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한국 현대사의 풀리지 않은 매듭이었던 ‘여순사건’이 74년 만에 진상 규명의 기회를 얻었다. 여순사건 관련 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출범한 것.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사진=뉴스포스트 이별님 기자)

21일 정부는 이날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김부겸 국무총리 주재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이하 ‘여순사건위원회’)가 제1기 민간위원 위촉장 수여식 및 첫 회의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여순사건위원회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지난해 6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설립 기회를 얻었다. 국무총리 소속으로 출범한 여순사건위원회는 위원장을 국무총리가 맡는다. 부위원장인 행정안전부 장관을 포함해 국방부 장관, 법무부 장관, 법제처장, 전라남도지사 등 5명의 정부위원과 9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된다.

이날 위촉된 제1기 민간위원은 유족대표, 법조계, 학계, 지역·시민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로 꾸려졌다. 이규종 구례 유족회장과 서장수 여수 유족회장, 윤현주·김낭규 변호사, 홍영기 순천대 명예교수, 장준갑 전북대 사학과 교수,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주철희 함께하는남도학 소장, 정호기 우석대 초빙교수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 소속 군인 일부가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사건으로 군경은 물론 전남 지역 일대 시민들까지 1만 명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한 여수와 순천의 앞 글자를 따 여순사건으로 명명됐다. 

현대 역사 관점에서 바라보면 여순사건은 국가 폭력인 제주 4‧3 진압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항쟁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이념 갈등이 첨예했던 당시에는 명령을 거부한 이들이 희생을 피하기 어려웠다. 무고한 민간인들도 억울하게 처벌됐다. 진상규명 역시 오랫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19일 제 73주년 여순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 및 추념식이 전남 여수시 이순신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해 10월 19일 제 73주년 여순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제 및 추념식이 전남 여수시 이순신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여순사건위원회는 여순사건의 진상규명, 희생자 및 유족의 심사·결정과 명예회복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의결하게 된다. 우선 전남도지사 소속으로 설치되는 실무위원회가 이날부터 내년 1월 20일까지 1년간 진상규명을 위한 희생자·유족 신고를 접수받아 사실조사를 벌인다. 신고서는 실무위원회에 직접 또는 우편으로 제출할 수 있다.

여순사건위원회에서 진상규명 조사 개시를 결정하면 2년간 조사가 진행되며, 조사 종료 후 6개월 이내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해 공개하게 된다. 진상조사보고서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도 설치·운영한다.

실무위원회의 사실조사를 토대로 희생자·유족 여부를 심사·결정한다.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 중 지속적인 치료나 간호가 필요하다고 신청한 사람에게는 의료·생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결정할 수 있다.

김 총리는 이 날 회의에서 “해방공간에서의 첨예한 좌우대립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여순사건은 우리 현대사에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로 남았다”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희생된 여순사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이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국민통합은 진실규명과 이에 바탕한 상호 이해 속에서만 가능하다”며 “여순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통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는 위로를, 후대에는 역사의 진실을 안겨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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