조국과 남편에게 버려진 덕혜옹주를 기억하고 발견한 건 어린 시절 약혼할 뻔했던 김장한의 친형 김을한 기자였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김을한 기자가 소 다케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덕혜옹주의 근황을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입원중이라는 냉담한 답변을 받았을 뿐이었다. 김을한은 그길로 이미 친분이 있던 영친왕을 만나러 나섰다. 그리고 그녀가 매월 1만원에 달하는 비싼 입원비를 내고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곧장 병원을 찾아가 옹주를 만나게 되면서 그녀에게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  

김을한 기자가 옹주를 찾았던 당시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독방에 홀로 앉아있었다고 전해진다. ‘한때 고귀했던 왕녀가 저토록 초라한 몰골로 변하다니…….’ 비감에 젖은 김을한 기자는 그 때부터 정부 요인들을 찾아가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영친왕의 귀국조차 용인하지 않던 이승만 정부가 덕혜옹주의 신변에 신경 쓸 리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6년 8월 29일자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녀 나이 24세였다. 경찰이 수색작업에 나섰지만 그녀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이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12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도쿄에 들렀을 때 김을한 기자는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간청했다. 박정희 의장은 김을한의 간청에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루어졌다.

산책로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수예품 (사진=신현지 기자)

38년만의 고국으로 돌아와

1962년 정초에 고종황제의 손자 이우공의 부인 박찬주 여사가 둘째아들 이종과 함께 CAT 편으로 그녀를 데리러 일본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1월 26일, 51세의 덕혜옹주는 38년 동안의 원치 않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소학교 동창 민용아와 당시 72세였던 유모 변복동이 눈물을 흘리며 맞이했다고 한다. 유모 변씨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기까지 했다. 덕혜옹주는 곧바로 창덕궁 낙선재로 가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다음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그해 2월 8일 그녀는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고 ‘이덕혜’란 이름을 되찾았다. 그리고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고 왕족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했다. 국가의 생계비 혜택을 받은 덕혜옹주는 7년 동안 병원에 머물다. 1967년 5월, 낙선재로 들어갔다.

이어 1968년 가을에는 창덕궁 낙선재 안에 있는 수강재로 거처를 옮겼다. 그 무렵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그녀를 찾아왔다. 하지만 그를 괘씸하게 여긴 종실 관계자들이 그를 매몰차게 쫓아내버렸다. 그래도 한때 잠시나마 사랑했던 아내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소 다케유키는 1985년 78세의 나이에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의 작품(1925년) (사진=산책로의 전시전 제공)

78세의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마감하다

한편, 소 다케유키가 생전에 쓴 시에는 덕혜옹주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했다고 전해졌다. 그런 점으로 봐 그가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서 일왕의 명령에 따라 결혼했지만, 잠깐이라도 아내를 사랑하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한 남자로부터도 오롯한 사랑을 받지 못한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곳에는 옹주가 맑은 정신일 때 썼다는 글 한 점이 남아있다.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홍유능을 찾아서.....

기울어 가는 국운으로 먼 타국에서 망국의 설움을 견뎌야만 했던 여인, <본지>는 황녀가 잠든 홍유능을 찾았다. 일본에 의해 외로움과 치욕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간 그녀의 무덤 위로 5월의 햇살이 유리알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한낮의 한적한 고요를 뚫고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그 햇살을 쪼아댔다. 오랜 시간 그녀의 주위를 지켰다는 듯 그 몸짓에서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조선의 황녀로 태어났지만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았던 여인. 아니, 일본의 씻을 수 없는 오욕에 차라리 정신줄을 놓아버린 여인. 녀석은 그것을 위로라도 하는 듯 그렇게 오랫동안 종종걸음으로 능을 오르내리며 보는 이의 마음을 처연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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