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을 결정하는 기준에는 경제규모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나라의 인권 의식 수준 역시 선진국을 결정하는 바로미터다. 대한민국은 어느덧 OECD 경제대국에 손꼽히지만, 국제사회로부터 차별금지법부터 제정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불합리한 이유로 차별받지 않은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은 어쩐 일인지 약 20년째 제자리걸음 중이다. 민주 정부에서도 끝내 완성되지 못한 숙제는 이제 보수 정권이 맡게 됐다. -편집자 주-

지난 2020년 6월 29일 정혜영 의원 등 정의당 관계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발의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2020년 6월 29일 정혜영 의원 등 정의당 관계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발의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제21대 국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안이 역대 최다인 4개나 발의되는 등 과거보다 진일보했다. 하지만 원내 정당 다수가 차별금지법 찬성에 대한 당론 채택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소속 국회의원 개개인이 찬반 의견을 내비치는 상황이다.

5일 <뉴스포스트>가 확인한 결과 5개의 원내 정당 중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을 당론으로 채택한 정당은 정의당과 기본소득당이다. 정의당 관계자는 "차별금지법은 정의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 때부터 당론으로 채택됐다. 창당 시작부터 당론이라고 봐야 한다"며 "2020년 정의당 소속 의원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차별금지법 찬성을 당론으로 채택한 정의당은 제정에 가장 적극적인 정당이다. 지난 2020년 총선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정당의 공약으로 내걸었고, 실제 발의까지 이어졌다. 올해 5월 17일에는 국제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차별금지법 입법심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성명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의당과 마찬가지로 원내 소수 정당인 기본소득당의 경우 차별금지법 제정을 당론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입장이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차별금지법 제정안 발의에 참여했고, 올해 4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가들이 단식을 진행할 당시 더불어민주당 측에 수차례 차별금지법 제정 당론 채택을 촉구한 바 있다.

반면 같은 소수정당일지라도 시대전환은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을 당론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시대전환 관계자는 "당의 기본 입장은 정해지지 않았다"면서도 "중앙대표당원 조직구조 안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입장에 대해 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5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서 국민의힘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위원들의 불참속 차별금지법 제정 관련 공청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5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서 국민의힘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위원들의 불참속 차별금지법 제정 관련 공청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미적지근한 양당과 반쪽짜리 공청회

원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 양당은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찬반양론에 대해서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들이 개별적인 입장을 밝히는 데 머물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국회에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 제정안 4개 중 3개안을 발의한 바 있다.

당론 채택을 하지 않으면서도 제정 찬성 입장에 힘을 싣고 있는 게 민주당의 입장이다. 일명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 법안으로 뜨거운 정쟁이 일어났던 지난 5월 20일 민주당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차별금지법 공청회를 같은 달 25일에 열기로 단독 의결했다. 이에 국민의힘 의원은 강하게 항의하면서 공청회에 불참했다.

국민의힘은 개신교 성향 의원들을 중심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펼치고 있다. 국민의힘 기독인회는 5월 22일 차별금지법 공청회 단독 처리에 반발하면서 "차별금지법은 사상과 표현, 종교, 양심의 자유 등 개별적 인간으로서 천부적으로 가지는 자유를 완전히 박탈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놓인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피켓.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놓인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피켓.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차별금지법 20년 논의, 국회는 어디로

불과 약 2달 전인 4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인권운동가들이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목숨을 건 단식은 5월 25일까지 46일간 이어졌다. 이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피켓들이 놓여있다. 반대 이유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적 목소리도 담겼다.

국회는 부랴부랴 공청회를 열었다. 한국 사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이뤄진지 20년 만에 첫 공청회다. 이마저도 보수 야당이 거부한 '반쪽짜리'로 진행됐다. 국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국회가 기계적 중립을 앞세워 정문 앞 피켓에만 이목을 집중하는 게 아닌지 점검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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