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시설 설치 의무화’에도 설치 미정
‘사회적 합의’에도 택배기사 분류작업 여전
찜통 더위 속 근무현장은 선풍기 넉 대가 전부

[뉴스포스트=이병우기자] 폭염에 폭우까지 겹친 지난 11일, 경기도 일산의 한 물류센터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오는 18일부터 근로자 휴게권 보장을 위해 사업장 휴게실 설치가 의무화되지만, 해당 시설 개설은 예정돼 있지도 않았다. 또한 택배노동자 과로사 원인으로 지목됐던 분류작업이 기본 업무에서 제외됐음에도 불구하고, 분류작업은 여전히 그들의 몫이었다.

오전7시 분류작업이 시작되면서 분류도우미와 택배기사들이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있다.(사진=이병우기자)
오전7시 분류작업이 시작되면서 분류도우미와 택배기사들이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있다.(사진=이병우기자)

무색한 사회적 합의

“휴게실이요? 그런 곳 없어요”

무더위 속에서 물류 분류작업을 하던 택배기사 A 씨가 취재진에게 이처럼 답했다. A 씨는 ‘휴게실 개설은 물론이고, 사회적 합의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말을 이었다.

‘사회적 합의’란 택배기사 과로를 막고자 정부와 택배사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지난 1월 체결됐다. 핵심사항은 ‘분류 전담인력 투입 또는 택배기사가 분류작업 수행 시 별도 대가 지급’이다.

20년 차 택배기사 A 씨는 “사회적 합의의 취지는 택배기사들이 온전히 배송 업무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여전히 분류작업을 해야만 한다”며 “출근 시간도 당연히 오전 6시~7시 사이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본지가 4시간가량 분류작업을 지켜본 결과 약 150여명의 근로자 중 분류도우미는 20여명 남짓이었다. 몇 십만 건의 물품을 분류도우미분들만의 힘으로 처리하기란 대관절 불가능해 보였다.

물류센터 천장에 설치된 선풍기 4대.(사진=이병우기자)
물류센터 천장에 설치된 선풍기 4대.(사진=이병우기자)

선풍기 넉 대가 전부…

오전 5시 50분, 택배 차량들이 물류센터에 속속 도착해 주차를 하는 시간이다. 터미널(물류센터)은 좁고 배송 차량은 많기에 분류작업 시작 1시간~1시간 30분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모든 배송 차량이 터미널에 도착하니 차량 간 간격은 약 30~40㎝로 매우 협소했다.

분류작업이 시작되는 오전 7시가 다가오자 컨베이어벨트가 서로 이어져 커다란 라인을 만들어졌다. 목이 타들어가는 날씨임에도 천장 위의 선풍기 넉 대만이 힘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15년 차 택배 기사 B 씨는 “오늘은 그나마 선선한 편이다. 다른 날에는 정말 죽을 것 같다. 분류작업을 할 때 열을 식힐 방법이 없다”며 “이러한 악조건을 본사 측에 항의해도 ‘너 알아서 해’라는 식이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나마 다행인 건 겨울보단 여름이 낫다. 겨울은 공장 내 전력이 부족해 난방 시스템은 물론이거니와 개인 전열기구 등을 일절 사용하지 못한다. 정말 손이 꽁꽁 언 채 작업을 한다”고 토로했다.

배송차량에 실릴 에정인 택배 물품들.(사진=이병우기자)
배송차량에 실릴 에정인 택배 물품들.(사진=이병우기자)

택배기사 뛰어다니는 이유

택배기사와 분류도우미 등 직원 170여명이 약 4시간 동안 배송될 물품들을 각각의 배송트럭에 분배하면, 한 대당 평균 300개가 실린다.

이 작업을 거쳐 실린 물품들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각 수령인의 집으로 배달해야 한다. 배송 시 뛰지 않으면 업무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다.

20년 차 택배 기사 C 씨는 “오래전부터 매 집을 뛰며 배송하다 보니 (무릎과 팔꿈치 등의) 연골이란 연골은 다 닳았다”며 “그런데도 병원에 못 간다. 하루 쉬게 되면 나를 대체할 인력을 고용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비용(고용 시 발생하는 비용, 하루 수당 등)은 택배기사가 전액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와 같은 법정감염병에 걸려 격리될 때도 확진 기사들이 비용을 전액 지불해 대체인력을 구해야 했었다”며 “우린 기계가 아닌데…”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기록적인 폭우도 악재로 작용했다. 침수로 인해 차량이 통제되고 운행이 불가할 때에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제한된 시간 안에 배송해야 하기 때문이다. 택배기사들은 무리한 운송이 인명사고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C 씨는 “최근 폭우가 쏟아지면서 시야 확보가 어려워, 혹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본사는 날씨와 상관없이 배송 완료에 대해서만 말한다”며 “제한시간 안에 배송을 못 하면 불이익을 받으니 두려운 빗길에서 배송을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어 “하루 평균 300개 정도의 물품을 배송하는데, 아파트 구역을 담당하는 기사들의 경우는 차량 에어컨을 켤 시간조차 없다. 뛰지 않으면 절대 시간을 못 맞춘다”고 덧붙였다.

본지의 취재를 종합하면 택배노동자 상당수는 새벽 6시에 출근해 하루 16시간이 넘게 근무하는 고강도 업무환경에 놓여있었다. 정부가 노동자의 근로환경을 개선한다며 다양한 정책 등 박차를 가하지만, 현장의 열악함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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