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은 도시의 빽빽한 사유지 속에서 숨통처럼 트여있는 ‘공공공간’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광장에 모여드는 사람들 자체가 공간의 성격을 결정한다. 언제는 시장통으로, 언제는 혁명의 근원지로, 언제는 문화와 축제의 장으로 분하는 것이 광장이 가진 포용성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광장은 누구나 모이는 공간이 아닌, ‘내 편’이 모이는 공간이 돼 버렸다.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대표되는 광장 정치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뉴스포스트>는 우리 사회가 건강한 ‘소통의 광장’을 되찾기 위한 합리적인 방안을 3회에 걸쳐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김혜선 기자]

(그래픽=김혜선 기자)
(그래픽=김혜선 기자)

광장의 역사

광장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에서 시작된다. 아고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으로, 당시 고대 그리스 시민들은 아고라에 모여 정치적 토론을 벌이거나 시장을 형성하거나 문화·예술을 전시하는 등 활동을 벌였다.

오랜 광장 문화를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는 시대와 역사에 따라 광장의 용도가 달라졌다. 중세유럽의 광장은 왕족의 행렬이나 축제같이 권력층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쓰였고, 이를 통해 백성들은 도시민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시민혁명을 거치며 광장은 ‘민주적 공론장’으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광장에 모인 부르주아 계급의 시민들은 정치적 의견을 나누고 적극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우리나라의 광장 문화도 시대를 지나며 조금씩 변해왔다. 일각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광장문화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백영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부교수는 저서 ‘서울사회학’에 실린 ‘서울의 광장문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에서 조선 시대 육조거리와 종각 일대에 형성된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 우리 광장문화의 뿌리라고 봤다. 상언은 국왕이 궁궐을 나와 행차할 때 그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정조 시대에 특히 활성화됐다. 격쟁은 상언을 청하기 위해 꽹과리 등을 시끄럽게 울리는 행위다.

대한제국기 시절 광장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당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양반관료, 중인, 지식인과 평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여하는 장을 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 현대사에는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등 시민운동의 공간으로 광장이 사용됐다.

21세기 광장 문화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꽃피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광화문을 가득 메운 응원 열기는 축제의 장으로서 광장이 사용됐다. 같은 해 광화문에서는 광장 집회에 심볼처럼 등장하는 ‘촛불’이 처음 시작되기도 했다. 당시 광화문 촛불집회는 심미선, 신효순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목숨이 잃는 참변으로 촉발됐다.

하지만 촛불집회는 소위 ‘운동권’ 집단의 시위 방식으로 편입됐다. 조직화된 이들은 촛불집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다양한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소규모로 모였다. 하지만 광장을 가득 채울만한 인파가 모이지는 않았다.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수많은 국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때다. 5월2일부터 7월12일까지 장장 2개월이 넘게 이어진 광화문 집회는 지금까지의 시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누구든 광장에 모인 인파를 주도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노래와 춤으로 촛불집회를 ‘문화’로 만들었다. 광장이 공론장이 된 동시에 축제의 장으로도 사용된 셈이다. 당시 촛불집회를 통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지는 못했지만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냈다.

지난 2016년은 현 정권을 탄생시킨 광장 정치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분노한 시민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왔다. 한창 광화문 광장이 들끓었던 11월~12월은 대한민국 헌정사 최대 시위 기록을 매주 갈아치우기도 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는 5%. 결국 국회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고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는 만장일치 의견으로 박 전 대통령을 파면했다.

두 개의 광장

그동안 광장은 국민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민의의 장으로 사용돼왔지만 최근 조국 법무부 장관 사태를 계기로 시작된 광장 정치는 두 개의 세력이 나뉘어 대결을 펼치는 분열의 장으로 변하는 모양새다. 이 같은 분열은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대표되는 공간의 분화까지 이르렀다. 특정한 이슈에 분노한 국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드는 양상은 비슷한데, 모여든 광장이 두 곳이 된 것.

지난달 28일 서초동에서 열린 검찰개혁 집회와 조국반대 집회. (사진=뉴시스)
지난달 28일 서초동에서 열린 검찰개혁 집회와 조국반대 집회. (사진=뉴시스)

지난달 28일과 5일, 오는 12일 열리는 서초동 집회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 및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이들이 모였다. 반면 지난 3일과 9일 광화문에서 개최한 집회에는 조 장관의 퇴진과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는 정 반대이지만, 상대방의 집회를 두고 ‘관제 동원’이라고 비난하는 양상은 같다. 집회 개최 측에서 “200만이 모였다” “300만이 모였다”는 등 광장에 결집한 숫자를 한껏 부풀리는 것도 비슷하다. 두 진영이 집회 인원에 연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수가 됨으로써 자신의 집회가 ‘진짜 민심’임을 증명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광화문과 서초동의 숫자 싸움은 ‘내가 바라는 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깔려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당시 광장의 힘으로 정권이 바뀌는 상황까지 목도한 바 있다. 정치권도 기름을 부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각자 진영에 맞는 광장으로 달려가 ‘이것이 진짜 민심’이라며 지지했다.

지난 9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조국 반대 범보수 집회. (사진=김혜선 기자)
지난 9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조국 반대 범보수 집회. (사진=김혜선 기자)

문제는 각 진영이 서로를 바라보는 태도다. 애당초 광장은 소통과 상호 이해의 공간이지만, 현재의 광장 집회는 상대방을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진정한 통합을 위한 노력을 찾아볼 수 없다. 광화문은 서초동을, 서초동은 광화문을 ‘우매한 국민’으로 보고 대화의 문을 닫아버린다. 이 지점에서 광장 집회는 ‘참여 민주주의’에서 ‘국론 분열’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가 네 편 내 편이 아닌 소통의 광장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뉴스포스트>는 두 진영을 대표하는 광화문과 서초동 광장을 찾아 집회에 참여한 국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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