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찻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문화의 거리 홍대앞은 시대에 따라 변해가고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홍대앞’이라는 단어는 ‘홍대’와 ‘앞’이라는 명사가 합쳐져 고유명사가 되었다. 홍대앞은 행정적으로는 동교동과 서교동 그리고 상수동 일부를 말한다. 학술적으로 정의한 학자들도 있는데 ‘다양한 장소성의 층위, 즉 다양한 장소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 정의한다.
홍대앞을 어디에서 어디까지라고 콕 집을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경의선 숲길과 만나는 홍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서울화력발전소 입구까지, 먹자거리와 쇼핑거리로 이어지는 ‘어울마당로’를 대표적 장소로 꼽는다.
기차가 다녔던 홍대앞 어울마당로
오래전 어울마당로에는 기차가 다녔다. 그 기찻길은 당인리 발전소에 무연탄을 나르던 ‘당인리선’이었다. 현재의 경의선 숲길을 따라오던 철로가 홍대입구역 공항철도 입구 즈음에서 갈라져 홍대앞 먹자거리와 쇼핑거리를 지나서 당인리 발전소까지 이어졌다.
기자는 70년대 중반 그 근처에 살았었는데 하루에도 여러 번 무연탄을 싣고 느릿느릿 다니던 화물열차를 기억한다. 홍익대학교 정문에서 청기와주유소로 향하는 도로 중간에는 철길 건널목이 있었고 “땡땡, 땡땡” 울리는 신호음과 함께 기차가 천천히 지나던 모습도 떠오른다. 기차가 겨우 지나갈 만한 공간이었기에 느릿느릿 지나갔다.
홍대앞 어울마당로를 가보았다면 좁고 기다란 목조 건물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현재 그 건물에는 의류와 악세사리 그리고 식당과 타로 가게들이 영업하고 있다. 그런데 오래전에 그 건물에는 사람들이 살았다. 지금처럼 점포가 들어찬 게 아닌 사람들 거주 공간이었다.
친한 친구가 그곳에 살았었기 때문에 난 자주 놀러 가기도 했다. 마치 다락방을 올라가듯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던 친구의 집에서 기차가 지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재도 당시의 계단을 그대로 활용한 듯한 점포 입구가 인상적이다.
기찻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기다란 화차가 달리던 철길 끝, 한강 쪽 하늘을 향해 솟은 당인리 발전소의 굴뚝, 그리고 굴뚝에서 솟아오르던 검은 연기. 내가 기억하는 오래전 홍대앞 어울마당로 모습이다.
당인리선은 당인리발전소의 무연탄 수송을 위해 용산선의 서강역과 당인리역을 잇던 철도다. 서강역(지금의 서강대 인근), 세교리역(지금의 공항철도 홍대입구역 부근), 방송소앞역(지금의 홍대앞 쇼핑거리 인근), 당인리역(지금의 서울화력발전소 앞) 등 모두 네 곳의 기차역이 있었다. 1929년에 운행을 시작한 당인리선은 무연탄 사용이 줄어들자 1980년에 폐선되었다.
무연탄 수송뿐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두 량짜리 여객열차도 다녔다. 방송소앞역은 조선총독부 시절 경성방송국 연희송신소 직원의 통근 편의를 위하여 생겼다. 연희송신소는 현재의 KB국민은행 서교사거리 지점 근처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자가 초등학생 때 이 통근 열차를 이용하던 선생님이 1974년 즈음 여객노선이 폐지되자 아쉬워했던 게 기억난다. 방송소앞역은 어울마당로 79-1 인근에 플랫폼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거듭된 도로 재포장으로 사라졌다.
“철길요? 아주 오래전에 기차가 다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 기차역이요? 금시초문인데요.”
어울마당로에서 근무 중인 어느 관광통역안내원과 옛 방송소앞역 자리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의 반응이다.
