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80%, '조력존엄사' 국내 도입 찬성
해외서 조력존엄사 선택한 고 조순복 씨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

1948년 12월 10일 UN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 첫 문장은 인간의 보편적인 존엄성을 말한다. 참혹했던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1천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나서야 인류는 비로소 천부인권(天賦人權)을 전 세계에 선언하게 됐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반 세기가 지나자 인간은 죽음에도 존엄성을 논하게 된다. 사망을 목전에 둔 환자를 위한 '안락사(安樂死)'와 '존엄사(尊嚴死)'에서 스스로 사망 시기를 선택하는 '조력(助力)존엄사'까지 죽음에 대한 인류의 논의는 점차 확대 돼왔다. <뉴스포스트>는 '존엄한 죽음' 중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자 여전히 논쟁적인 '조력존엄사'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뉴스포스트=이별님 기자] 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분주했던 2025년 새해 벽두. 대한민국 어딘가에서는 '존엄한 죽음' 관련 담론이 낮고 묵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 2023년 스위스 조력사망 기관을 통해 '조력존엄사'를 선택한 고(故) 조순복 씨의 이야기가 미디어와 출판을 통해 소개된 것이다.

고인의 딸인 남유하 작가는 어머니의 투병생활과 죽음을 다룬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올해 1월 출간했다. 65세 때 유방암 판정을 받고 절제 수술을 한 조씨는 10년 넘게 건강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뒤늦게 암이 전이되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조씨는 스위스의 조력사망 제도를 알게 됐고, 2023년 스위스로 떠나 생의 마지막을 결정했다.

남 작가의 사연으로 조력존엄사 국내 도입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조력존엄사란 환자가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처방받아 스스로 삶을 끝맺는 방식이다. 불치병 등으로 고통받는 환자에게 의사가 약이나 주사 등으로 사망을 유도하는 '안락사'의 일종이다. '존엄사'는 의료진이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연명치료를 중단해 환자가 자연스럽게 사망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안락사와 존엄사, 조력존엄사는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다르다. 셋 다 질병 등으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이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이지만, 안락사와 존엄사는 의료진이 환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반면 조력존엄사는 의료진의 도움을 받지만, 환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이 때문에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 조력존엄사는 '의사조력자살'로 불린다.

국내에서는 모든 종류의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다가 2009년 이른바 '김 할머니 사건'으로 논의가 시작됐다. 식물인간 상태인 김모 할머니의 가족들이 병원을 상대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는 소송에서 대법원이 처음으로 연명 치료 중단을 허용했다. 해당 판결을 계기로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소극적 안락사, 즉 존엄사가 국내에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조력존엄사의 경우 해외 사례만 봐도 허용하는 국가가 많지 않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콜롬비아, 뉴질랜드, 호주 빅토리아주 등 일부 선진국만 조력존엄사 또는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가 2002년 가장 먼저 안락사를 도입했는데, 조력존엄사와 적극적 안락사 모두 허용하고 있다.

조력존엄사 합법화를 찬성하는 이유. (그래픽=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제공)
조력존엄사 합법화를 찬성하는 이유. (그래픽=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제공)

조력존엄사, 국내 도입 가능할까

남 작가의 어머니 조씨는 존엄한 삶의 마지막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멀리 해외까지 가야 했다. 국내에서는 연명 치료 중단 외에는 다른 방법의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력존엄사에 대한 국내 여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제도 도입 시기가 멀지 않았다는 기대도 나온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달 발표한 '미래 사회 대비를 위한 웰다잉 논의의 경향 및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성인남녀 1021명 중 조력존엄사 합법화를 찬성하는 비율은 무려 82%다. 조력존엄사 합법화 찬성의 가장 큰 이유는 '무의미한 치료의 불필요성'이 41.2%로 가장 높았다. '인간의 자기 결정권 존중'이 27.3%로, 2위를 차지했다. 이어 '죽음의 고통 감소'가 19%, '가족의 고통·부담 감소'가 12.5%다.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항목의 중요도는 '죽을 때 신체적 통증을 가급적 느끼지 않는 것'이 97%로 가장 높았다. 이어 '가족이 경제적 부담을 많이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가족이 병수발을 오랫동안 하지 않는 것', '내가 원하는 방식 존중하는 것'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조력존엄사의 법적 도입은 2022년 제21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논의됐다. 조력존엄사 허용을 담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 발의된 것이다. 하지만 여야 정치권의 첨예한 대립과 조력존엄사에 대한 거센 찬반양론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임기 만료 폐기됐다.

하지만 조력존엄사에 대한 입법 논의는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다. 조력존엄사 제도 도입을 위한 단독 법률안이 발의된 것이다. 제21대 국회보다 제도 도입 의지가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탄핵심판 등 혼란스러운 시국이 마무리 된다면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한 단계 나아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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