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의 장식 목인은 현세의 기쁨과 슬픔, 죽은 자의 애도다"

김의광 목인박물관장(사진=뉴스포스트)

[뉴스포스트=신현지 기자]고대 우리 민족의 원시적인 삶에서 인간이 감히 어쩌지 못하는 자연은 두려움과 공경의 대상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연숭배신앙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자연을 통한 갖가지 형태로 오늘날 우리 민족의 삶을 여실 있게 들여다볼 좋은 자료가 되었다. 특히 나무를 조각하여 인간의 길흉화복과 내세의 안녕을 빌었던 목인(木人)은 우리의 독특한 예술성뿐만 아니라 당대 민중의 정서까지도 함축하고 있어 역사를 반추하고 그 맥을 잇는 위치로 자리매김했다. 이 같은 사고에서 30일 <뉴스포스트>는 목인 박물관의 김의광 관장을 집중 조명했다.

먼저, 목인에 대한 간략하게나마 설명을 부탁한다.

목인은 사람이나 동물, 꽃 새 등의 다양한 모습을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것을 말한다. 목인(木人), 목우(木偶), 목상(木像)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입구의 장승이나 솟대, 불교 사찰과 신당, 목조각상 등도 다 목인에 속한다.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한 우리의 전통 목조각상을 모두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목인을 우리의 조상들은 어떤 용도로 사용했다고 보는가

보통은 주술적인 용도에 많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비는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 관혼상제는 물론 불교에서도 목인은 빠지지 않는다. 특히 상여를 장식하는 데 있어 목인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 즉, 상여의 난간을 장식하는 목인은 현세의 기쁨과 슬픔,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명복의 뜻이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우리의 조상들은 죽음을 슬프게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삶과 연장선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이승에서 누린 모든 행복한 기억들을 저승길에 함께 가져가기를 바랐던 마음에서 목인을 사용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인박물관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목인박물관 상여(=뉴스포스트)

문화적 충격 때문이었다. 1975년, 그즈음 우연히 미 8군 외국인 지인의 집에서 그 친구의 소장품을 봤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민속품들이었다. 상당한 문화적인 충격이었다.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람이 외국인도 가치를 알아보는 우리나라 민속품을 몰랐다는 사실의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인사동, 황학동, 중앙시장, 청계천 등을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등잔이며 자잘한 민속품들을 사 모았다. 그러다 80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섰다.

현재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목인은 몇 점이나 되는가

우리나라 목인이 약 5.000여 점이 된다. 인도, 네팔, 중국, 티벳 등 아시아의 목인도 약 3.000여 점이다. 이 밖에도 두루 합치면 20,000 여점이 된다.

유물 중 김 관장이 특별히 아끼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 다 소중하다. 그래도 굳이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상여다. 특히 상여를 장식하는 부속품 중, 학은 아주 매력적이다. 우아한 긴 목과 축약된 몸통이며 또 과장과 축소의 비례가 진짜 놀랍다. 마치 현대미술품을 보는 듯 감각적이다.

상여는 언제 어디에서 구입한 것인가

산업화로 농촌의 젊은이들이 서울로 대거 몰리던 때다. 젊은이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이 시작되던 그때 우리의 많은 전통 유물들도 함께 방치되고 유실되기 시작했다. 그 유실되는 과정에 상여의 부속품들이 골동품 시장으로 몰려나왔다. 황학동, 청계천, 중앙시장 등 골동품 시장을 돌며 상여의 부속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서울태생인 나로서는 처음 보는 상여가 매우 생소했다. 그것이 상여의 부속물인 줄 모르고 샀다. 파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도 양반들이 쓰던 장난감이네 농악에서 쓰이는 물건이네 하면서 팔았다.

수집 과정에 특별히 어려웠던 점이나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아마도 네팔의 목인이었던 것 같다. 공항의 검색대에 걸렸다. 나무에 흙이 묻어있다는 이유였다. 전부 태우거나 네팔로 반송하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외국에 나가 다시 배로 들여왔다. 그럴 때가 제일 당황스럽다.

그런 일을 겪게 되면 한동안은 의욕상실일 것 같다. 박물관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가.

장원산업에 몸을 담고 있었다. 1974년 태평양에 입사해 화장품과 설록차, 돌핀스 야구단 대표이사를 거쳐 장원산업의 회장으로 퇴직했다. 그래서 특별하게 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난 특별할 것은 없다. 사람이 나서면 물러날 때가 있는 법, 때에 맞춰 행보를 정했다. 현재 나는 이 일이 매우 만족하고 즐겁다.

목인박물관의 상여 부속품(사진=뉴스포스트)

평소 김 관장의 신조가 궁금하다.

신조를 설명하는데 특별히 사자성어나 미사여구는 모른다. 굳이 말을 한다면 진인사대천명이다. 그리고 적재적소(適材適所)와 적시(適時)다. 지금 여기 인사동에서 한국의 독특하고 대표적인 유물을 널리 알리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또 우리 유물이 사랑받아야 할 시기에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적재적소(適材適所)와 적시(適時)는 돌아가신 부친의 영향이다.

부친과 (適材適所) 관련해서 이야기를 부탁한다.

선친(고 김일환)은 자유당 시절 상공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셨다. 선친과의 일이라면 프란체스카 여사와 병풍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궁중십장생 병풍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로부터 감사의 선물이었는데, 선친은 그것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셨다. 김활란 박사 탄생 100주년 때였다.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자 하시는 생각에서 선뜻 기증하셨던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적재적소를(適材適所)몸소 실천하신 거로 생각한다.

기증문화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이 많을 것 같다. 이 기회에 한 마디 부탁한다.

기증문화, 좋다. 그렇지만 기증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기증문화에 대한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기증자의 예우다. 물론 기증유물의 대우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전시회에 기증자 초대는 물론 기증자가 세상을 떠나서도 그 유족들에 대해 고마움의 예우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기증물에 대해 일정한 기간을 두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럼 지금의 기증문화는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 박물관의 계획은 무엇인가

먼저 가깝게는 호주 시드니 한국문화원에 소장품들을 전시할 계획으로 추진 중이다. 그리고 내년엔 이곳 인사동 박물관을 정리해서 서울의 가까운 부암동으로 옮겨볼 생각이다. 현재 전시관이 부족해서 다 전시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유물이 20,000점이 넘다 보니 그렇다. 전시관을 넓혀서 실외는 석상도 전시할 계획이다. 어쨌거나 우리 5천 년 역사의 숨결을 더 많은 관람객과 나누고 싶은 욕심이다.

박물관 발전에 관해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

옛날과 달리 여러 상황에서 달라진 건 확실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따른다. 특별한 콘텐츠도 없고 제대로 유지관리도 안 되는 지자체장들의 국공립박물관은 난립하는데 콘텐츠가 풍부한 개인 박물관은 전시관이 문제다. 국공립박물관과 개인박물관 간의 콜라보레이션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진의 <민화박물관> 신한의 <해태박물관> 강릉의 <대관령 박물관>처럼 말이다. 그리고 문화가 있는 날을 정해 관람료 무료와 할인을 지시하는 정부의 방침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날은 외국인도 무임승차 격이다. 유물의 가치를 즐기기 위해선 반드시 그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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