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항암치료 이후 ‘봉사하는 삶’ 살게 돼
하루 9시간 무료급식 봉사...“봉사가 취미됐죠”
캄보디아에 배 일곱 척, 아프리카엔 집 한 채 기부
“항상 남을 돕던 아버지 모습, 제 자녀들까지 닮았어요”
폭행, 방화, 극단적 선택 등 잔혹한 사회 이슈가 온갖 자극적인 수사를 붙여 보도되는 요즘. 맘씨 좋은 이웃의 따뜻한 일화들은 흔히 “미담은 뉴스 가치가 떨어진다”라는 핑계로 뉴스 순서를 뒤로 밀거나 아예 보도하지 않곤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뉴스포스트가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의 고운 향기를 퍼뜨리는 인물을 만나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 편집자주
[뉴스포스트=이상진 기자] “어렸을 적 아침때나 저녁때면, 항상 배곯는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생계가 빠듯한 시골집인데도요. 아버지가 항상 그 사람들을 상으로 불러서 자기 밥을 나눠서 함께 드셨거든요. 그래서 밥이 늘 모자랐죠.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100세 가까이 되셨을 텐데요. ‘밥퍼’를 찾아 식사하는 수혜자분들을 보면 아버지께 밥 한 끼 대접하는 것 같아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김동열(60) 서울교통공사 신답승무사업소 기관사는 밥퍼나눔운동본부(이하 밥퍼)에서 식사하는 수혜자들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면서 “정년 퇴임 이후에는 봉사가 중심이 되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기관사는 오랜 세월 밥퍼에서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하면서 ‘명예주방장’으로 불리고 있다. 뉴스포스트는 26일 서울시 동대문구 황물로 소재 밥퍼에서 13년째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동열 기관사를 만나 그의 삶을 들어봤다.
2005년 특수암 ‘연골육종’ 발병이 봉사하는 삶의 계기
김동열 기관사는 “암 발병 전까지는 평생 쉬지 않고 나와 가족을 위해 일만 했다”고 말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한 데다, 아버지의 병치레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는 설명이다.
그가 봉사를 시작한 계기는 지난 2005년 특수암인 ‘연골육종’이 발병하면서부터다. 김 기관사는 “40대에 덜컥 특수암이 찾아왔다”면서 “그때 죽을 확률이 80% 이상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했다”고 고백했다.
고된 항암치료 끝에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특수암인 연골육종의 재발과 전이 걱정으로 김동열 기관사의 삶은 전과 같지 않았다. 그의 지친 몸과 마음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은 건 다름 아닌 ‘봉사’였다.
김동열 기관사는 “항암치료를 하며 삶을 복기해보니, 나와 가족 외에 타인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항암치료가 끝나고 끝없이 찾아오는 무기력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2009년 밥퍼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부터 암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꿀잠을 잘 수 있던 게 당시엔 참 신통했다”고 했다.
‘1908회’·‘1만1493시간’·‘2800만원’·‘배 일곱 척’·‘집 한 채’
2009년부터 현재까지 김동열 기관사가 13년 동안 밥퍼에서 한 봉사활동 횟수는 모두 1908회다. 시간으로 따지면 1만1493시간이다. 그가 밥퍼에 공식적으로 기부한 금액만 2,800만 원. 밥퍼의 냉장고 등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김 기관사가 종종 자비로 교체하곤 해, 실제 기부금 총액은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밥퍼가 문을 닫는 일요일을 제외하곤 매일 봉사활동을 위해 밥퍼를 찾는다. 저녁 근무를 하는 날이면 아침 6시에 밥퍼에 ‘출근 도장’을 찍고, 배식 봉사활동이 모두 끝나는 오후 3시까지 현장을 지킨다. 하루 9시간 가까이 봉사를 하고 지하철로 출근하는 것이다. 김 기관사는 “기관사로 일하는 시간 외에는 온종일 봉사활동에 매진하는 탓에, 봉사활동이 유일한 취미가 됐다”고 말하며 웃었다.
김 기관사는 코로나19 확산 시국에 밥퍼 활동이 식사를 직접 제공하는 것에서 도시락 포장으로 바뀐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수혜자들이 밥을 먹고 싶은 만큼 줄 수 있는 배식과 달리, 도시락은 미리 포장된 양만큼만 먹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는 “도시락은 정량만 줘야 해 수혜자들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없다”면서 “하루 700명의 수혜자가 밥퍼를 찾는데,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길 바란다”고 토로했다.
김동열 기관사는 최근 몇 년 전부터 매년 캄보디아에 150만 원 상당의 ‘고깃배’를 제작해 기부하고 있다. 올해는 벌써 배 2척을 기부했다. 지금까지 기부한 배는 모두 일곱 척에 달한다. 그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톤레삽호수에서 스크류 모터가 달린 150만 원 상당의 고깃배 하나면 자녀들 학교도 보내고 일가족이 먹고 살 수도 있다”면서 “말 그대로 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셈이니 이보다 더 큰 봉사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 기관사는 올해 초 아프리카의 한 현지 가족에게 집을 한 채 기부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매년 우기가 되면 수수깡을 엮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집이 무너져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저도 어렸을 적 넉넉지 못한 형편 탓에 수수깡에 진흙을 바른 집에 살아서 사정을 잘 안다”면서 “장마철만 되면 진흙이 무너져 구멍이 숭숭 뚫리고 집안이 다 보여 야단이었는데, 시골집서 멀리 서울로 막노동을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수리하실 때까지 한동안 그렇게 살곤 했다”고 덧붙였다.
봉사는 가족력...“제 생일엔 짜장면, 평소 커피도 잘 안 마시죠”
김동열 기관사는 “제가 부자가 아닌 탓에 기부 금액은 크지 않고, 주로 몸으로 봉사한다”면서 “제 생일엔 케익을 먹지 않고 가족들이 모여 짜장면을 먹고, 브랜드 커피도 잘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매일 온 가족이 조금씩 아낀 돈을 모아 기부 활동에 나선다”고 했다.
남을 돕는 김동열 기관사의 인생 배경엔 가족력도 있다. 부족한 형편임에도, 늘 배곯는 이들과 밥을 나눠 먹은 아버지의 가르침이 컸다는 설명이다. 김 기관사는 “어렸을 적 아침때나 저녁때면, 항상 배곯는 사람들이 찾아왔다”면서 “우리도 생계가 빠듯한 시골집인데, 아버지가 항상 그 사람들을 상으로 불러 자기 밥을 나눠 함께 먹어서 밥이 늘 부족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100세 가까이 되셨을 텐데, 밥퍼를 찾아 식사하는 수혜자분들을 보면 아버지께 밥 한 끼 대접하는 것 같아 눈물이 날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김 기관사의 두 자녀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봉사와 기부 활동에 적극적이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일하고 있는 딸 김보람 씨(32)와 요리사인 아들 김상진 씨(29)가 그 주인공이다. 두 남매도 최근까지 밥퍼 봉사활동을 함께 하면서, 캄보디아와 아프리카 기부 활동에도 돈을 보태고 있다.
김 기관사는 “아들이 지금은 남극 장보고과학기지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어, 부득이 밥퍼 봉사활동에 오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래서 가끔 제가 남극에 전화를 걸어 재료 손질이나 고기 냄새를 없애는 법 등을 물어보곤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녀들에게 인생에서 주인공이 될 필요가 없다고 늘 말한다”면서 “아들은 생명을 살리는 요리사가, 딸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해주는 게 아니라 인성을 보살피는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어 “나도 숟가락이라도 놓아둘 힘이 있다면 밥퍼에서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