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을 결정하는 기준에는 경제규모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나라의 인권 의식 수준 역시 선진국을 결정하는 바로미터다. 대한민국은 어느덧 OECD 경제대국에 손꼽히지만, 국제사회로부터 차별금지법부터 제정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불합리한 이유로 차별받지 않은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은 어쩐 일인지 약 20년째 제자리걸음 중이다. 민주 정부에서도 끝내 완성되지 못한 숙제는 이제 보수 정권이 맡게 됐다. -편집자 주-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한국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국가다. 주요 선진국들이 차별금지법을 마련한 것과 차이가 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차별금지법 을 도입하지 않은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 정도다. 미국의 민권법(Civil Rights Act)과 호주의 차별금지법(Discrimination laws), 캐나다의 인권법(Human Rights Act)이 대표적인 예시다. 특히 유럽연합(EU)은 가입 조건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내세우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쉽게 말해서 개인의 인권 보호를 위해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말한다. 명칭은 차별금지법이 가장 익숙하지만, 법안 명에 따라 평등법으로도 불린다. 차별금지법이 불합리하다고 보는 차별 사유는 성별과 장애, 질병, 나이, 성적 지향 등이 있다. 보통 고용이나 교육 등에서 위와 같은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게 법안의 골자다.
해당 법안이 없다고 해서 한국법이 평등의 가치를 도외시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헌법과 개별 법률에서 평등권이 명시돼 있다. 헌법 제11조는 성별과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것을 말한다. 또한 장애인 차별금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비정규직 차별금지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특정 집단과 관련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됐다.
국제 사회가 한국에 요구하는 것은 개별적 차별금지법을 아우르고, 혐오 등 새로운 유형의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다. 실제로 국제연합(UN)은 한국에 9차례 이상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세계 주요 선진국에서 마련한 차별금지법 역시 이름만 다를 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의미한다.
국회에서 잠든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2년이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제16대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내세웠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국가인권위원회가 2006년 법 제정을 권고한 이래 2007년 제17대 국회에서 정부 법안이 처음으로 발의됐다. 이후 6건이 더 발의됐지만, 이중 5건은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건은 철회됐다.
제21대 국회에서 현재 계류 중인 법안은 4건이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2020년 6월 처음으로 '차별금지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지난해 6월과 8월에는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주민 의원이 각각 '평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권인숙 의원이 같은 해 대표 발의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도 있다.
4개의 안은 대체로 내용이 흡사하다. 차별 금지 사유를 성별과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등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아울러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등을 이유로 ▲ 고용 ▲ 재화·용역 등의 공급이나 이용 ▲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 행정서비스 제공이나 이용에서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 등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차별의 고의성을 바탕으로 직접차별과 간접차별을 분류해 언급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대놓고 차별하는 직접차별과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특정 집단에 차별로 나타는 간접차별 역시 금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부 내용은 일부 다르다. 이상민 의원안에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디지털 기술 영역에서도 법안 내용을 그대로 적용한다. 또한 징역이나 벌금 등 형사처벌 조항이 아예 없다. 나머지 3개 안의 경우 차별 피해자에게 보복성 불이익을 조치하는 등 극히 일부 사례에는 징역 및 벌금형 등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차별금지법, 어디까지 왔니
4개의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최초로 차별금지법 제정 공청회가 열렸지만, 여당이 참여하지 않은 반쪽짜리로 진행됐다. 양당 간 사전 합의가 없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지지부진한 데에는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국내 여론이 원인으로 꼽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올해 4월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67.2%가 동의를 표시했다. 반면 정반대의 여론조사도 존재한다. 오피니언코리아가 지난달 1007명의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응답자 41.4%가 반대, 35.3%만이 찬성을 표했다.
차별금지법 반대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일부 종교계의 경우 성소수자 차별 반대 조항을 두고 반대 의견을 펼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 등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이 시행되는 상황에서 중복 규제와 과잉 처벌이 우려된다는 여론도 있다. 평등법을 발의한 이상민 의원은 발의 당시 "여러 논란이 있고 죄형법정주의 불명확성 논란도 있다"면서 "차후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입법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차별금지법 제정 단체는 단식 농성까지 벌이면서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4월 11일부터 46일간 단식을 한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지난달 26일 농성을 마무리하면서 "더는 국회 앞에서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며 "국회가 찾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찾아올 정치가 부재함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멈추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류 활동가는 "단식투쟁은 중단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싸움은 중단되지 않는다"며 "이 봄 시민들이 내어준 기회를 놓친 거대 양당은 그 심판의 결과가 어떨지 곧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