상수동 쪽 어울마당로 끝에서 서울화력발전소를 바라보면 길 건너에 편의점이 들어선 건물이 있다. 그 뒤로는 발전소까지 쭉 연립주택이 이어진다. 그 블록이 예전에 당인리선이 철길이 있던 곳이다. 홍대앞 어울마당로는 철길만 그냥 들어내고 보행자 거리를 만들었고, 상수동과 당인동 지역은 철길을 뜯고 건물과 주택들을 지었다.
아무튼, 현재 당인리선 철길의 흔적은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몇몇 철도 매니아와 블로거에 의해 방송소앞역 플랫폼 흔적 사진들만 남았다. 사진 말고 표지석이나 안내판이라도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아무 데도 없었다.
홍대앞의 변화는 지금도 계속
홍대앞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이 지역이 대중의 뇌리에 특별한 곳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부터다. 미술 분야 예술가들이 이 지역에 작업장을 내며 2000년대 초반까지 문화 예술의 거리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된 계기를 여러 분야 학자들이 1984년 홍대 입구에 지하철 2호선이 들어서면서였다고 본다. 당시 홍대 인근은 임대료가 낮았고, 주거 건물 역시 아파트보다는 단독 주택이나 빌라 형태가 많아 옥탑방과 반지하 건물이 많았다. 미대생과 젊은 작가들은 이러한 공간을 작업실로 활용했다.
80년대 홍대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을 <홍대앞, 이태원을 따라가나>라는 ‘한겨레21’ 2002년 11월 7일자 기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87학번인 제가대학 다닐 때만 해도 108작업실(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8만)이나 208화실(200만원에 8만원) 같은 저렴한 공간이...”
2000년대부터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를 2002 월드컵이 촉발했다고 보는 관측이 많다. 홍대의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예술적인 분위기를 즐기려는 대중들이 찾기 시작했다. 이때 분위기 좋은 카페와 식당들이 많이 들어섰고, 이전의 매니아적인 분위기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확대되었다고 본다.
2010년대의 홍대앞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를 대중에게 알렸다. 도심의 특정 지역이나 장소가 용도가 변해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면서 기존 거주자 또는 임차인들이 내몰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때부터 “홍대는 망했다”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색있는 카페나 식당 대신 프랜차이즈가 들어오고 다른 유흥지역과의 차별점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대신 과거의 홍대앞 분위기가 주변부인 상수동과 망원동, 그리고 경의선 숲길과 연남동으로 넘어갔다.
"한마디로 고사 일보 직전이죠. 클럽이나 라이브 공연장은 임대료를 내지 못하고 문을 닫는 형편이고, 결국 기업이나 자본을 가진 자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는 하죠. 뮤지션 등 예술인들은 홍대앞을 떠나 주변부로 밀려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홍대앞 인디씬을 대표하는 '케이 인디 음악협회'의 이사며 현재 '칠리뮤직코리아' 대표인 이준상씨가 전하는 홍대앞 문화예술계 지금 분위기다.
도시재생의 소재가 되는 옛 기찻길과 발전소
도시재생은 지역의 특색 있는 자원을 활용하여 물리적인 환경뿐 아니라 경제ㆍ사회ㆍ문화ㆍ복지 등의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활성화하여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도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사업을 말한다.
옛 당인리선이 지나던 홍대앞 또한 도시재생의 소재가 될 모양이다. 서울 마포구는 옛 당인리선이 지나던 당인동 일대에 철길을 주제로 한 '당인문화로(路)'를 조성한다고 지난 11일 밝혔다. 그 계획에 의하면 화력발전소로 석탄을 나르던 철길이 젊음의 거리 홍대와 한강을 잇는 문화길로 탈바꿈할 거라고 한다.
세부 계획을 보니 역사적 흔적을 기반으로 철길을 주제로 한 교차로를 만들고 옛 당인리역 포토존과 휴식공간 쌈지공원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
벽화를 그리고 표지판을 꾸미고는 도시재생으로 포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다른 지역 도시재생이 그러해 왔으니까.
아무튼, 지금 젊은 세대가 기억하는 홍대앞과 미래 세대가 목격하는 홍대앞은 크게 다를 것은 분명하다. 도시는 항상 변해가니까.
